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사람은 참 다양하다. 특히 어떤 가치를 두고 함께 일을 하면서, 반응하는 태도가 정말 다양하다. 나같이 않다. 나는 일단 긍정의 힘을 믿고, 행동한다. 그런데 말은 하지만 행동하지 않는 태도, 행동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태도, 생각이 없어 남의 입장을 배려하지 않는 태도가 위험한 무능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무능은 개인의 무능으로 끈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 타인의 삶까지 침몰 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속상한 마음에 일찍 일어나 잡은 책이 고 채현국 선생의 대담 집인 <쓴맛이 사는 맛: 시대의 어른 채현국, 삶이 깊어지는 이야기>를 읽었다. 고인이 이사장으로 계시던 개운중학교 정문 오른쪽에 "지성(至誠)"이라 새긴 돌 비문이 있다고 한다. 바로 영화 <역린>으로 유명해진 <중용> 23장이 소환되었다.
基次致曲,曲能有誠(기차치곡 곡능유성)
誠則形, 形則著, 著則明, 明則動, 動則變, 變則化(성즉형, 형즉저, 저즉명, 명즉동, 동즉변, 변즉화)
有天下至誠能化(유천하지성능화)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내면적으로 형성되어 겉으로 배어 나오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 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답은 '지성(至誠)'이다. 그러지 못했다면, 내가 직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지 못해 일어난 일이다. 영화 <역린> 장면이 생생하다. 여기에 나오는 정조의 삶이 내가 지향하는 것이다. 정조의 삶은 배움, 곧 읽기와 쓰기였다는 것이다. 흔히 권력은 소유와 지배, 나아가 쾌락의 증식일 뿐, 거기에서 자유와 충만함을 누리기 란 가능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이 둘을 가늠하면서 헷갈려 한다. 물론 선택은 언제나 소유와 쾌락 쪽으로 기울고, 그러면서 삶이 힘들고 공허하다고 한탄한다. 헷갈린다 기보다 진실을 알고 싶지 않다는 게 더 정확한 것인지 모른다. 고미숙이 인용하고 있는 안대희가 쓴 <정조치세어록>의 내용을 재 인용한다.
"하늘 아래 책을 읽고 이치를 연구하는 것만큼 아름답고 고귀한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 첫째로 경전을 연구하고 옛날의 진리를 배워서 성인들이 펼쳐 놓은 깊고도 미묘한 비밀을 들여다본다. 둘째로 널리 인용하고 밝게 분별하여 천 년의 긴 세월 동안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시원스레 해결한다. 셋째로 호방하고 힘찬 문장 솜씨로 지혜롭고 빼어난 글을 써내어 작가들의 동산에 거닐고 조화의 오묘한 비밀을 캐낸다. (…) 이것 이야말로 우주 사이의 세 가지 통쾌한 일이다."
나도, 정조처럼, 와인을 팔아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하니, 인문운동가로 다음과 세 가지를 삶의 즐거움을 삼는다.
(1) 경전 및 고전 뿐만 아니라 시대적으로 필요한 다양한 책들을 읽으며 우주와 그 사이에 있는 인간들의 비밀을 들여다보며 즐거워한다.
(2) 그러면서 문제의 대안을 찾아 해결하는 활동을 작은 범위에서부터 게을리 하지 않는다.
(3) 그 내용들을 글로 쓰며, 많은 사람들과 공유한다.
짧게 말해, 정조처럼, 배우고, 읽고, 사유하며, 쓰는 일을 하고 싶다. 산다는 건, 천문과 지리 그리고 인문의 삼중주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삼중주의 리듬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세 질문도 궁극적으로 이 배치 안에 있다. 그러던 것이 지금에 와서는 인간이 전지, 하늘과 땅으로부터 분리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하늘의 별을 보지 않고, 땅을 보는 안목도 잃었다. 땅이 투자대상이 되었다. 그러는 사이 인간이 천지보다 더 높은 존재로 올라섰다. 그러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에 공격을 당하며 팬데믹으로 전 세계가 몸살을 앓는 중이다. 이제 앎은 자연지의 광대한 지평에서 벗어나 오직 인간을 중심으로 삼는 문명지로 축소되었다. 천지인을 아우르던 그 통찰력은 한낱 신화가 되어 버렸다. 그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어제와 오늘 신록의 계절이 비와 구름으로 시작되고, 게다가 춥다. 어린 나물들이 불쌍하다. 다들 추워 떠는 것 같다. 이쯤애서 그만 마음을 달래고, 시를 한 편 읽어 본다. 그리고 <쓴맛이 사는 맛>에서 얻은 위로와 삶의 지혜를 몇 가지 공유한다. 비바람이 쳐도, "아직 꽃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아카시아, 장미여! 매년 봄이면 한 번은 공유하는 시이다.
그대 앞에 봄이 있다/김종해
우리 살아가는 일 속에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두어야 한다
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 같아서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은
높은 파도를 타지 않고
낮게 낮게 밀물져야 한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 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시대의 어른 채현국의 삶이 깊어지는 이야기인 <쓴맛이 사는 맛>에서 얻은 몇 가지 통찰을 공유한다.
(1) 시시하게 살면 행복해진다. 선생이 말하는 '시시'는?총체적으로 한가로운 것이다. 비록 몸은 부지런해도 잠재의식이 한가롭다면 시시할 수 있다. 그러려면 행동이 정말 단순하고 소박해야 한다. 그러니까 시시하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한가로우면 행복해진다. 그러면서 일상을 소중하게 다룬다. "적게 쓰고 가난하게 살고 발전이란 소리에 속지 말고, 훨씬 소박하게 살라."
(2) 삶이란 끊임없이 묻고, 배우고, 깨우치는 과정이다. 처음엔 누구도 삶을 알 수 없다. (…) 삶이란 삶을 사랑할 줄 알게 되는 과정이다." 삶은 살 가지가 있고 끈임없이 배우고 피 터지게 싸우는 과정이라는 말이다.
(3) 선생의 인생 1순위는 '살아 있음'이다. 내가 살이 존재하고 있음이다. 그 무엇보다 이에 앞서는 것이 없다. 그 다음은 내가 어떻게 살아 있느냐 이다. 사람이 목표를 정해 긍정적으로 여기서 살아갈 때 그 존재 가치가 있는 법이다. 값진 인생은 최고가 되는 게 아니라 꿈을 이루는 것이다. 그것이 '살아 있음'의 증거이다. 인생의 우선 순위는 높이가 아니라, 순서이다. 제1순위가 정해지면 나머지는 뒤따라 절로 정해지는 법이다.
(4) 자유로운 삶을 살고자 한다면? 우리는 기성의 관습과 제도, 정치사회적 강요, 물질적 궁핍, 자아-비 자아의 갈등에서 벗어나 봄날의 새들처럼 창공을 마음껏 날고 싶어한다. 그러나 현실은 말처럼 쉽지 않다. "모험심을 가져야 한다. 기존의 틀 속에서 갇혀서는 자유를 누릴 수 없다. (…) 제멋대로 살면 살 수 있을까? 이런 의문에 대한 공포심부터 없애야 한다. 다만 목표는 함께 잘 사는 것이어야 한다." 자유로운 삶을 살려면 기득권 상실에 대한 공포심부터 날려버려야 한다. 기득권과 안락함은 자유와 양립할 수 없다. "덜 유명해야 한다, 유명하면 자유롭게 살 수 없다."
(5) 공부는 왜 하는가? 오늘날의 공부는 주객이 전도되었다. 수양이나 학문 연구보다 취업이나 생계의 수단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내가 썩는다. 공부를 하면 덜 썩는다. (…) 호기심을 갖고 활발하게 공부하면 열정이 생긴다." 선생은 특히 아첨하는 공부를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대로 내가 공부한 결과가 세상을 위해 쓰인다면 그보다 더 귀한 경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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