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오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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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5월 3일)
오늘 아침에 만난 문장이다. 지금은 마이클 해리스의 <<잠시 혼자 있겠습니다>>를 읽고 있다. 인간은 진사회성(eusocial)을 진화시킨 극소수에 속한다. '진사회성'이란 말은 개미학자 에드워드 윌슨이 여러 세대에 걸친 자기희생적 동물 계통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이다. 간단히 말하면, '진사회성'은 두 세대 이상 구성원이 함께 살면서 협동하고 이타적 행동을 하는 것이다.
1970년대 들어 미국의 하워드 에번스(Howard Evans), 찰스 미세너(Charles Michener), 에드워드 윌슨(Edward Wilson)과 같은 진화학자들은 번식 행동을 중심으로 사회성을 분류했다. 즉 부모의 자식에 대한 투자, 신구 세대의 거주지 공유, 자손에 대한 협동 돌봄, 번식 활동에 대한 분업 및 계급 분화, 그리고 성체 세대의 겹침 정도에 따라 동물의 사회성을 아사회성(Subsociality), 유사사회성(Parasociality), 진사회성(Eusociality) 등으로 구분한 것이다.
▪ 아사회성은 부모가 어린 자손을 일시적으로 돌보지만 자손은 성체가 되기 전에 부모 곁을 떠나는 물장군이나 몇몇 거미류에서 나타난다.
▪ 유사사회성 동물은 같은 세대의 개체들이 둥지를 같이 만들고 공동 육아를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번식기에만 협동하는 몇몇 말벌이 속한다.
▪ 진사회성 동물은 개미나 벌 같은 곤충으로, 가장 발달한 사회성을 갖고 있다. 여왕은 알만 낳고 나머지 암컷 일꾼은 평생 자매를 키우면서 살아간다. 아프리카 사막에서 굴을 파고 살며 여왕 혼자 새끼를 낳아 무리를 유지하는 벌거숭이두더지쥐도 진사회성 동물에 속한다.
남미 프랑스령 기아나 우림에서 사는 한 흰개미 종이 외부에서 적이 공격해오면 자폭해 무리를 지킨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흰개미 종들은 적을 발견하면 배설을 하거나, 배 근육을 수축시켜 배설물을 적에게 쏘아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새로 발견된 흰개미 종 일꾼은 젊었을 때 집을 돌보고 먹이를 구해오는 일을 하다가 나이가 들어 아래턱이 닳아 없어지고 힘이 빠지면 집 지키는 일만 맡는다. 태어날 때부터 뱃속에 품고 나온 ‘폭탄 배낭’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커진다. 모래성 문을 지키던 흰개미 일꾼은 다른 동물이 접근해 오면 독주머니가 든 배를 스스로 터뜨려 적에게 독물을 뒤집어씌우며 장렬히 전사한다. 이쯤 되면 진사회성의 진상이라 할 수 있겠다.
최근에는 아프리카 초원의 땅굴에서 사는 벌거숭이두더지라는 포유류도 여왕 한 마리만 새끼를 낳아 기른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이타주의적 진사회성이 왜 진화했는지, 진화의 궁극적인 종착점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다만 여왕에게 복종하고 자살폭탄을 터뜨리는 것 모두가 종족의 안정적인 번식을 위한 희생이라는 데는 큰 이견이 없다. 인간의 이기성이 낳은 타협의 산물인 사회성과는 다르다. 여왕에 대한 복종, 헌신이 진정해 보이지 않는 이유다.
인간의 사회성은 이기적인 유전자를 지닌 개체 사이의 동맹과 협력이 빚어낸 진화의 산물이라는 견해가 리처드 도킨스를 비롯해 여러 학자들이 오랫동안 해온 주장이다. 진화학자인 서울대 장대익 교수에 따르면 본능으로 똘똘 뭉친 개미나 벌의 사회성과 구분하여, 인간의 사회성은 각 개인의 진화된 인지 장치를 바탕으로 ‘집단적 지향성(collective intentionality)’을 보인다고 해서 ‘초사회성(ultrasociality)’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윌슨이 연구한 개미들처럼, 우리 인간은 초협력자들(super-cooperation)이다. 인간은 언제나 더 큰 공동체의 요구에 양보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기회가 생길 때마다 홀로 있음을 밀어낸다. 예컨대, 많은 사람들이 스마트폰에 묶여 있다.
휴대전화기 없이 한두 시간 산책을 나갈 때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뉴스를 놓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누락될지 모른다는 공포다. 그리고 스마트폰을 통한 소셜 그루밍의 성공이 우리 뇌의 도파민을 방출하고, 쾌락 보상 시스템을 활성화한다고 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의미심장하게도 우리의 디지털 욕구는 거의 전적으로 사회적인 쪽에만 집중되어 있다.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워터먼(Elisabeth Waterman)에 의하면, "인간의 두뇌 회로는 말 그대로 우리 사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타인들과 공유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어 있다는 거다. 그리고 더 많이 공유할수록 기분이 더 좋아진다는 거다. 우리의 정보가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되고, 그 반대 정보는 소수에게만 공유된다는 것을 알면 뇌 속 보상 시스템의 스위치가 켜진다는 거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최근 '플랫폼'이라는 새로운 선수가 등장했다. 플랫폼 회사는 그저 공장만 지어놓고, 노동은 사용자들을 불러 들여 시킨다. 수익은 플랫폼 회사가 차지하지만, 공유한다는 즐거움이 보상이 되게 하였다. 예컨대, 유튜브 사용자들은 동영상을 올리고 있다. 사용자들이 그 노동을 공짜로 해준다. 이 플랫폼에서 공유경제(sharing economy)라는 말도 나왔다. 에어앤비를 통해 모르는 사람의 아파트를 빌릴 수 있다. 동시에 '프레카리아트(precariat)'라는 새로운 계급도 출현했다. 이는 확실한 정체를 갖지 못하고 고용이 불안정한 상태에 놓인 계급을 말한다. '프레카리아트'라는 말은 '불안정한'이란 이탈리아어 프레카리오(precario)와 노동 계급을 뜻하는 독일어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의 합성어로, 영국 런런대 가이 스탠딩 교수가 퍼뜨렸다고 한다. 그는 프레카리아트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1) 꿈과 열정이 없다. (2) 내가 하는 일의 가치를 깨닫지 못한다. (3) 먹고 사는 문제로 평생 고통 받는다. 그 결과 플랫폼 경제에서 나사 노릇을 하고, 플랫폼 회사로부터 일거리를 받아서 일하는 노동자의 비중이 커질 거라고 본다. 그들은 익명이고, 건강보험 혜택과 은퇴 보장 및 그전 세대는 당연하게 누렸던 다른 혜택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동시화되거나, 사회적이고 빈틈없이 한 덩어리로 뭉쳐진 플랫폼 도시가 된다. 원래 우리가 도시에 온 이유가 처음에 익명이 되기 위해, 이목을 덜 받기 위해, 조직되지 않은 군중 속에서 홀로 지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타인들의 정보에 너무 많이 지배되지 않기 위해 우리 자신을 찾으러 나간 것이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홀로 있기가 쉽지 않다. 플랫폼 도시에서 우리가 허가도 받지 않고 이탈한다면 우리는 사라진 사람으로 간주될 것이다. 이젠 홀로 있음은 정말로 금기가 되었다.
그렇지만 금기란 깨어지라고 있는 거다. 우리는 홀로 있음을 연습하여야 한다. 그 방법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 드라이브를 간다.
- 잔디밭에 앉아 있는다.
- 스마트폰을 서랍에 집어 넣는다. 한번 휴대전화를 보기 시작하면 홀로 있음은 계속 미뤄진다.
'홀로 있음'은 하나의 자원이다. 모든 자원들처럼, 그것은 관리하지 않으면 사라진다. 그러나 그 자원을 계속 보유하고 있으면 혜택이 있다. 마치 지구상의 대양과 수풀을 그대로 두면 이익이 생기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의 가치를 알기 전에는 자신의 '홀로 있음'을 보호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우리가 외로움이라 부르는 실패한 '홀로 있음'과 대비되는 진정한 '홀로 있음'은 비옥한 영토이지만, 거기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힘들게 노력해야 한다. 그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고, 오늘은 여기서 멈춘다. 나에게 시가 있다면, 나는 혼자가 아니다. 오늘 시 제목처럼, "추억은 혼자 분주"하기 때문이다. 오늘 사진은 혼자 있으려고 가는 나의 채소밭 길에서 만난 꽃이다. 그 나무도 혼자 분주하였다.
추억은 혼자 분주하다/이기철
저녁이 되면 먼 들이 가까워진다
놀이 만지다 두고 간 산과 나무들을
내가 대신 만지면
추억이 종잇장 찢는 소리를 내며 달려온다
겹겹 기운 마음들을 어둠 속에 내려놓고
풀잎으로 얽은 초옥에 혼자 잠들면
발끝에 스미는 저녁의 체온이 따뜻하다
오랫동안 나는 보이는 것만 사랑했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것도 사랑해야 하리라
내 등뒤로 사라진 어제, 나 몰래 피었다 진 들꽃
한 번도 이름 불러보지 못한 사람의 이름
눈 속에 묻힌 씀바귀
겨울 들판에 남아 있는 철새들의 영혼
오래 만지다 둔 낫지 않은 병,
추억은 어제로의 망명이다
생을 벗어버린 벌레들이 고치 속으로 들어간다
너무 가벼워서 가지조차 흔들리지 않는 집
그렇게 생각하니 내 생이 아려온다
짓밟혀서도 다시 움을 밀어 올리는 풀잎
침묵의 들판 끝에서
추억은 혼자 분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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