
3277.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5월 17일)
매주 토요일마다, "호모 헌드레드 시대(100세 시댸), '꼰대'에서 '꽃대'라는 이름으로 '나이 듦'에 대한 문제를 사유해 볼 생각이다. 노인 '문제'가 아니라, 노년 '존재'로 관점을 바꾸어, 다시 말하면 노인을 '존재'의 관점으로 보는 인식 전환을 해보려 한다. 이에 따라 '노년의 존재 모습'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나누어 담론을 만들어 보려 한다.
▪ 먹고 사는 문제로서의 양식(糧食) 모습
▪ 품위 있는 삶과 사회를 위한 양식(良識) 모습
▪ 일종의 문화 스타일(style)을 의미하는 문화적 문법으로 서의 양식(樣式) 모습
이런 사유 거리를 제공한 책은 <<나이 듦 수업>>(서해문집)이다. 부제가 '중년 이후, 존엄한 인생 2막을 위하여'이다. 그 중 오늘은 고전인문학자 고미숙의 이야기를 만난다. 그녀의 주장은 '어른'으로 늙어갈 용기를 말하며, 상투적인 생로병사관에서 벗어나 '어른'으로 늙어갈 권리를 누리며, 자신의 생체리듬을 회복하고, 혈연적 관계망에서 벗어나 우정의 시간을 살아가자고 말했다. 그러면서 무엇보다 '어른'으로 늙어갈 권리를 위해 스스로에 대한 질문을 포기하지 말자고 했다. 그의 강의록을 읽어 가며, 관심 가는 이야기들을 나열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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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는다. 태어나면서부터 늙고 병들어 죽는 일을 어떤 사람도 피할 수 없고 온전히 겪어야 한다. 그 앞에서는 모두가 공평하다. 그러니 우리는 생로병사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그게 공부하는 이유이다. <<동의보감>>에서 말하는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수명은 125세이다. 수명이라는 게 성장기에 5를 곱하면 나오는 거라 한다. 인간이 성장하는 시간을 25년으로 본다. 스물다섯까지는 계속 성장세포가 열려 있다가 그 이후에는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다는 거다. 5를 곱하는 이유는 음양오행에 따르는 거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산업혁명 이후 몇 백 년 동안 인생을 편향적으로 살았다. 열심히 일하고, 돈 벌고, 돈 쓰다가 50, 60이 돼서 정년을 맞이하면 죽는 거였다. 그러니까 자본주의 생로병사관이 '돈 벌다 죽어버려라'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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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이 풍요로워지면 정신은 빈곤 해진다.' 평소의 내 생각이다. 현대의 자본은 인간을 '풍요롭게 만드는 부'가 아니라 인간을 '가난하게 만드는 부'를 만들 뿐이다. 왜냐하면 자본은 끊임없이 '새로운 필요'를 만들어 내지만 그 새로운 필요를 선택하고 구입할 수 없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일상화된 궁핍에 시달려야 한다. 이를 "현대적 가난"이라고 한다. 이반 일리치, <<누가 나를 쓸모 없게 만드는가?>>(허택 옮김)에서 얻은 생각이다. 현대사회의 자본은 인간을 불구로 만든다. 어떻게? 발달된 교통 수단을 이용할 수 있게 된 대신에 튼튼한 다리로 어디든 갈 수 있는 능력을 잃게 되었고, 교육의 기회는 늘었지만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독학의 능력을 상실하고 있다. 또한 아주 사소한 상황에서도 119를 찾는 현대인들은 '위험에 스스로 대처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됐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든지 해결 할 수 있는 문제도 '전문가의 손'에 맡김으로써 스스로를 무력화시키고 있다. 돈만 있으면 다 되고, 행복할 거라라고 믿지만 돈이 있어도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 언제나 주치의를 부를 수 있는 경제력 대신에 부지런히 일상 속에서 즐겁게 살아가며 좀처럼 병원의 문을 두드릴 필요가 없는 건강한 삶을 사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은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얼마든지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갖는 대신 골치 아픈 문제에 시달리지 않는 삶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사람은 기업과 전문가가 만든 상품에 어느 정도를 넘어 지나치게 의존하다 보면 자기 안에 있던 잠재력이 파괴된다"(이반 일리치). 내가 늘 가슴에 품고 사는 문구도 "역경을 이기긴 쉬워도 풍요를 이기긴 어렵다"이다. 늘 '풍요'를 경계하며, 노자가 말한 ""見素抱樸(견소포박, 순결한 흰 바탕을 드러내고, 통나무를 껴안아라)"과 "少私寡欲(소사과욕, 사사로움을 적게 하고, 욕심을 적게 하라)" 정신과 "습정양졸(習靜養拙, 고요함을 습관들이고, 고졸함을 기름)"의 태도를 견지하려 한다.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균형이 중요하다. 물질적 가치를 선택해서 완전히 동물 이하로 살거나, 정신적 가치만 추구하며 모든 물질적 혜택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게 아니고, 물질과 정신 사이에 균형을 잡아야 하는 문제이다. 두 가지를 다 원한다면, 그건 탐욕(貪欲)이다. '탐(貪)자'는 조개 '패'자에 이제 '금'자로 이루어져 있고, '빈(貧)'자는 조개 '패'위에 나눌 '분'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까 탐욕은 화폐를 거머쥐고 있는 것이고, 청빈(淸貧, 맑은 가난)은 그것을 나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우리의 필요를 위해서는 풍요롭지만, 탐욕을 위해서는 궁핍한 곳이다."(마하트마 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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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100년을 산다는 것은 100년 동안 정확하게 생로병사의 스텝을 밟아가는 것이다. 25년씩 잘라서 인생을 '봄-여름-가을-겨울'로 사는 거다. 예전에는 60이 환갑이었다. 태어난 해와 똑같은 간지가 돌아오는 시절, 이게 환갑이었다. 60년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으로 보이지만 그때는 이 생로병사, 봄-여름-가을-겨울을 다 거친 존재의 충만함이 있었다. 이 계절들을 모두 겪어야 비로소 인생에 대해 뭔가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그래서 노인 문화가 전체를 이끌어 갔던 것이다. 겨울을 겪어 봐야 인생이 어떤 것인가를 말할 수 있지 않느냐는 거다. "가장 오래 산 사람은 나이가 많은 사람이 아니고, 많은 경험을 한 사람"이라고 루소는 말했다.
공자(孔子)는 일찍이 <<논어(論語)>> <위정(爲政)>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섰으며, 마흔 살에 미혹되지 않았고, 쉰 살에 천명을 알았으며, 예순 살에 귀가 순했고, 일흔 살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랐지만 법도에 넘지 않았다.” 공자의 이 말로부터, 15세를 지학(志學), 30세를 이립(而立), 40세를 불혹(不惑), 50세를 지천명(知天命), 60세를 이순(耳順), 70세를 종심(從心)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종심'은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하여도(從心所慾, 종심소욕) 법도(法度)에서 벗어나지 않았다(不踰矩, 불유구)”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70세는 장년에 불과하다. 75세부터 100세가 노인 연령이 란다. 현재 나이에 0.7을 곱해야 우리에게 익숙한 인생의 나이가 된다고 한다. '노인 한 사람의 죽음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 없어지는 것과 같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노인은 그 마을의 도서관이고, 사원이고, 한 권의 책이다. 노인이 가진 풍부한 경험과 지혜의 깊이를 빗댄 비유이다.
철 없는 상태로 대부분을 보낸 삶은 산 것이 아닐 수 있다. 이 시간성이 매우 중요하다. 나이 들고 오래 산다는 것은 내가 그 시간을 어떻게 통과하느냐가 핵심이지 그저 양적으로만 시간이 늘어난 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이제부터 라도 지혜를 연마해서 인생의 이치를 터득해야 겠다'라 생각하는 문화가 부족하다. 그냥 '막' 살면, 늙는 게 두렵고, 죽는 게 무섭다. 대신 '100세를 살았으니 충만하다'고 생각할 수 있게 살면, 죽을 때 두렵고 무섭지 않다. '봄-여름-가을-겨울'을 다 거친 노인의 지혜, 여기서 나오는 자유가 충만한 것이다. 아쉬움과 미련이 없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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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살을 살아도 생체리듬대로 살면 두렵지 않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남자는 8살, 여자는 7살이 기준이라 했다. 그러니까 남자는 8*8=64세, 여자는 7*7=49세가 자연스러운 폐경기가 된다. 각각 폐경기 이후에, 여성은 자기 안에 있는 양기, 남성적 기운이 나오고, 남성은 자기 안에 있던 음기, 여성적 기운이 나와서 음기와 양기가 섞인다. 남성과 여성 사이에 이제 사랑이 아니라, 우정의 시간이 시작되는 거다. 여성과 남성 모두 음양이 적당히 섞인 '인간'이 되는 거다. 남성, 여성이 아닌 '인간'의 시간이 온 것이다.
이전까지는 생식을 해야 하니까 남녀의 역할이 명확히 구분되었다. 남자는 8*3=24세, 여자는 7*3=21세에 아기를 낳는 게 좋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일하거나, 몸 값을 높이기 위해 학교를 다녀야 한다. 청년의 '에로스'가 모두 노동력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중세 정치에서 이상적인 왕으로 평가받는 기준은 GDP나 생산력 등이 아니라, "환과고독(鰥寡孤獨-홀아비. 과부, 고아, 늙어서 돌볼 이가 없는 노인들),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사회적 약자'라고 부르는 '끈이 떨어진 존재'들을 구제하면 좋은 왕이라고 보았다. 사실 외로운 사람이 많으면 천지의 따뜻한 기운이 다 얼어붙는다. 음양의 조화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에는 분명히 에너지장이 있다. 평소 나의 지론이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 사는 평균 수명을 가진 직업은 성직자와 지휘자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늘 감동하기 때문이라 한다. 평범한 우리도 날마다 감동하며 살면 오래 살 수 있겠지? 감동은 우리의 가슴을 따뜻하게 하고, 그 따뜻함이 에너지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까 매사에 감사해 하고, 모든 것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오래 산다. 사랑은 따뜻함에서 오는 것이고, 그 따뜻함은 우리가 감동받았을 때 얻는 에너지와 같기 때문이다.
사람이 잘 산다, 건강하다, 양생(養生)을 한다는 건 내 몸과 시공간의 리듬을 맞추는 거다. 봄에는 봄에 맞는 양생을, 겨울에는 겨울에 맞는 양생을 해야 한다. 그러니까 청춘은 청춘에 맞게, 중년은 중년에 맞게, 노년은 노년에 맞게 리듬을 밟아야 되는 데, 이 리듬이 어긋나는 데서, 병과 괴로움이 시작되는 거다. 청년들은 결혼도 임신도 못하고 이 사회에 편입되지 못해서 괴롭고, 노인들은 그 많은 시간을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정처 없이 떠돌다 보니, 그 사이에 낀 중년들도 행복하지 못하다. 왜 그럴까? 자본주의가 그렇게 만들었다. 젊음의 에너지를 계속 산업에 투여해서 화폐로 바꿨던 거다. 그러는 사이, 국가가 압축 성장을 하고, 민주화를 이루었지만, 그 청춘들이 노년이 된 다음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고 있다. 아직도 '봄-여름'의 열기로 사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니까 '가을-겨울'을 알지 못하는 노인 존재들이 방황하는 거다.
동양 사상으로 보면, '목↔화↔토↔금↔수↔목↔화↔토…', 이 기운들이 계속 순환하고 상생하는 거다. 다음 그림과 같다.

각각 봄(목)-여름(화)-환절기-(토)-가을(금)-겨울(수)로 순환한다. 봄에서 여름은 발산한다. 이게 청춘의 에너지, 다시 말하면 열정적으로 실험하고 모색하는 에너지로 이게 중년까지 가는 거다. 계속 이런 상태만을 유지하라고 명령하는 게 자본주의이다. 이런 식으로 발산만 하면서 우리는 살 수 없다. 자연이 허락하지 않는다. 자연에는 가을에서 겨울로 이어지는 수렴하는 시간이 있다. 발산하고 수렴하여 식힌 후에 다시 시작하는 게 자연의 이치이다.
이 이치를 우리들의 하루 24시간에도 적용 가능하다. 새벽 3시에서 오전 9시 반이 봄이라서 이 시간에 일어나고 기지개를 펴는 거다. 여름은 오전 9시 반에서 오후 3시 반으로, 에너지를 펼치고 창조하는 시간이다. 다시 오후 3시반에서 저녁 9시 반 까지가 가을, 열매를 거두는 시간이다. 저녁 9시 반부터 새벽 3시까지가 겨울, 열매마저 버리고 씨앗으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쉬고 자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음주가무와 게임, 쇼핑, 드라마 다시 보기 등으로 잠을 안 잔다. 왜? 이런 것들이 다 '상품'이다. 자본주의는 이 짧은 쉬는 시간도 허용하지 않는다. 이 시간에도 돈을 계속 쓰라고 요구한다. '낮에는 노동해서 돈 벌고, 밤에는 소비를 하라'고 명령하는 거다.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계속 일을 하라고 말한다. 인간은 물질을 어느 정도 축적하는 시간이 지나면 모두 자유인, '프리랜서'가 되어야 한다. 필요한 만큼 벌고 내가 떠나고 싶을 때 떠나고, 나의 노동과 삶을 조절하는 때를 맞이해야 한다. 그렇게 되지 못하는 이유는 돈 때문이다. 일을 사랑하고 일터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화폐가 필요한 거다. 사실 늙고 병들고 노쇠해 진다는 것의 축복은 많은 게 필요 없어지는 거다. 동서고금을 말론 하고, 양생의 원칙은 '소식(小食)하라는' 거다. 그런데 최근 너무 많은 '먹방'의 유혹에 빠진다. 쉬는 시간에도 무언가 먹고 사고 소비하게 만든다. 그래서 어른이 되지 못하고 청춘의 아류로 남아버리게 된 것이다. '청춘'으로 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김경미 시인의 <청춘>을 공유한다.
청춘/김경미
없었을 거라고 짐작하겠지만
집 앞에서 다섯 시간 삼십 분을
기다린 남자가
제게도 있었답니다
데이트 끝내고 집에 바래다주면
집으로 들어간 척 옷 갈아입고
다른 남자 만나러 간 일이 제게도
있었답니다
죽어 버리겠다고 한 남자도
물론 죽여 버리고 싶은 남자도
믿기지 않겠지만
‘청춘’ 하면,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으로 시작하는 수필이 먼저 떠오른다. “사랑의 풀이 없으면 인간은 사막”이라고도 했다. 청춘은 글자 그대로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는 봄철’을 뜻한다. 생명이 태동하는 시기인지라 정적이기보다 동적이다. 피가 뜨거워 운동과 여행, 모험을 즐긴다. 남녀 간의 사랑에도 눈뜨고,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짝사랑이나 실연은 물론 다툼과 절교, 화해도 반복한다. 그런 시행착오를 겪으며 인생을 알아간다. 시인의 젊은 시절도 다르지 않다. “집 앞에서 다섯 시간 삼십 분을 기다린 남자”도 있고, 양다리를 걸치기도 한다. 만나주지 않자 남자는 “죽어 버리겠다고”도 한다. 집에 바래다준 남자와 집에 들어갔다가 만나러 간 남자와는 헤어졌을 듯하다. 실연을 당하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겠지만, ‘세월이 약’이다. 지나고 보면 안다. 안타까운 건 도전보다 포기한다는 것이다. 사랑도 하고, 실연도 당해 봐야 하는데 말이다. “믿기지 않겠지만”, 그 힘으로 삶을 견딘다. 이 시를 소개한 김정수 시인의 멋진 덧붙임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청춘을 모방하면 안 된다. 그건 내가 살아온 시간들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른'으로 늙어가려면, '청문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다음 주 토요일에 이야기를 이어갈 생각이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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