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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신념은 함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오늘 아침의 화두는 신념과 배역 그리고 기도이다. 우리가 어떤 기회가 오면, 자신의 진실을 전달하기 위해 온전히 자신에게 몰입해여만 한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신념(信念)에 몰두해야 한다. 이 신념이란 무엇인가? 유물론을 신봉하는 현대인들은 눈으로 볼 수 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신념과 같은 가치를 무시하곤 한다. 신념은 서툰 자기 결심이나 아집이 아니다. 더욱이 나와 상관 없는 타인이 만든 교리나 규범을 무비판적으로 동의하고 믿는 것도 아니다. 신념은 깊은 묵상과 수련을 통해 서서히 만들어진다.

그 신념은 함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이 한 말을 완수할 때 비로소 완전해 진다. 거기다 말을 바꾼다는 것은 신념이 아니다. 자신이 한 말을 반드시 지키기 위해서는 침묵을 수련해야 한다. 그래 최근에 나는 내 계획을 자주 말하지 않는다. 그 말이 무섭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바뀔까 봐. 그러나 자신이 운명적으로 수행해야 할 임무를 깨달었을 때 그것을 거침 없이 말해야 한다. 일단 말을 하고 나면, 자신이 해야 할 임무를 내일로 미루거나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 된다. 그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 왜냐하면 내뱉은 말은 미래에 이루어질 희망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념을 가진 사람은 그 기회의 순간에 몰입하기 때문이다.

신념을 영어로 belief라 한다. 이를 우리는 '믿음'이라고도 한다. 빌리프는 'be'라는 강세 접두어와 'lief'는 '소중하게 여기다 또는 사랑하다'라는 독일어의 'liebe'에서 나온 말이라 한다. 그러니까 빌리프는 특정 종교의 교리를 믿거나 이데올로기에 동의하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심오하게 바라보고, 자신을 위한 감동적이며 창의적인 임무를 깨닫고, 그것을 완수하는 것으로 최우선 순위에 두고 매진하는 삶이다. 이게 신념이다. 그런 나의 신념은 무엇인가?

이런 신념을 갖고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내가 맡은 임무는 무엇인가? 무용가 마샤 그레이엄은 "무대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장소가 아니라 행동"이라고 했다. 흥미로운 말이다. 인생은 연습이 없는 단막극이다. 인생이란 무대에 선 우리는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고, 조명을 조절하고, 극의 흐름에 따라 적절하게 의상도 갈아입어야 한다. 대사와 몸짓 모두 상황에 맞춰 즉흥적인 동시에 전략적으로 해내야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나 자신에게 맡겨진 배역(配役)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배역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와 환경을 응시해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최적의 임무이다. 자신의 배역을 알고 그것을 아름답고 완벽하게 실천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며, 그 임무를 발견하는 것이 곧 깨달음이다. 그러니까 자기 확신과 그 믿음이 중요하다. 자기 확신이 곧 믿음이 되기 때문이다. 그 믿음이 다시 심오한 신념이 되면 역사가 일어난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각자에게 주어진 환경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신의 위치를 심오하게 들여 다 보고 자신의 미래를 능동적으로 선택하지 않는 한 우리는 환경의 노예로 전락한다.  그리고 그런 환경에 안주하는 것이 편하고 익숙하기 때문에 우리의 미래는 진부한 상태로 결정된다. 자신감을 자꾸 잃어간다. 그래 오늘 아침은 더 깊게 나를 뒤돌아 본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벗어나 스스로 자기 삶의 스승이 되고 싶은 욕망이 생겨날 때가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이 무엇(what)을 추구하느냐가 아니라 그 무엇을 '왜(why)' 그리고 '어떻게(how)'하는 지를 따지는 일이다. 그 무엇을 빛나게 하는 것은 무엇 자체가 아니라 무엇을 대하는 나의 태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엇이라는 명사보다 중요한 것은 그 무엇을 꾸미는 전치사라는 말이다. 영어로 그 무엇에 해당하는 what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그 앞에 붙은 전치사, 예를 들면 for와 by 같은 것들이다. 명사와 전치사가 하나가 되면 비로소 '왜'와 '어떻게'가 등장한다. 명사는 모든 사람들이 인식하고 공유하는 것이지만, 사실 한 개인의 카리스마는 그 사람만이 갖고 있는 전치사에 달려 있다.

매주 일요일 아침은 배철현 교수의 <수련>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여 공유하는 날이다. 주말인데, 어제는 온 종일 비가 오고, 오늘 아침은 흐리다. 주말 농장에 가고 싶은데, 흐린 날씨가 주저하고 있다. 농장 가는 길에 피었을 꽃들이 눈에 선하다. 그렇지만 급한 게 없다. 야채 모종을 심을 시간이 아직 남아있다. 아침 사진은 오늘 시와 어울리는 것이다.

긴 질문에 대한 짧은 대답/이화은

밤새워
비 내리고 아침
둥굴레순
그 오래 묵은 새촉이 불쑥 뛰쳐 나왔습니다
올봄도 온 우주의 대답이 이렇듯
간단명료 합니다

호모 사피엔스가 신체적으로 월등한 네안데르탈인과의 경쟁에서 이긴 것은 생존을 위해 다른 동물이나 다른 유인원들과 경쟁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정복하기 위해 지하 깊은 곳으로 내려갔다는 점이라고 배철현 교수는 말한다. 그들은 거기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기 전 눈을 감고,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그 때부터 호모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되었다. 그게 3만 4000년 전의 일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생존을 위해 동물과 경쟁하고 동료 인간들과 싸웠다면,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깊은 동굴로 내려가 위대한 자신을 발견하고, 그런 자신을 만들기 위해 자기라는 과거의 괴물과 싸우기 시작했다. 그들이 그림을 그린 것은 더 많은 동물들을 잡게 해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동물들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름다운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예술로 승화시킨 것이다.

아직도 호모 사피엔스로 남아 있는 사람은 자신의 삶의 의미와 쾌락을 경쟁을 통해 성취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자들이다. 자신이 편견에 사로잡힌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경쟁에서 이기는 것을 삶의 최우선으로 삼는다. 반면 오늘날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정신적 유전자를 지닌 자들은 자신을 심오하게 관찰한다. 이들은 자신을 혁신하는 데 관심이 깊으며, 항상 자신만의 임무를 찾고, 그것을 거침없이 노래하는 자들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우주의 주인인 시간은 인간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자연은 시간을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스스로 적당하게 변모하지만, 시간을 인위적으로 인식하는 인간은, 언제나 시간과의 대결에서 패배자다. 2021년 3월도 그렇게 쏜 살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그렇게 지나가 버렸다. 변이바이러스의 등장은, 우리가 만병통치약이라고 자랑했던 과학(科學)과 기술(技術)이 선제적이지 못하고 임시방편이란 사실을 지적할 뿐이다.

이어지는 글은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에서 보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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