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96.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3월 17일)
1.
‘안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 것인가? 우리 뇌는 감각되는 것과 지각되는 것과 인식되는 것으로 구분된다. 인간은 감각(sense)된 것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이 불가능하다. 감각된 것들에 대한 분류(classify, cluster)와 범주화(categorize)에 대한 간접적 표현만이 가능하다. 그것이 지각(percept)이다. 감각된 것에 대한 표현은 지각된 것들 간의 관계성으로 가능하다. 그것을 인식(recognize)이라 한다. 하나의 사실(fact)를 접하는 것(cognize)으로부터 관계성을 재발견(re-cognize)해 내는 것이다. 그것이 '아는' 것이다.
'이해한다'는 '이치를 풀어낸다'는 것이다. '왜 그러한 지를 끌어낸다'는 뜻이다. '구조와 작동원리로 왜 그러함을 그러내는 것'이다. '이해한다'는 것은 ‘수평적' 관계보다도 더 심층의 관계를 알아내야만 가능하다. 현상을 존재하게 하는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하여 수평보다 아래에 선다. 그래 영어로 이해한다는 것이 'under+stand(아래에 서다)'이다.
'안다'는 것으로 타자를 이해할 수 없다. '아는 것 이면을 더 알아야 이해가 간다'는 의미다. 이러하기에,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제대로 감각할 수 있는 ‘감성'이 필요하다. '감성'이란 '내 마음을 지우고, 있는 그대로를 보려고 하는 살아있는 마음'이다. 다시 말해서 ‘열린 소통’의 마음이다. ‘소통'은 '나를 먼저 열고 통한다'는 의미다. '나를 연다'는 것은 '나의 감각의 문을 연다'는 의미다. 감각의 새로운 창문을 여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새로운 것의 감각만이 새로운 것을 기억하게 하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새롭게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많이 알고, 이해도가 깊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자신의 통제력이 높다'는 것이다. '수많은 우연성이 존재하는 세상에 대하여 통제력의 넓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생존 력에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존 력에 뛰어나다'는 것은 '더 많은 것을 경험하고 더 많은 것을 알고 더 많은 이해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신체의 변화를 일으킨다. 이러한 변화는 자손들에게 고스란히 전승된다. ‘부익부 빈익빈’을 낳는 메카니즘이다. 나를 먼저 열어야 하는 이유다. 내가 먼저 열고 수많은 감각을 접해야 하는 이유다. 수많은 시공간을 경험해야 하는 이유다. 여행을 해야 하는 이유다. 동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다. 아니면, 적어도 독서를 해야 하는 이유이다. 여행이나,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없다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2.
그런데 우리 사회는 지금 '책'이나 '글' 대신 유튜브 알고리즘에 중독되어 있다. 글을 읽는 독서 대신에 영상을 보고, 해석이 필요 없는 정보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린다. 질문과 사유가 사라진 이후의 세계는 필연적으로 파국에 이른다. 그건 나치 정권이 예이다. 나치가 정권을 잡고 가장 먼저 수행한 것은 책을 불태우고, '적'을 만들어 가는 작업이었다. 책을 불태우는 미래 사회의 모습, 아니 책을 읽지 않는 인간들이 만든 사회를 그린, 미국 작가 레이 브래드버리의 소설 <<화씨 451(1953년)>>를 알게 되었다. 구입하며 읽어 볼 생각이다. 영상과 이미지에 생각을 외주 주는 우리 사회의 모습과 비슷할 것 같기 때문이다.
3.
먼저, 그 책을 소개한 이정현 교수의 말을 들어 본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몬태그의 직업은 ‘방화수(fireman)’다. 임무는 화재를 진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남은 책을 불태우는 것이다. 그는 누군가 책을 소장하고 있다는 신고가 들어오면 즉각 출동해 책을 압수한 뒤 태워버리는 일을 10년 동안 지속했다. 몬태그가 살아가는 국가는 책을 마약보다 해로운 것으로 간주해 엄격한 금지령을 내린다. 국가가 운영하는 <방화청>에는 수천명의 방화수들이 근무한다. 사람들은 책을 보기만 해도 기겁하고, 독서를 죄악으로 여긴다. 그러면 사람들은 영화와 텔레비전이 등장하면서 사람들은 느리게 활자를 읽는 것을 기피한다. 역사와 소설은 가볍고 손쉽게 압축되고 각색된다. 벽면 텔레비전으로 접하는 정보와 이미지들을 소화하기에 바쁜 사람들은 사유하지 않고,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독서를 혐오하게 되자 방화수들의 업무는 계속 줄어든다.
그 소설의 95쪽을 공유했다. “학교 교육도 단순 해져 갔지. 규율은 느슨해 지고 철학과 역사와 언어는 비참하게 몰락하고 영어의 철자법은 갈수록 변질되어 갔지. 마침내 모든 것이 완벽하게 탈바꿈했네. 인생은 말초적이고 단순한 것으로, 일은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으로,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후딱 일을 끝내고 나면 그때부터 마냥 놀고 즐기는 시간이 시작되는 거지(95쪽).”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헌법의 언어까지 왜곡되고 있다.
4.
질문이 사라진 공백은 ‘해석이 필요 없는 정보’로 메워지고,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을 하고 있다고 느낀다. 몬태그의 상사 비티 서장은 책을 ‘불안한 물건’으로 규정한다. 이런 식이다. “사람들을 얽어 매려고 철학이니 사회학이니 하는 따위의 불안한 물건들을 주면 안 돼. 그런 것들은 우울한 생각만 낳을 뿐이야. 지금의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듯이, 벽면 텔레비전이 달린 아파트를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은 우주를 계산하고, 평가하고, 등식화 하려는 사람보다 더 행복해. 뭘 평가하고 등식화 한다는 것은 사람을 비인간적으로 외롭게 만드는 일일 뿐이라고. 난 그걸 잘 알지. 빌어먹게도 해 봤으니까(103쪽).”
하지만 몬태그는 자신이 사는 세계에 의심을 품기 시작한다. 몬태그는 이웃집 소녀 클라리스를 만나면서 이상한 얘기를 듣게 되고, 책 몇 권을 숨긴다. 몬태그는 최근 출동해 목격한 한 노파의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 갖고 있던 책을 적발당한 노파는 방화수들 앞에서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른다. 자신의 목숨을 던지면서까지 책을 지키려고 한 노파를 목격한 이후 몬태그는 책에 강렬한 호기심이 생긴다. 결국 몬태그는 소지한 책을 들키고 도주한다. 숲으로 도피한 몬태그는 그곳에서 자신처럼 책을 소지한 혐의로 쫓기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읽은 책을 통째로 암기하면서 살아간다. 도주자들은 ‘암기(기억)’로 체제에 저항한다. 각자 암기를 맡은 텍스트 그 자체인 그들은 각자가 도서관이고 되고, 지식을 전달하는 자가 된다. “우린 역사와 문학, 그리고 국제법 덩어리들이라 오. 바이런, 톰 페인, 마키아벨리, 또 예수가 바로 여기에 있 소. 그리고 시간은 없고, 전쟁은 시작되었고, 우리는 지금 이곳에 있고, 도시는 저기에 있 소. 수천 가지 색깔로 포장된 채(232쪽).”
5.
이 소설에서 저자 레이 브래드버리는 '전자감시체계', '현금자동지급기', '대형평면 모니터' 등 미래에 상용화될 기술들을 정확하게 상상했다. 그보다 놀라운 건 소설에 묘사된 세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의 모습은 소설에 묘사된 풍경과 그리 다르지 않다. 영상이 활자의 위상을 무너뜨린 지는 이미 오래됐지만, 지금은 그 영상마저 더욱 짧게 압축된다.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정보만을 걸러주는 알고리즘 체계에서 사람들은 점차 확증 편향에 빠지기 쉽다. 과거보다 훨씬 편리하게 정보를 접할 수 있고, 양질의 책들이 출간되고 있지만, 사람들은 스스로 정보를 차단한다. 대통령조차 유튜브의 검증되지 않은 정보를 토대로 계엄령을 내리고 자신에게 동조하지 않는 자들을 모조리 ‘반국가세력’이라는 '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지금, 여기의 현실이다. 기술이 발달하고 정보가 폭증할수록 인간은 사유하는 법을 잃게 되리라는 작가의 섬뜩한 예측은 이미 현실이 됐다. 질문과 사유가 사라진 이후의 세계는 필연적으로 파국에 이른다. 나치가 정권을 잡고 가장 먼저 수행한 것은 책을 불태우고, ‘적’을 만들어내는 작업이었다. 그것은 곧 다가오는 전쟁과 홀로코스트의 징후였다. 작가 레이 브래드버리가 이 책을 출간하던 무렵 미국에서도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극우주의자들이 그토록 색출하려고 애썼던 ‘적’은 결코 박멸되지 않았다.
사상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고, 끊임없이 ‘적’을 만들어내는 광기의 시대를 통과하며 작가는 ‘책이 없는 세계’를 그려냈다. ‘책이 없는 세계’, 그러니까 ‘사유가 사라진 자리’에는 어김없이 파시즘이 출몰한다. 스마트폰으로 극우 유튜브를 시청하면서 ‘반국가세력’과 ‘좌파’를 몰아내자고 외치는 자들이 법원을 부수고 광장을 점거하는 장면은 소설 속의 풍경과 겹친다. 언뜻 보면 소설의 결말은 희망적이다. 전쟁으로 파괴된 세계에서 주인공 몬태그와 동료들은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려고 나선다. 끊임없이 읽고, 쓰고, 서로에게 배운 것을 이야기하면서. 하지만 모든 것이 무너진 이후에 야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다는 결말은 섬뜩한 경고이기도 하다. “나는 지난 10년 동안 내가 불사르느라 뿌렸던 등유를 생각했 어. (…) 불에 타 없어진 하나하나의 책들마다 제각기 한 사람 씩의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그게 누구든지 한 권의 책을 채우기 위해 그 모든 것들을 생각해 낸 거야. 책 한 쪽 한 쪽을 알맹이 있는 글로 채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쏟았는지 알 수 없지. 전에는 결코 이런 생각을 해 보지 못했 어(89쪽).” 문제는 지금 위리 사회가 이런 소설을 읽지 않을 뿐 아니라, 내 <인문 일지>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그래도 난 계속 쓰고 공유할 생각이다.
6.
많은 독서로 얻어지는 고차원적인 언어의 질적 상승은 그 사람의 인품을 상승시킨다. 독서를 많이 한 사람과 잠시라도 대화를 나누어 보면 그 사람의 지혜와 품위 있는 말에 감탄한다. 독서를 많이 한 사람의 눈빛과 입가에 온화한 미소가 퍼진다. 독서를 많이 한 사람의 팔자 주름과 처진 볼 살은 자연스런 곡선을 이루어, 음악 미뉴엣(minuet)처럼 느껴진다. 독서를 많이 한 사람이 연설할 때는 강한 포르테처럼 청중을 고조시킨다.
생각의 수준이 말의 수준을 따라간다. 자신감과 우아함은 지적 능력에서 나온다. 우아하다는 것은 빛의 방식(a manner of lights), 즉 어떤 일을 순조롭게 잘 처리하고 완벽하게 짜여 결합되도록 하는 탁월한 재능이다. 우아함은 특별한 날에 먼지를 털고 과시하는 일련의 행동일 뿐만 아니라, 일상의 행동 방식이다. 우아함은 사람에게 풍겨 나는 아우라이다. 그 아우라는 서있고 걷는 자세와 손끝의 위치, 눈빛, 말과 행동에서 서서히 우러나와 진한 매력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물들인다. 독서는 이런 것이다.
독서/김연숙(1953 ~)
낡고 부드러운 쿠션에 코를 박듯 가볍게 국경을 넘어간다 일조량은 적으나 쾌적한 습도와 조도를 유지하는 이곳에선 숨쉬기가 편안하다 입국 이후 점차로 외부와 차단된다 숲으로 둘러싸인 성벽의 나라, 골목과 오솔길의 나라 도로표지판도 없이 골목이 골목을 가지치고 샛길이 샛길을 사다리 탄다 방음벽이 두껍다 시계도 없는 이곳에서 눈 비비며 둘러보면 격자무늬 담 밖으로 먼동이 트고 격자무늬 담 밖에서 끼니때가 지나간다 이 친숙한 중독의 나라에서 후미진 골목길을 걸어가고 있으면 오래전에 죽었다는 사람과 마주칠 때도 있다 노동재해 보험국에 근무하며 처마 낮은 푸른 집에 살고 있는 사람도 만난 적 있다 모퉁이에 몸을 반쯤 감추고 유대인의 짙은 눈으로 뚫어지게 나를 보며 서 있었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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