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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일차적으로 산불 피해의 원인은 소나무 위주의 침엽수림이다.

3206.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3월 27일)

경북 의성에서 시작해 안동, 청송 등으로 번진 초대형 산불의 피해가 막심하다. 소중한 목숨들이 화마에 희생됐고, 유서 깊은 국가문화유산과 생활 터전이 험한 불길에 새까맣게 타 버렸다. 영상으로 보는 것조차 숨이 턱 막힐 정도인데 피해 현장 주민들은 얼마나 두렵고 기가 막힐까. 해마다 발생하는 산불이지만 갈수록 규모가 커지고 횟수도 잦아지는 추세다. 산불에 대한 인문 운동가의 시선을 공유한다.

1.
일차적으로 산불 피해의 원인은 소나무 위주의 침엽수림이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소나무가 활엽수에 비교해 2,4배 더 오래 타고, 1,4배 더 뜨겁게 탄다고 지적한다. 침엽수림에 산불이 날 경우 대형산불로 번질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에 내화성을 지닌 활엽수 등의 수종을 주임으로 한 조림사업이 필요하다. 산불은 예방이 최선이다. 산림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산들이 그동안의 강력한 식목 정책으로 이제 어느 정도 푸르러진 만큼 앞으로는 간벌 등으로 산불과 산사태 예방 등 재난재해를 막고, 임업인들의 수익을 증대 시킬 수 있는 산림자원 고도화 정책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왔기 때문이다. 산불을 막으려면, 여러 대책이 필요하다.

제일 먼저, 비교적 불에 잘 타지 않아 산불 확산을 차단하는 내화(耐火)수림대의 구축이 요구된다. 우리 산림 중 40%가 소나무와 잣나무 등 침엽수림인데 침엽수에는 송진 등 기름 성분을 포함하고 있어 산불 발생 시 불쏘시개 역할을 하게 된다. 이와 달리 물푸레나무, 떡갈나무, 굴참나무, 느티나무, 은행나무 등은 나뭇잎에 수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 대표적인 '내화 수목'으로 불린다.

소나무를 보호하고, 또 소나무에 기생하는 송이버섯을 더 많이 채취하기 위해 옆의 활엽수를 베었는데 이것이 산불 피해를 크게 한 원인이 되었다. 활엽수 잎은 수분을 머금고 있어 산불이 나면 자연스럽게 소방 역할을 한다. 이런 활엽수를 베었으니 자연이 담당하는 소방 기능을 인간 스스로 없앴던 것이다. 게다가 활엽수가 잘려 나간 곳은 불의 통로가 돼 불이 번지는 데 한몫 했다. 자연의 이치를 외면한 인간 행동이 이런 예기치 않은 결과를 초래한 거다.

2.
산불이 급작스레 늘어난 이유는 기후변화 때문이기도 하다. 예년보다 봄철 기온이 부쩍 오르고, 건조한 날씨가 오래 지속하니 산불이 나기 쉬운 조건이 갖춰져서 이다. 그렇지만 원인의 가장 큰 몫을 기후변화가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크게 의미가 없다. 기후변화라는 장기적 흐름을 단기간의 예방 정책만으론 바꿀 순 없어서 이다. 그러니 원인 비중은 적어도 쉽게 바꿀 수 있는 원인을 찾는 게 우선인데, 그게 바로 소나무다. 우리나라 삼림에는 소나무 비중이 유독 높다. 최근 <산림 임업 통계>에 따르면 전체 삼림 면적의 36.6%를 소나무가 차지하고 있는데, 최근 대형 산불이 자주 발생하고 있는 경북 지역은 소나무 비중이 49.6%에 달한다. 소나무라는 종 자체가 불에 취약하다. 소나무는 불이 붙기 쉬운 송진(松津)을 분비하는 것에 더해, 사시사철 잎이 푸른 상록 침엽수다. 선비들에게는 이것이 절개의 상징으로 보였 겠으나, 화마(火魔) 눈엔 소나무 잎도 겨우내 바싹 마른 좋은 산불 연료일 뿐이다.

산불이 자주 발생하는 지역은 생물 다양성이 부족하다. 나무는 물론 작은 동물과 곤충도 타 죽은 탓에 다시 숲으로 복귀하는 데 최소 30년이 걸린다. 그러니 숲을 살리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웃자란 소나무를 베어내야만 한다. 소나무가 무가치 해졌으니 마구 베어내자는 게 아니다. 과도하게 빽빽하게 붙어 자라는 소나무는 솎아 내기를 하고, 상대적으로 산불에 강한 활엽수를 섞어 심어 산불이 커지는 걸 막자는 뜻이다. 벌목이 주는 정서적 거부감은 이해하지만, 산불 피해에 노출된 자연과 인간 모두를 지키기 위한 최선을 고민할 때다.

3.
산불 피해의 원인을 동아시아 전통적 학문관을 소홀히 한 데서도 찾는다. 동아시아 학문관은 자연의 이치인 '천도(天道)'에 따라 사람이 살아가는 '인도(人道)'와 사회가 나아가는 '치도(治道)'를 제시한다. '인도'와 '치'도는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아야 한다. 자연의 이치를 소중히 여기는 동아시아 학문은 서구 학문의 엄격한 과학성과 비교된다. 그러니까 '인도'에 해당하는 서구 인문과학과 '치도'에 해당하는 서구 사회과학은 물론이고, '천도'에 해당하는 서구 자연과학조차 자연의 이치를 소홀히 하는 경우가 있다. 

마찬가지로 소나무 옆의 활엽수를 제거한 것도 자연의 이치를 소홀히 한 일에 속한다. 전문가들은 나름 ‘합리적’ 판단이라고 여겨서 활엽수를 제거했는지 모르지만, 산불이 나면서 이런 판단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소나무가 사람의 사랑을 아무리 많이 받아도 활엽수와 동거하도록 놔두는 게 동아시아 학문이 말하는 지혜이다. 또 계절에는 사시사철이 있고 하루에는 밤낮이 있는 것처럼 산에는 온갖 나무가 있어야 하는 게 자연의 이치이다. 이런 동아시아적 지혜를 소홀히 하고 자연의 이치를 무시한 결과 산불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렇다면 산불 피해가 커진 원인을 동아시아 전통적 학문관을 소홀히 한 데서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산에는 온갖 종류의 나무가 있듯이 세상에도 온갖 사람이 있다. 이런 세상에서 좋은 사람만 있기를 기대하는 건 희망 사항일 뿐 서로가 공존하는 길을 모색하는 게 현실적으로 타당하다. 그런데도 서구 형이상학은 이런 희망이 세상에서 구현되기를 오랫동안 꿈꿔 왔다. 고대 그리스 플라톤 철학이 ‘이데아’를 도입하고, 중세철학이 ‘신’을 요청하고, 근대철학이 ‘이성’을 받든 건 이런 이유에서다. 그 결과 서구는 이데아, 신, 합리성에 의해서 인간세계에 선(善)의 세계가 도래하기를 바랐다. 이런 바람은 산에는 소나무만 있어야 하고 기업에는 유능한 사람만 있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4.
20세기 후반 들어 이런 바람은 후기구조주의 철학자들에 의해 깨졌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지성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가 이런 철학적 조류에 앞장섰는데 그는 2000년이란 오랜 역사를 지닌 서구 형이상학을 무너뜨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에 따르면 세상은 신과 같은 완벽한 존재가 쓴 ‘성선(性善)의 책’이 아니라, ‘선악(善惡)이 함께 써 내려간 텍스트’이다. 이런 텍스트는 선이라는 씨줄과 악이라는 날줄이 교차하면서 짠 직물과 같다. 이런 직물과 같은 세상에선 이데아, 신, 합리성과 같은 절대적 중심이 없는데도 조화와 평형을 기막히게 이룬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이런 원리로 운영되어야 마땅한 게 아닌가? 자연계에선 어느 게 좋고 어느 게 나쁘지 않다. 소나무가 좋고 활엽수가 나쁘면 그건 인간의 관점이다. 마찬가지로 유능한 사람만 있기를 기대하는 건 경영인의 관점이다. 그러니 훌륭한 경영인이 되려면 구성원을 해고하기에 앞서 이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데 관심을 쏟아야 한다.  

자연계는 이렇게 운영되므로 전체로서 조화와 평형을 잘 유지한다. 장자는 자연계의 이런 소프트웨어를 가리켜서 "화리(和理)"라고 말한다. 늘 "합리"만 생각했지, "화리"라는 말은 처음 들었는데, 참 좋은 말이라고 생각된다. '화리'는 자연스러운 알맞음과 적당함을 추구하므로 최선과 최고를 위해 시비와 우열을 인위적으로 가리는 합리(合理)보다 우선한다. 그렇다면  최근 산불에서 배워야 할 교훈도 이런 '화리'의 소중함이지 않을까?" '합리'에서 '화리'로 건너가자는 주장이 내 박사 학위 논문 주제였다. 프랑스 18세기의 계몽주의('빛의 세기"에 팽배한 합리주의에 문제 제기를 한 디드로의 소설 작품들에 나타나는 "균형과 불 균형'의 문제가 같은 주제였다. '화리'란 전체적인 조화(調和)와 균형(均衡)을 유지한다는 뜻이다. 바로 ‘큰 지혜(智慧)’를 말하는 것이다. 화리는 동아시아에서 2000년 전부터 썼던 용어이나 지금은 사라진 말이라 한다. 그 대척점에 합리(合理)라는 말이 있다. 합할 합(合)자에, '이치 이(理)'자다. 이치에 합당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화리'가 ‘큰 지혜’라면 합리는 ‘작은 지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화리보다 합리를 더 좇고 있다. 합리는 옳고 그름을 따진다. 이치에 합당한가를 따지며 자꾸 쪼개고 쪼개서 시시비비를 가른다. 그럴수록 사회는 아군과 적군으로 점점 더 벌어진다. ‘큰 지혜’는 아니다. 시시비비보다 사회 전체의 조화와 균형을 더욱 중시한다. 그게 바로 ‘화리’다. 

5.
다큐 영화 <인생을 짊어지고>에는 지게로 짐을 지고 산장까지 운반하는 '봇카'라는 직업이 나온다. 일본의 오제 국립공원에서 12㎞ 떨어진 산장까지 필요한 물품을 나르는 일을 하는 젊은이들의 영화이다. 자신의 키보다 높고, 자신의 몸무게보다 무거운 83㎏의 무게를 나른다. 인상적인 것은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건 짐의 무게가 아니라 균형이라는 거였다. 짐을 쌀 때 철저하지 않으면 그 결과는 오롯이 자신에게 오고, 균형을 잘 잡지 못하면 내내 힘들어지기 때문이라 했다. 늘 중심을 생각하며 걷는다는 말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우리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건 무게가 아니라, 균형이다. 일상의 균형이 무너지면 중심을 잃고, 사는 게 힘들어진다. 다음의 세 가지 '조(調)'가 몸의 균형을 만들어 준다. 조신(操身), 조식(操息), 조심(操心)이 아니라, 조신(調身), 조식(調息), 조심(調心)이다. 몸을 고르는 것이고, 숨을 고르고, 마음을 고르는 것이다. 특히 조심(調心)은 마음을 모으는 것으로, 마음이 모이는 곳에 기(氣)가 모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흐트러지면 기가 흐트러진다. 호흡을 놓치지 않으려는 정성스러움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정성스러움과 욕심은 다르다.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 항공사에도 탑재물을 관리하는 '로드마스터'라는 직업이 있다 한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 역시 균형과 배치이다. 화물마다 무게와 부피가 달라서 무게가 한쪽으로 쏠리지 않게 중심을 찾는 것이 이 일의 핵심이다. 비행기가 언제든 만날 수 있는 갑작스러운 기류 변화와 흔들림 속에서 잘 견딜 수 있는 핵심은 균형과 무게 중심이기 때문이다. 

6.
어제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의 실현을 보았다. 이 말은 '처음에는 만사가 올바르지 않은 것처럼 보여도 결국 "모든 일은 반드시 올바르게 돌아갈 것"이라는 뜻이다. 처음에는 그릇된 것처럼 보였던 일도 결국에는 모두 바르게 돌아온다. 다시 말하면 올바르지 못한 것이 임기응변으로 기승을 부린다 해도 결국에는 올바르지 못한 것은 오래가지 못하며, 바른 것이 이기게 된다. '사필귀정’은 ‘바르지 못하고 요사스러운 것이 바른 것을 건드리지 못함, 곧 정의가 반드시 이김을 이르는 말’인 ‘사불범정(邪不犯正)’과도 뜻이 통한다.

이제 우리는 분명하게 선택하여야 한다. 무엇을 선택한다는 말은 무엇을 버린다는 말이다. 선택은, 깊은 생각을 통해, 그 과정과 결과를 상상하고 예측하여, 지금을 대하는 정교하고 엄격한 삶의 태도이다. 하루 하루를 살아가면서 선택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굳이 알지 않아도 되고, 쓸데 없고 거추장스러운 정보들이 핸드폰을 통해 나의 사생활이 쉴 새 없이 밀려오기 때문이다. 내가 나의 하루를 경계(警戒)하지 않으면, 그런 뉴스들로 나의 생각이 오염되고, 나의 갈 길을 방해받기 때문이다. 지금-여기에서 나에게 최선인 것을 알아내는 능력이 안목(眼目)이라면, 그 혜안을 감히 실행하려는 행위가 용기(勇氣)이다. 안목과 용기를 가지고, 우리는 선택을 하여야 한다. 


선택하기에/임영준

네가 서 있는 세상은
암담한 막장이 아니야
우리가 바라는 낙원은
아스라한 별이 아니야
깃드는 바람 따라
충만한 열망을 따라
기다리고 있는 거야
선택하기에 달린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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