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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어떻게 하면 홀로 있을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왜 홀로 있어야 하는가?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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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5월 2일)

이번 5월 동안에, 어떻게 하면 홀로 있을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왜 홀로 있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나는 찾아보려 한다. 외로움을 홀로 있음으로 바꿔 줄 기술을 배워 볼 생각이다. 우리는 홀로 있을 때도 혼자가 아니다. 즉 외로움이 삭제된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어떤 그물에 걸려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 한다. 우리가 홀로 있고 싶다고 해도, 사회 속의 무리들 로부터 허가도 받지 않고 이탈한다면, 우리는 사라진 사람으로 간주될 것이다. 우리는 붙잡아야 할 자잘한 기회들, 인맥을 통해 들어온 소소한 일거리 같은 것에 시달린다. 그러면서 우리는 풍요로웠던 내적 삶을 잃어버린다. 왜 그런 가 살펴 본다.

대규모 집단을 이루고 산다는 것은 모든 동물의 두뇌, 특히 신피질에 큰 부담을 주는 것이라 한다. 사실 영장류에게서 사회적 복잡성을 나타내는 표시는 모두 신피질의 크기와 관련되어 있다는 거다. 예를 들면 집단의 크기, 털 다듬을 때의 사소한 버릇들, 짝짓기 전략, 전략적 기만술, 사회적 놀이 등이 사회적 표시들이다. 신피질이 클수록 그 영장류는 더 사회적이다.

인간의 뇌는 그 진화 역사에 따라 신피질, 구피질, 뇌간의 3개 층으로 구분된다.
- 신피질은 '영장류의 뇌'로 불리며 가장 역사가 짧다. 뇌의 가장 바깥 부분을 이루는 대뇌피질로서 고차원적인 사고작용을 가능하게 한다.
- 구피질은 신피질 안쪽에 있는 층으로 대뇌 변연계 부분을 일컫는다. 구피질은 포유류 이상 진화된 동물에 형성돼 있으며 감정작용을 담당한다.
- 뇌간은 뇌 진화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부위로 파충류도 갖고 있다. 그래서 뇌간은 '파충류의 뇌' 또는 '원시 뇌'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러한 뇌의 3층 구조는 상호작용한다. 본능적 욕구를 담당하는 뇌간을 신피질과 구피질이 통제한다.  신피질의 지나친 통제는 생명력을 억압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신피질을 사용하는 현대인의 경우 뇌간의 에너지가 위축되기 쉽다. 거기서 스트레스가 나온다. 일반적으로 스트레스는 고민과 망상 같은 과도한 사고 작용, 분노나 집착 등 정리되지 않은 감정 혹은 외부 자극에 의한 불안증이나 두려움이 유발되는 경우이다. 그러므로 스트레스성 질환은 결국 신피질과 구피질의 지나친 통제와 작용이 외간 기능에 영향을 준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뇌간은 우직하게 맡은 임무를 이행할 뿐 신피질처럼 외부 정보에 갈등하거나 구피질처럼 감정에 영향받지 않는다. 뇌간의 최우선 순위는 생명력의 활성화이다.

이 뇌 과학을 알아야 신피질이 클수록 그 영장류는 사회적이라는 말이 이해가 된다. 영장류가 더 사회적일수록 큰 집단을 이루면서 폭력과 갈등으로 폭발하는 일 없이 그 사회를 유지할 수 있다. 이 사실을 입증하는 연구가 '사회적 두뇌' 이론이다. 이 것을 개발한 사람은 로빈 던바(Robin Dunbar)이다. 유인원의 신피질 크기가 그들 집단의 규모와 관련되어 있음을 그가 발견했다. 던바는 인간의 큰 두뇌가 도구 사용자가 되는 데 기여했겠지 만, 진정한 이득은 우리가 살아가는 공동체의 규모를 늘릴 수 있게 된 점이라고 주장한다. 같은 연배의 개체가 더 많다는 것은 더 안전하고 더 힘이 세고, 지식을 전해줄 기회가 더 많다는 뜻이다. 요약하자면 살아남을 기회가 더 많아진다는 거다. 그러다 보니, 영장류의 집단이 더 클수록 사회적인 의미에서 털 다듬기, 그러니까 보살핌, 친목 도모 등의 의미를 가지는 소셜 그루밍(Social grooming)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는 거다.

소셜 그루밍은 인간을 포함한 사회적 동물들이 서로의 몸이나 외모를 깨끗하게 하거나 유지하는 행위를 말한다. 여기서 그루밍은 주요 사회 활동이자 가까운 곳에 사는 동물들이 유대감을 형성하고 사회 구조와 가족 관계를 강화하여 동료 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수단이다. 요즈음에 사용되는 그루밍 족은 쇼설 미디어 상에서 특정 주제에 집중하고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며, 관련 정보를 공유하고 소통하는 집단을 지칭한다. 원래의 의미는 '털 다름기'이다.

그런데 우리는 던바의 법칙을 비켜가게 되었다. 우리는 서로의 털에서, 말하자면 몸의 이를 잡아주느라 그 많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도 자신이 속한 사회 집단을 성장시켰다. 그 이유는 약 10만년 전쯤 언어가 출현하여 게임의 판을 바꾸어 놓은 데서 찾을 수 있다. 언어를 쓰지 못하는 영장류는 친구나 적의 털을 다듬어주려면 직접 손을 써야 한다. 그러나 말할 줄 아는 영장류는 자신이 속한 사회적 집단의 여러 구성원들을 동시에 '다듬어줄' 줄 수 있다. 이것은 강력한 다원화 활동이 된다.
- 산책할 때나 열매를 따는 동안 친목을 도모할 수 있다. 이것은 위력이 강한 멀티태스킹(multitasking, 한 번에 2가지 이상의 일을 동시에 처리하는 것으로 '다중작업'이러고도 함)이다.
- 언어가 생긴 뒤 털 다듬기는 효율이 매우 높아지고 입소문의 덕을 볼 수 있게 되었다.
- 언어 덕분에 복잡한 생각을 이 마음에서 저 마음으로 내보내고, 사냥과 채집 활동, 나아가서는 농사지을 때 협동할 수 있게 되었다.
- 언어 덕분에 우리는 더 큰 사회 집단의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는 소셜 그루밍을 확장하고 집중 조명할 새 방법을 끊임없이 만들었다. 이로써 우리는 잠재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윌리엄 깁슨(Wiliiam Gibson)이 말했듯이, "미래는 이미 여기에 있다. 단지 고르게 분배되지 않았을 뿐이다." 인터넷이 우리의 외로움을 삭제하였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 싶다는 것이 우리의 행동 동기 가운데 하나다. 우리가 서로 털을 다듬어주기 위해 직접 만나는 것이 아니라, 소셜미디어를 통해 스크린에서 만난다면, 가기 소개를 더 전략적으로 할 수 있다. 예컨대, 페이스북 사용자 중에 사회적 불안, 특히 사회적 인정 욕구에 목마른 사람들의 시용 빈도가 더 크다는 거다.

대니얼 부어스턴의 <<이미지와 환상>>에서 통찰한 대로, 옛날에는 위대하면 유명해졌지만, 지금은 유명하면 위대해진다고 믿는 시대이다. 예능의 시대, 가벼움의 시대이다. 대중들은 지적, 도덕적 권위 대신 예능만 기대한다. 물론 각계각층의 전문성을 대표하는 엘리트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중 일부는 유튜브나 SNS에서 유명세를 얻기도 한다. 과거와 달라진 건 그들을 소비하는 대중이 더 이상 그들에게서 지적, 도덕적 권위를 기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적, 도덕적 권위보다는 (거대 미디어 플랫폼의 성장 속에서) 예능적 요소가 주목을 끄는 시대가 됐다. 대상이 아무리 엘리트여도 재밌는 스토리텔링이나 예능적 요소를 기대한다. 그리고 그런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엘리트는 대중의 눈에 그저 비루한 노잼들이다. 그러다 보니 위선보다는 차라리 흥미로운 위악이 더 낫다는 여론이 다수를 점한 시대의 풍경이다. 그런 면에서 현 대통령의 당선과 엘리트의 위상 추락은 상호 연동된 현상일 수 있다. 이는 전적으로 인문 정신의 부재 현상이다.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대중들에게 인문 정신을 외치는 인문 운동가인 나 자신도 '노잼'의 엘리트일 뿐이 아닌가 반성한다.

인문정신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하는 일이다. 내 생활이나 생각, 판단이 다른 사람의 방식이나 환경에 좌우된다면 인문정신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다.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비이 높을 수록 그 삶은 인문정신에 가까운 삶을 사는 것이다. 내 삶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내 자신이 만드는 것이다. 인문정신은 나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좋은 비교가 하나 있는데 바로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을 비교하는 거이다. 삶은 성공의 이야기가 아니라, 성장의 이야기이다. 자신만의 활동으로 세상과 접촉하려는 용기, 아니 어떤 권위에 의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만의 힘으로 세계와 직접 접촉하려는 용기를 갖고, 내용에 대한 집착을 끊고, 아무 내용도 없는 활동으로만 덤비는 것이 '동사'로서의 인문정신이다. 꽃이 피는 정신이다.

꽃피는 말/박노해

우리 시대에
가장 암울한 말이 있다면

“남 하는 대로”
“나 하나쯤이야”
“세상이 그런데”

우리 시대에
남은 희망의 말이 있다면

“나 하나만이라도”
“내가 있음으로”
“내가 먼저”

많은 사람들이 소금과 설탕과 지방이 우리 몸에 너무 많이 쌓이지 않도록 건강식 다이어트를 시작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는 것과 똑같이, 소셜 그루밍 집착 증세가 너무 심해지다 보면 '사회적 패스트푸드'에 해당하는 것을 끊어야 할 수도 있다.

'사회적 패스트푸드'라는 말을 보고, 나는 곧바로 우리 사회가 예능만능주의로 빠지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보았다. 예능 대신 예술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예능은 당장의 시각적 즐거움을 만들어 내는 일이다. 예술은 추상적이지만 한차원 높은 수준에서 전율과 감동을 일으키는 일이다. 만화만, TV 드라에만 관심을 두면, 예술을 알 수 없다. 세익스피어를 읽어야 한다. 예능과 예술은 다르다. 예술의 핵심은 미학적 정서와 철학적 사유이다. 즉 정서적 미학과 철학적 가치라고 다르게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감동과 변화이다. 가짜와 진짜는 여기서 판가름 난다.

예능도 중요하다. 그러나 문제는 예능에만 빠진다는 것이다. 예능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 예술이다. 예술은 생각하며 즐겨야 즐거움이 온다. 그리고 깊은 생각을 하며 예능을 보면 재미가 없다. 예능을 즐기는 이유는 생각하는 수고를 하기 싫어서 이다. 생각하는 데는 힘이 들기 때문이다. 누군가 예능에만 빠진다면, 그는 분명히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다. 생각하는 수고를 많이 하다 보면 쉬고 싶을 때가 있다. 예능은 그럴 때 즐겨도 충분하다. 큰 폭과 높은 높이가 없이 소확행에만 빠지면 사람이 작아져 버리듯이, 예술 없이 예능에만 빠져도 사람은 쉽게 작아진다.

인간의 몰입은 대단히 희소한 자원이다. 정치인들과 기업들은 끊임없이 우리의 주의를 분산시키려 한다.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으면서, 우리의 주의 집중을 분산시킨다. 대가를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뉴스의 질이 낮다는 것을 그리고 가짜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모른다. 또한 그 때 그 뉴스를 '공짜로' 무언가를 얻는 경우, 우리 자신은 상품이 된다. 그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소비자가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되, 소비자의 주의를 악용하지 않는 고품질의 정보나 문화이다. 공짜라는 이유로 자신의 주의를 포기하는 대신 낮은 품질의 정보를 얻는 것은 정신나간 짓이다. 문화 예술도 마찬가지이다. 그래 자꾸 우리는 예술보다 예능에 더 잘 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