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오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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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5월 16일)
쏟아지는 정보 때문에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바라게 된다. 이곳에 있으면 저곳에 가고 싶고, 여기에서 저기를 꿈꾼다. 이런 이유로 어떻게 모든 것을 해낼 것이냐가 아니라, 무엇을 하지 않을지 결정하는 게 중요하다. 더 소중한 것에 집중하기 위해 마음에 ‘빈 공간’이 필요한 것이다. 호흡을 수련하며 끊임없이 흘러가는 과거, 미래의 생각을 알아채고, 현재로 돌아와 바로 여기에 머무는 명상은 오래전부터 현자들의 지혜였다.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스마트폰으로 오염되고 분절된 시간 속에 사는 우리에게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건 ‘멍’이다. 타닥타닥 타 들어 가는 모닥불을 바라보는 ‘불멍’부터 호숫가에 앉아 잔물결을 바라보는 ‘물멍’, 한강이 보이는 호텔에 앉아 차를 바라보는 ‘차멍’, 집중해서 간식을 먹거나 노는 반려견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멍멍’은 현대인이 특별한 수련 없이도 할 수 있는 ‘일상의 명상’이다. 멍해지는 동안 시간은 느려지고, 잡념은 옅어 지고, 호흡과 맥박이 안정되는 것이다. 각자의 방식으로 과열된 뇌를 식히는 것이다. 쉬는 것과 잘 쉰 것 같은 느낌은 다르다. 최근 각광받는 ‘간헐적 단식’ 역시 내장기관에게 주는 휴식이다. 불멍은 ‘뇌’에게 주는 휴식이다. 다리가 부러진 사람에게 필요한 건 훈련이 아니라 휴식이다. 마음이 부러진 사람 역시 그렇다.
'멍 때리기'는 숲으로 나가 자연에 몸을 맡기는 산림욕과 비슷하다고 한다. 기분을 좋게 하고 스트레스를 줄여주며 혈압과 심박 수를 낮춰주는 효과가 있다. 멍때리기에 대한 관심은 올해로 10주년을 맞은 ‘한강 멍 때리기 대회’의 인기를 봐도 짐작된다. 2014년 장난처럼 시작된 이 행사는 해가 거듭될수록 관심이 높아졌다. 지난 5월 12일 서울 반포한강공원에서 열린 올해 행사에는 2787개 팀이 몰려 경쟁률이 35대 1을 넘었다 한다. 1등을 해봐야 상금도 없는데 너도나도 머리를 비우겠다고 몰려왔다. 본선에 오른 남녀노소 77개 팀은 90분 동안 어떤 말도, 행동도 하지 않고 멍한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행사를 주최한 시각 예술가 웁쓰양(WOOPSYANG)은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가치 있을 수 있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현대인의 뇌는 고단하다. 밀려드는 정보 속에 쉬는 시간조차 온전히 쉬지 못한다. 뇌는 몸무게의 3%에 불과하지만 신체 에너지의 20%를 소모한다. 뇌가 혹사당하면 몸도 쉽게 피로 해진다. 우리 뇌에는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MN)’라는 부위가 있다. 뇌가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을 때 이 부위가 활성화된다. 해외 여러 연구 결과, 지친 뇌를 쉬게 해서 DMN을 활성화시키면 일의 효율성이 높아지고 기억력이 좋아진다. 집중력과 창의력이 높아지고, 아이디어도 많이 나온다. 눈 건강에도 좋다. 머리가 복잡할 땐 아무 생각 없이 멍 때리는 게 필요한 이유다.
수년 전 <<멍 때려라>>라는 책이 있었다. 그만큼 바쁜 현대인에게 뇌를 쉬게 하는 시간이 얼마나 절실한지 많은 이들이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대중들의 이런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광범위하게 퍼진 인터넷과 스마트폰 문화 탓에 아직 말도 못 뗀 영유아까지도 멍 때리는 놀이 시간을 도둑맞고 있는 것 같다. 식당에서 어린 꼬마가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에 집중하는 모습을 자주 만난다.
배승민이라는 의사가 말하는 쉬는 방법을 공유한다. 스마트폰을 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려면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다. 주차장같이 꽉 막힌 지루한 고속도로 출퇴근길, 아무리 바빠도 길 위에 갇혀 있는 셈이니 이런저런 생각에 빠지거나 창밖을 보며 쉴 수밖에 없다는 장점이 있다. 그렇게 멍하니 낯선 곳에 떨어진 여행자가 된 기분으로 창밖을 보다 보면, 어느새 지친 나를 저 하늘이 가만가만 위로해 주려는 건 아닐까 싶은 착각마저 든다. 빈부나 지위와 무관하게 우리가 보는 하늘은 똑같은 곳에 있다. 잠시 뇌의 인위적인 과열을 식힐 겸 시간의 흐름이 선물해주는 풍경에 마음을 내려놓는 것은 어떨까? 우리 뇌에 꼭 필요한 ‘멍 때리기’와 함께.
인문 운동가는 문제가 있어서 패러다임이 붕괴된 상황을 두고 살아남는 것을 넘어서 이런 위기가 닥쳤을 때 더 이상 붕괴하지 않는 더 튼튼한 시스템이 무엇일까 고민하며, '건너 가기'를 감행하는 자이다. 제로 베이스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위기가 기회로 작동되게 하려면, 우선 현 상황의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고 판단하는 것을 중지하는 것이다. 이를 우리는 '판단 중지'라 한다. 이 것도 '멍 때리기'가 아닐까? 생각을 비우기 위해 '멍 때릴 필요가 있다는 거다. '멍 때리기'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판단 중지 상태이다. 다시 말하면 정보가 쏟아져 들어오니 생각을 멈추기 위해, 자기 방어 기재로 쓰는 거다. 자기만의 진공 상태를 만드는 거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익사하기 직전에, 노아의 방주처럼 진공의 배를 만드는 거다. 멍하다는 말은 외국어로 번역이 안된다. 이를 위해, 나는 생각에 "괄호"를 치곤 한다. 오늘 공유하는 시처럼 말이다.
괄호처럼/이장욱
(무언가를 보고 있었는데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내가 거기서 너와 함께 살아온 것 같았다.
텅 빈 눈동자와 비슷하게
열고
닫고
저 너머로 달아나는 너를 뒤쫓는 꿈
내 안에서 살해하고 깊이 묻는 꿈
그리고 누가 조용히 커튼을 내린다.
그것은 흡.
내가 삼킬 수 있는 모든 것
오늘의 식사를 위해 입을 벌리고
다 씹은 뒤에 그것을 닫고
그 이후 배 속에서 일어나는 일
몸에 창문을 만들지 않아도 가능한 일
블라인드를 올리지 않아도
길을 걷다가 조금씩 숨이 막힐 것이다.
발을 헛짚어 뚝.
꺼지는 구덩이가 되어
이제 모든 것이 너를 포함할 것이다.
가만히 제 눈꺼풀을 열어보는 사람이 되어
무서운 어둠을 얻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끝은 아니기 때문에
나는 너의 모든 것을 품고 싶은 것이다.
커다란 기념 수건으로
잠든 네 입을 꼼꼼히 틀어막는
이 기나긴 시간처럼)
지난 14일에 이어, 오늘도 마이클 해리스의 <<잠깐 혼자 있겠습니다>>의 책을 읽으며 홀로 있음의 가치에 대한 사유를 이어간다. 요즈음 같은 스크린 시대에 뭔가를 측량하고 싶은 욕구는 지도 이외의 것으로 멀리 확장된다. 우리는 불안한 자아에게 말해주기 위해 댓글을 달고 포스팅을 한다. 나는 혼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지금 우리는 온라인 코멘트를 활용하여 예전에는 혼자 있던 순간들에 금박을 입히고 싶어한다.
우리는 연결된 상태로 태어난다. 홀로 있음은 성숙한 인간이라야 가능하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다. 우리가 세계 어디에 가든, 아니면 삶의 어디에 있든 우리는 서버에게 알려지고 그 영역 속에 들어가 있다. 구글과 페이스북은 우리들의 움직임과 행동과 생각의 흔적을 남겨두지 않고 우리들의 삶을 영위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삶의 기록은 썩지 않는 삶의 배설물을 뒤에 남기게 되는 거다. 그렇지만, 우리는 인생의 어느 부분 동안 사라지고 추적되지 않을 권리를 고집하여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가공되지 않은 자아의 실체를 인식할 수 있다. 타인이 지켜보든 말든 우리는 존재한다는 것을 긍정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연으로 나가야 한다. <<자연에서 멀어진 아이들>>의 저자 리처드 루브(Richard Louv)는 "자연결핍장애"에 대해 설명하였다. 자연으로부터의 소외 때문에 치러야 하는 비용 말이다. 그것에는 "감각 활용의 감소, 주의력 장애, 신체적, 감정적 질병의 높은 비율"이 들어 있다. 자연에 나가면, 만물이 성장하는 것을 보고, 넓은 하늘과 창공을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해변에서 모닥불을 피우거나 시골길을 도보여행하면서 평소의 속박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율감을 느낄 수 있다. 원래 인간은 자연과 분리될 수 없는 삶을 살았고, 자연의 일부였다. 그러다가 이젠 자연을 소유하고 통제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들의 집이 되어주던 광활한 잡목 숲 지대를 거부하고, 그 이후로 우리는 도시에서 살고 있다. 도시는 우리의 감각적 경험을 빈곤하게 만들고, 빈곤해진 정체성으로 진정한 인간 지성에 필요한 겸손함의 감각이 결여된 정체성으로 이어졌다. 많은 여구들을 보면, 야생의 숲에 사는 사람들이 도시 속에 사는 사람들보다 주의력의 범위가 더 크고 만족감도 더 높다는 거다. 그 외 자연 속에서 지내면, 다음과 같은 일들이 벌어진다는 연구 결과가 많다.
- 풀이 무성한 목초지와 교통량이 많은 시내 도로를 각각 걷게 한 후 뇌 영상을 찍으면, 시내에서 걸은 사람들은 '반추'의 빈도가 훨씬 더 잦았다고 한다. 이는 우울증의 초기 증상으로, 생각에 잠기고 자기 비판에 빠지기 쉽다는 거다. 반추와 관련된 뇌 영역이 시내 산책에서는 불이 켜지는 반면, 자연 산책에서는 차분해졌다는 거다.
- 일본에서 '삼림욕'이라 알려진 숨으로 잠시 다녀오는 것은 코르티솔 수치를 낮추고, 면역 체계를 증진시킨다는 보고가 나왔다.
- 부자이든 빈민이든 학생들은 초록색 공간을 접할 때 공부를 더 잘한다는 보고도 있다.
- 단순한 초록색 경치를 보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를 해소해주고 곤경에 처했을 때 회복력을 증대 시킨다는 보고도 있다.
- 자연 속에서 지내는 시간은 후각, 시각, 청각을 아주 구체적으로 증진시킨다는 자료도 있다.
이 모든 이득의 누적된 효과는 분주한 도시의 영혼들에게는 일종의 진통제 체험처럼 보인다.
알약이 나오면서, 도시 인구들은 수면제와 항우울증 약으로 스스로를 관리하였다. 그러나 야생은 길들여져 추방되는 장소 라기보다는 우주와의 어떤 원초적 일체감을 느끼기 위해 잠시 돌아가는 장소가 되면서, 자연의 치유 효과가 재조명되고 있다. 몇몇 의사들은 천식, ADHD(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 비만, 당뇨, 불안증에 대해 '야외에서 시간 보내기'를 처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연이 주는 혜택은 짧은 유행에 그칠 수도 있다. 온라인 플랫폼들은 야외와의 접촉을 선전해도 이익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구글이 만든 새로운 캠퍼스는 문자 그대로 거대한 돔, 그 속의 '야외' 공간에서 날씨를 조절할 수 있는 돔 속에 세워진 마을이다. 그리고 아마존은 30미터 높이의 유리 돔 세 개를 시애틀 본사 밖에 지었다. 직원들은 멸종 위기의 식물들 사이를 산책하면서 브레인스토밍을 하고 있다. 하지만 야생, 황무지, 진정한 야외는 통제력이 인간의 손에 있지 않은 장소이다. 인간은 아주 큰 세계 속에 들어간 작은 몸뚱이가 되고 그에 따라 자아의 크기도 작아진다. 인간은 온라인 아바타와 트위터 글쓰기에 대해서는 완벽한 통제력을 뽐낼 지도 모르지만, 오프라인에서 관장하는 영역은 우주를 운영하는 도구 가운데 무한히 작은 비중의 것들 뿐인 것이다. 온라인에서는 우리가 현실의 삶에서 보다 더 빛나고 더 매력적인 존재가 된 기분, 더 큰 존재가 된 느낌을 받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자연세계는 우리를 정반대로 몰아넣는다. 숲으로 들어가면 우리는 존재가 사라진다. 무감각하고 움직이지 않는 풍경 속에서 인간이라는 주체는 하찮아진다. 인터넷이 '여기 있어. 이것 해봐'라고 말하는 반면, 삐걱거리는 나무숲은 '넌 알 수 없어, 오로지 놀라고 또 놀랄 뿐이지'라고 속삭인다.
호기심을 갖는 것을 겁내면 안 된다. 집 밖으로, 도시 경계를 넘어 걸어 나가는 것은, 우리가 그것에 기대어 살라오던 허세와 추정을 벗어 던지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마음을 알게 되는 방법이다. 차를 운전하는 것보다. 나는 밖으로 나가 걸어서 산책하는 것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내 의지에 따라, 나의 보조에 맞게 움직일 수 있고, 그러면서 나의 처지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산책하는 시간은 '업무 중단 시간'이다. 그 시간이 단순히 생각을 멈추고 쉬는 시간만은 아니다. 그 시간에 새로운 생각들이 떠오른다.
'느슨한 부속 이론(loose paths theory)'이라는 게 있다. 1972년에 건축 설계사 사이먼 니컬슨(Simon Nicholson)이 놀이터를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게 만들지 곰곰이 생각하던 주에 개발한 이 느슨한 부속 이론은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자신이 사물의 이미지를 한데 조합하려면 무작위적인 요소와 가변적인 환경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자연이 느슨한 부속들로 이루어진 무한한 근원인 것과 달리, 인공적 공간인 사무실이나 거실에는 한계가 있다는 거다.
어쨌든 밖으로 나와 혼자 경치 좋은 길을 걸으면,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느끼고 행할 자유를 얻는다. 나는 무엇보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 그런 것은 혼자 걸을 때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우리는 밖으로 나와 산책을 하면, 자연의 것들이 보내는 신호를 흘깃 보면서 자신이 자연 속에 속해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러면서 우리는 자신에 대한 새로운 생각과 타인에게 덜 의지하려는 각오를 만날 수 있다. 새로운 세계를 만나면, 우리는 새로운 감각을 만나게 된다. 예컨대, 강물을 들여다 보면서 시간이 달아나는 것을 보고, 나무에서 새순이 돋아나는 것을 보며 우리 자신도 새로워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얻는다. 그리고 그러한 감각을 가지고, 우리는 일상이 잘 유지되게 하여야 한다. 그래 어제 오후는, 오늘 사진처럼, 계족산에서 가서 맨발 걷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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