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위기지학'은 자신을 위한 공부이다.

3년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3월 11일)

옛 선비들이 생각했던 공부는 위인지학(爲人之學)과 위기지학(爲己之學)으로 나뉘었다. 인(人)은 타인을 가리키고, 기(己)는 자기 자신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위인지학'은 다른 사람을 위한 공부이고, 타인에게 보여주고 인정받기 위한 공부이다. 반대로 '위기지학'은 자신을 위한 공부이다. 자신을 위한다는 것은 자기 욕망을 들여다보고 혼자 있을 때 삼가고 조심하는 공부이다.

유럽으로 건너가 본다. 산업혁명 이전의 공부는 '나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한 공부'였다. 19세기 교육에서, 삶의 목적은 개인의 긍정적 잠재력을 개발하여 행복을 성취하고 공동체에 기여하는 것인데, 공부를 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방치, 학대, 파괴하게 된다는 것이다. '위기지학'이었다. 그런데 산업화 이후 공교육이 인간의 보편적 권리이자 의무가 되면서부터 공부의 성격이 변했다. 이제 공부는 정신적 자기 구원이 아니라 물질적 기반 구축을 위한 것이 되었고, 출세의 사다리에서 상층부에 올라가기 위한 경쟁 수단이 됐다. 이는 '타인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한 공부'라 말할 수 있다. 공자의 표현으로 하면, '위인지학'이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이 보여는 것처럼, 이런 공부는 누구에게도 무시당하지 않겠다는 집념에서 출발한다.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그건 나를 위한 공부와 너를 이기기 위한 공부를 넘어, 나의 무지로 타인을 보호하는 공부이다.

1) 그 대안 나를 구원하고, 너를 이기는 공부를 하는 동안 내 안에 뿌리내린 맹목과 확증편향에 대한 자기 교정으로 서의 공부,
2)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폭력의 주체가 될까 두려워하며 자기를 성찰하는 공부,
3) 그러니까 '나로부터 타인을 지키기 위한' 공부를 제안한다.

새로 등장한 그는 수많은 학자들과 활동가들이 축적해 놓은 노동인권 담론을 모르고 있고, 또 하나는 개인의 존엄이자 자기 결정권이라는 근대적 인권 담론에 힘입어 개인이 국가에 '충성'한다는 것이 얼마 위험한 발상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게다가 탈원전을 주장한다. 이들은 원전산업의 경제적 효율성에 대한 공부만 하고, 그로 인해 일어난 또는 일어날 비극에 해한 성찰은 없다. 오로지 돈, 돈, 돈 뿐이다. 사람은 안 중요하다.

무지의 결과이다. 물론 무지가 조롱의 대상은 아니다. 그렇지만 무지가 무시의 결과라면 이야기는 다른 문제가 된다. "역사적 폭력과 그것이 인류에게 가한 상처에 대한 무신경함"(신형철)이 문제인 것이다. 120시간 노동 발언은 노동착취의 역사가 남긴 상처에 대한 무시이고, 국민의례에 대한 자부심은 국가가 개인에게 희생을 강요한 국가주의의 불행한 역사에 대한 무시이며, 탈원전의 문제를 산업적 측면에서만 접근하는 것은 원전 사고로 인해 인류가 겪은 비극에 대한 무시이다. 이런 무시로 서의 무지는 과거와 현재의 모든 피해자들에 대한 폭력이 된다.

깊은 통찰을 하는 아침이다. 무지는 개인의 불행과 사회의 파멸을 초래하는 범죄의 원인이니 일종의 교육 문법을 다시 짜기 시작할 때이다. 빅토르 위고 했다는 말, "무지의 굴을 파괴하면 범죄라는 두더지도 파괴된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1813)에서 수전노 스크루지의 회개를 돕기 위해 등장하는 유령 중 하나가 기괴한 모습의 소년과 소녀를 데리고 다는 데, 그들의 이름이 각각 "무지(ignorance)"와 "궁핍(want)"였다. 우리 사회의 두 가지 커다란 문제이다. 무지와 욕망. 유령이 더 강조했던 것은 소년, 무지의 위험이었다. 위험하다.

오늘 아침 시는 좀 길지만 재미난 시이다. 시인은 우리 사회 구조의 부조리함을 드러내고자 한다. 우리 사회에는 기득권층이라 불리는 일류들과 거기에 오르고자 하는 이류, 삼류들의 희망 없는 버둥거림이 있다. 어리석은 삼류들은 자신들도 일류가 될 수 있다는 가련한 소망을 품고 오늘도 전쟁터에 나간다. 그리고 일류들이 던져주는 떡고물에 감지덕지한다. 그것이 악한 사회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해주는 줄도, 일류들의 음모인 줄도 눈치 채지 못한다. 삼류는 그래서 삼류다. 그들은 가짜 일류들 앞에 무릎을 꿇고 자발적으로 복종한다.

그들은 니체가 말하는 ‘시장의 파리떼’이고 속물들이다. 세상은 소수의 교활한 일류들과 다수의 어리석은 삼류들로 되어 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란 말을 믿고 싶다. 인간을 어찌 일류와 삼류로 나눌 수 있을까마는 그래도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품격은 달라진다. 한 인간의 기품은 많이 배웠다고, 또는 많이 가졌다고 생기는 것도 아니다. 앞서 가려는 것도 좋고, 잘나 보이려고 애쓰는 것도 좋다. 그러나 어느 때, 어느 자리에 있던지 최소한 인간으로서의 품위는 잃지 않고 살아야 한다. 이 아침의 다짐이다. 사진은 주말농장 가늘 길에 찍은 거다. 때를 기다리고 있다.

삼류들/이재무

삼류는 자신이 삼류인 줄 모른다
삼류는 간택해준 일류에게, 그것을 영예로 알고
기꺼이 자발적 헌신과 복종을 실천한다
내용 없는 완장 차고 설치는 삼류는
알고 보면 지독하게 열등의식을 앓아온 자이다
삼류가 가방 끈에 끝없이
유난 떨며 집착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것이 성희롱인 줄도 모르고
일류가 몸에 대해 던지는 칭찬
곧이곧대로 알아듣고 우쭐대는 삼류
삼류는 모임을 좋아한다 그곳에서 얻을 게 많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일류와 어울려 사진을 박고 일류와 더불어 밥을 먹고
일류와 섞여 농을 주고받으며 스스로 일류가 되어간다고 착각하는 삼류
자신이 소모품인 줄도 모르고 까닭 없이 자만에 빠지는
불쌍한 삼류 사교의 지진아
아 그러나, 껍질 없는 알맹이가 없듯
위대하게 천박한 삼류 없이
어찌 일류의 광휘가 있으랴
노래를 마친 삼류가 무대를 내려서자
박수갈채가 쏟아진다 삼류의 얼굴에 꽃물이 든다
삼류는 남몰래 자신이 여간 대견하고 자랑스럽지가 않은 것이다

사실 열렬한 박수갈채는 노래 솜씨보다 월등한
그녀의 미모에게 보낸 것인데 그 사실을 그녀만 모르고 있다
삼류는 일류들이 앉아 있는 맨 앞줄을 겸손하게 지나서
이류들이 앉아 있는 중간을 우아하게 지나서
삼류들이 뭉쳐 있는 후미에 뽐내듯 어깨 세우고 앉는다
삼류는 생각한다 이렇게 열심히 노래 부르다 보면
언젠가 저 중간을 넘어 저 맨 앞줄에 의젓하게 앉아 있는 날이 올 거야
삼류는 가슴을 내밀어 숨을 크게 마셨다 내뿜는다
그러나 그날은 언제 올 것인가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삼류는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온다
그녀도 세상은 이미 각본대로 연출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채 가고 있는 중인 것이다
삼류는 어제 그러하였고 오늘 그러하였듯
내일 또 무대에 올라 노래 부를 것이다
그러다 자신의 자리와 역할이 일류를 위한 영원한 들러리요, 삐에로요,
악세사리라는 것을, 뼈저리게 무슨 회한처럼 문득 깨달을 것이다

오늘부터 글을 두 가지 버전으로 쓰다. 길게 사유한 글이 궁금하시면, 나의 블로그로 따라 오시면 된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인문운동가_박한표 #우리마을대학 #사진하나_시하나 #이재무 #복합와인문화공방_뱅샾62 #부자생 #위기지학 #위인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