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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오늘이 3월 말이고, 내일부터는 4월이 시작한다.

3230.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3월 31일)

1.
오늘이 3월 말이고, 내일부터는 4월이 시작한다. 그런데 아직도 어둡고 춥다. 냉기가 이 땅을 가득 채우고 있다. 지난해 12월 이후 습관적으로 뉴스에 눈길이 간다. 뭔가 새로운 소식이 있지 않을까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탄식과 울분에 찬 언어가 난무한다. 진영을 막론하고 희망 섞인 예측을 쏟아내지만 어느 것도 확실한 것은 없다. 날 선 감정들이 부딪치며 내는 굉음에 귀가 먹먹하다. 광장을 지날 때마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들려오는 날 선 언어에 저절로 낯이 찌푸려진다. 증오와 선동, 냉소와 저주의 언어를 들을 때마다 채찍에 맞은 듯 가슴이 아리다.

게다가 지난 주말에는 날씨가 영하로 내려가는 바람에 활짝 핀 목련이 동상을 입고 색이 변했다. 오늘 공유하는 사진처럼 말이다. 진짜 꽃샘추위를 봤다. 꽃샘추위는 이른 봄 철의 날씨가 꽃이 피는 것을 시샘하듯 일시적으로 갑자기 춥다고 해서 하는 말이다. 그런데 올해는 핀 꽃을 추위가 공격했다. 모든 게 일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시인과 촌장이 불렀다는 노래의 가사인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이 그립다. 그렇지만 어제 그 꽃들을 보며, 나는 혼잣말을 이렇게 되뇌였다. "네가 아무리 추워봐라. 오던 봄 돌아가나. 네가 아무리 추워 봐라. 옷 사 입나. 술 사 먹지." 언젠가 허름한 술 집에서 읽었던 글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2.
그 뿐이 아니다. 꽃이 피는 순서들이 뒤죽박죽이다. 그리고 봄꽃들이 그 순서를 잊었다. 기후변화가 아니라, 기후위기라며 봄에 꽃이 피는 순서가 없이 동시에 피면서 화란춘성(花爛春盛, 꽃이 만발한 한창 때의 봄), 만화방창(萬化方暢, 따뜻한 봄날에 온갖 생물이 나서 자라 흐드러짐)이다.  '춘화 현상(春化現象)'이라는 말이 있다. 추운 겨울을 넘겨야 하는 식물은 그에 알맞은 온도를 유지 해주어야 봄에 아름다운 꽃이 핀다. 그런 현상을 '춘화 현상'이라 부른다. 호주 시드니에 사는 교민이 고국을 다녀가는 길에 개나리 가지를 꺾어 다가 자기 집 앞마당에 옮겨 심었다. 이듬해 봄이 되었다. 맑은 공기와 좋은 햇볕 덕에 가지와 잎은 한국에서 보다 무성했지만, 꽃은 피지 않았다. 첫해라 그런 가 보다 여겼지만 2년째에도, 3년째에도 꽃은 피지 않았다. 그리고 비로소 알게 되었다. 한국처럼 혹한의 겨울이 없는 호주에서는 개나리꽃이 아예 피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온을 거쳐야만 꽃이 피는 것은 전문용어로 '춘화 현상'이라 하는데 튤립, 히아신스, 백합, 라일락, 철쭉, 진달래 등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인생은 마치 춘화현상과 같다. 눈부신 인생의 꽃들은 혹한을 거친 뒤 에야 피는 법이다. 그런 가 하면 봄에 파종하는 봄보리에 비해 가을에 파종하여 겨울을 나는 가을보리의 수확이 훨씬 더 많을 뿐만 아니라 맛도 좋다. 인생의 열매는 마치 가을보리와 같아, 겨울을 거치면서 더욱 풍성하고 견실해진다. 마찬가지로 고난을 많이 헤쳐 나온 사람일수록 강인함과 향기로운 맛이 더욱 깊은 것이다. 오늘의 현실이 우리들이 짊어지고 겪어야 할 '춘화현상'이라면 감내해야 해야 한다.

3.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시 대신에 언젠가 노트에 적어 두었던 글을 공유한다. 화장실에 붙은 교훈처럼 진부한 것 같지만, 한 번쯤 우리 모두를 되돌아보게 하는 글이다. 작자 미상이다. 

모든 것이 나로부터 시작이다. 

어릴 때는 나보다 중요한 사람이 없고, 
나이 들면 나만큼 대단한 사람이 없고, 
늙고 나면 나보다 더 못한 사람이 없습니다. 

돈에 맞춰 일하면 직업이고, 
돈을 넘어 일하면 소명입니다. 

직업으로 일하면 월급을 받고, 
소명으로 일하면 선물을 받습니다. 

칭찬에 익숙하면 비난에 마음이 흔들리고, 
대접에 익숙하면 푸대접에 마음이 상합니다. 

문제는 익숙해져서 길들여진 내 마음입니다. 

집은 좁아도 같이 살 수 있지만, 
사람 속이 좁으면 같이 못 삽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에 도전하지 않으면, 
내 힘으로 갈 수 없는 곳에 이를 수 없습니다. 

사실 나를 넘어서야 이곳을 떠나고 나를 이겨내야 그곳에 이릅니다. 
갈 만큼 갔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얼마나 더 갈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참을 만큼 참았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얼마나 더 참을 수 있는지는 누구나 모릅니다. 

지옥 만드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 미워하면 됩니다. 

천국 만드는 방법도 간단합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 사랑하면 됩니다. 

모든 것이 다 가까이에서 시작됩니다. 

상처를 받을 것인지 말 것인지 내가 결정합니다. 
상처를 키울 것인지 말 것인지 내가 결정합니다. 
상처를 지킬 것인지 말 것인지 내가 결정합니다. 

그 사람 행동은 어쩔 수 없지만 반응은 언제나 내 몫입니다. 

산고를 겪어야 생명이 태어나고, 
꽃샘추위를 겪어야 봄이 오고, 어둠이 지나야 새벽이 옵니다. 

거칠게 말할수록 거칠어 지고, 
음란하게 말할수록 음란해 지고, 
사납게 말할수록 사나워 집니다. 

결국 모든 것이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일 겁니다.


3.
그런데, 조금만 눈을 돌리면, 거짓의 탈을 쓴 후안무치들이 판을 친다. 자신의 잘못을 숨기기 위해, '돈으로 매수한 듯'한 '기레기'들의 거짓 뉴스가, 그리고 자극적인 뉴스로 장사치처럼 자신의 기사를 팔아먹기에 혈안이 된 거지 같은 기사와 한 자리 혹시 얻을까 흑심을 품은 일부 어용 지식인들의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칼럼 등 역겹다. 그냥 세상에 모든 것은 극점에 이르면 반드시 돌아간다는 "극즉반(極即反)"만 믿는다. 정점에 도달하면 내려올 일 밖에 남지 않고, 반대로 최저점으로 추락하면 올라갈 일만 남게 된다. "물극필반(物極必反)이란 말도 있다. 어떤 일이든 극에 달해야 반전이 생긴다는 거다. 이런 생각을 하며, 그냥 차이로, 다름으로 받아들이기 난 쉽지 않다. 난 세상에 정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거짓은 유통기한이 있다. 정점에 달하면 스스로 드러난다고 믿지만,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그래 나는 어두움은 빛을 이기지 못하듯이, 거짓은 진실을 이기지 못한다고 믿고 기다릴 뿐이다.

4.
답답한 마음에 다시 <<도덕경>>을 펼친다. 제15장에 "孰能濁以靜之徐淸(숙능탁이정지서청)"이란 말이 나온다. 이 말은 '누가 능히 자기를 혼탁한 물로 만들어, 그 더러움을 가라앉히고 물을 맑게 할 수 있겠는가?"란 뜻이다. 나는 이 질문이 인문 운동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다. 누가 그걸 할 수 있겠는가? 자기가 스스로 해야지 누가 시킨다고 되겠는가?

도올 김용옥 교수에 의하면, "깨끗하기는 쉽다. 그러나 진실로 나를 더럽히면서까지 그 주변의 모든 것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지고의 공력을 요구하는 것"이라 보았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조선 왕조의 정치는 청류(淸流)의 오만으로 포용적인 가치기준을 세우지 못했고, 탁류(濁流)의 타락은 새로운 질서를 태동시키지 못했다." 오늘의 정치 현실에도 통찰을 주는 부분이다.

유가(儒家)적 사람들과는 달리 도가(道家)에서는 인의(仁義)를 대도(大道)가 사라진 말엽의 촌스러운 가치라 보고, 인(仁)을 끊어 버리고, 의(義)를 내다 버리고, 오직 자연의 도를 따라 살라고 권유했다. 유가에서는 우환의식을 가슴에 새기고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자세로 의(義)를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비겁한 자라고 질책한다.  반면 도가는 대환(大患)을 귀하게 여기기를 내 몸을 귀하게 여기듯 하라고 가르치며, 또 나의 생명의 지속과 건강을 모든 가치 규범에 우선 순위에 둘 것을 가르친다. 노자가 말하는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은 부드럽고, 약하고, 소극적이고, 퇴행적이고, 때가 많이 낀 것처럼 보인다. 반면 유교적 가치를 구현하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국가권력이나 지배계급에게 환영 받는 인간들이다. 그러나 노자의 사람들은 국가 권력에 봉사할 생각을 하지 않으며, 지배 계급의 이익을 도모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근원적으로 문명의 진보에 기여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러다 보니, 유교적 가치관에 젖은 사람들의 눈에 노자적 인간들은 소극적이고 퇴행적이고, 야비하고, 겁약하고, 우아함을 결여한 잡초처럼 보인다. 그러나 노자적 인간은 국가나 도덕 규범이 사라지는 곳으로부터 비로소 진정한 인간의 모습이 피어난다고 생각했다.

노자적 인간들은 문명이 인간의 삶의 가치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 그것 이야말로 문명이나 문화의 가치를 결정해야 옳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겁쟁이들처럼 겁약한 것처럼 보이지만 참으로 겁약한 삶에 철저하다는 것은 최상의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며, 유약(柔弱)이야말로 강강(剛强)보다 훨씬 더 강인한 기세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을 노자적 인간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노자적 인간들은 인간이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 인생의 행복이나 가치가 무엇인지에 관해, 유교는 물론 서양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그림을 그린다. 잘 알다시피, 서양의 유화는 캔버스를 한 치의 여백도 없이 칭한다. 그러나 우리의 수묵화는 아무 것도 없는 허(허)한 여백 투성이다. "노자적 인간관은 현실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들, 정치, 경제적 세계로 부터 탈락된 사람들, 우월한 인간 그룹에 끼지 못한 열패자들, 지배자가 될 수 없는 피지배자들에게 안위와 동경의 대상이 되어 왔으며, 역사의 근원적 퇴락을 막는 건강한 주춧돌 역할을 하여 왔다" 도올은 강조하였다.

"孰能濁以靜之徐淸(숙능탁이정지서청): 누가 능히 자기를 혼탁한 물로 만들어, 그 더러움을 가라앉히고 물을 맑게 할 수 있겠는가?" 할 수 없지만, 그 탁류에 자신도 몸을 담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혁명을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우리의 현실을 이해하게 해주는 깊은 통찰이다. 남 탓으로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삼고, 혐오와 분노에만 의지하느라 관용과 용서와 화해와 협력은 하지 않고, 공동체에 아귀다툼과 삿대질만 하는 우리는 반성해야 한다. 진흙 같은 현실에 뛰어 들어, '도'를 실천해야 한다. 

5.
그럼 '도'란 무엇인가? <<도덕경>>은 이렇게 시작한다. '도'를 도라고 하면 불변의 '도'가 아니다( 道可道非常道, 도가도비상도). 노자의 '도'는 자연(自然) 즉 '스스로 그러함'이다. 스스로 그러함을 따르는 길이 우리가 살아 나가야 할 길이다. 그게 자유와 행복의 길이다. '스스로 그러함'의 '도'는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이는 언어에 대한 불신이 내포되어 있다. 언어는 비자연이고, 유위(有爲)이다. 언어는 나누고 가르는 분별을 토대로 성립하는 것으로, 분별을 실재인 양 착각하게 하여 인간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이다. 그러나 분별은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인식의 가상적 장치일 뿐이다. 만물을 낳고, 키우고, 거둬들이는 것은 '스스로 그러함'이다. 그러한 '도'를 알지 못하면서 무어라 규정하지 않는 것은 겸손한 태도이다. 모든 존재는 스스로 그러할 뿐, 좋고 나쁨이 없다. 그런데 인간의 분별은 모든 것을 좋고 나쁨으로 나누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서 좋은 것은 가까이 하려고 하고, 나쁜 것은 멀리 하려 하나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늘 얽매이고 다투고 일희일비의 감정 격랑에 휩쓸리게 되는 것이다. 이는 불행과 부자유의 근원으로 반드시 비워야 할 생각이다. 분별을 비우는 것이 자유롭고 평온해지는 길이다. 더 나아가 인간의 분별은 이상적인 자아를 그려 놓고, 열등감에 빠지게 한다. 그래서 화장, 성향과 패션 등을 통해 자신을 포장하고, 가면을 쓰며, 위선적인 언행으로 자신을 숨기는 것이다. 그런 열등감에서 벗어나는 길은 '스스로 그러함'을 받아들이고 밝게 사는 것이다.

모든 것이 변하는 것이 '스스로 그러함'이다. 생물은 생로병사하고, 사물은 성주괴멸(成住壞滅) 한다. 삼라만상은 '생겨나서(成), 머물러 존재하다가(住), 명이 다하면 허물어져(壞), 없어져 버린다(滅)'는 뜻이다. "이 세상 만물은 성주괴멸하는데, 모든 것이 다 그 운명에 의해서 그렇다. 만들어진 모든 그릇이 언젠가는 깨어질 운명을 타고 나듯이 인간도 태어나 살다가 죽는 것이 그러하다."(탄허스님) 변화가 자연인데, 불변을 구하는 것은 집착일 뿐이다. 변화를 있는 그대로 편견 없이 받아들이고, 순리를 따라 밝게 대처하는 것이 생로병사의 고통을 줄이고, 사물의 진리를 깨닫는 길이다.

자연의 자식인 인간도 생로병사 한다. 그러나 인간은 집착 때문에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예컨대, 늙지 않으려고 발버둥쳐 추하게 늙고, 병을 싫어하면서도 병을 부르는 짓만 하고, 죽지 않으려 오히려 명을 재촉하는 짓을 한다. 모든 존재는 유한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생로병사와 성주괴멸이 있기에 자연이 유지되고,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다. 예컨대, 꽃이 찬란한 것은 늙지 않기 때문이다. 필 때 다 써버리기 때문이다. 꽃의 피 속에는 주름과 장수의 유전자가 없고, 말과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 눈부신 것들이 불러일으키는 찬란한 착란이다. "나의 노년은 피어나는 꽃입니다. 몸은 이지러지고 있지만 마음은 차오르고 있습니다." 빅토르 위고의 문장이다. 늘, 지금을 탕진하는 것들은 황홀한 향기를 내뿜는다. 태양이 저물 때도 황홀한 이유다.

인간 또한 유한하기에 아름답게 꽃 피우고, 후세에게 자리를 내줘야 하는 것이다. 무한을 살 것처럼 살지 말고, 유한함을 받아 들이고 지금을 즐겁게 사는 것이 좋은 삶이다. 모든 인생 길에는 정답이 없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경계 안에서 살아간다. 저 경계 너머는 늘 비난의 대상이거나 찬양의 대상이 된다. 이곳과 저곳이 서로 다른 것뿐이고, 비교하며 우열을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경계를 허물어야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세상과 방법이 존재한다. 세상에 옳고 그른 것은 없다. 길고 짧은 것이 상대적인 비교이고, 있고 없음은 보는 시점의 차이일 뿐이다. 노자는 그 경계를 허물 때 '도(道)'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여기 '도'는 길(way)이다. 길은 목적지로 가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 목적지가 진리면 사람마다 각자 자신이 주장하는 진리의 길이 있다. 그래서 자신의 길이 맞다고 주장하며 다른 사람이 말하는 길을 부정한다. 그래서 노자는 길이 한 가지로 정의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 것이다. 진리의 목적지로 가는 길은 한 가지만 있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이 알고 있고, 경험한 것만 맞다고 주장한다. 이런 식으로 자기가 가보고, 아는 길만 옳은 길이라고 주장하면 이미 길의 보편성에서 멀어지게 된다. 따라서 <<도덕경>>의 '도'는 "멀티-웨이(multi-way)"(박재희)이다. '도'를 어느 특정한 '도'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편협한 생각에 갇혀 버린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도'라는 것은 인간의 가치나 편협된 생각에 갇히는 순간 이미 '도'가 아니다. 그래 <<도덕경>>의 시작이 "네가 알고 있는 방법만 옳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완벽한 도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로 되어 있다. 유명한 구절이다.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다. "도는 특정한 도라고 말하는 순간 온전한 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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