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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물론 온전한 사람은 없다. "뒤틀린 목재" 같은 게 우리들의 모습이다. 다만 그것을 바로 잡는 거다.

3178.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2월 27일)

1.
이젠 정리를 하고 싶다. '윤10'이라는 인물은 인문 운동가의 시선으로 보면, 문제적 인물이다. 우리는 그에게서 다음과 같은 6 가지의 장애를 가진 사람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우리 사회는 그 때문에 혼선을 지금 겪고 있다. 이 특징들은 우리들도 그런 가 점검 해보아야 할 거울이다.
▪ 분노 조절을 못해 툭하면 화를 내고, 
▪ 공감 능력이 없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 자기중심적이라 공사 구별을 못하고, 
▪ 이기적이라 자화자찬 하는 일이 버릇이고, 
▪ 책임은 남에게 미루고, 
▪ 도덕 의식이 희박하여 태연하게 거짓말을 한다. 

2. 
그런 리더이면, 그 조직이 어떻게 제대로 굴러갔겠는 가?  그가 한 짓이 드러났다. 특히 또다른 문제적 인물이 그의 부인이다. 기억되는 다음 사건들을 예를 들어 보겠다.
▪ 2019년 6월 그가 검찰총장이 되고 다단계 쿠데타로 2022년 3월 대선 이후, 2025년 2월 20일 오늘까지 햇수로 7년 동안 나라는 전 영역이 파괴됐다. 
▪ 2024. 12. 3 '친위 쿠데타(coups d'état)는 군부의 무력을 동원해 45년 전 군사독재체제로 회귀하겠다는 정신 나간 미친 자의 착란 행태였다.
▪ 그 두 류(類)가 정치에까지 기생(寄生)할 수 있는 정치 환경과 조건에서 내란을 동조한 정당과 세력들은 해체되어야 하고 퇴출돼야 한다. 다시는 그런 류(類)의 인간종이 서식(棲息) 가능한 정치의 장은 기필코 혁파돼야 한다. <<주역>>에 "유족변물(類族辨物)"이라는 말이 나온다. 어제 <인문 일지>에서 말한 <천화 동인(同人)> 괘를 풀이한 괘의이다. '하늘과 태양(불, 火)이 동인(동인, 같은 뜻을 지닌 동지)하니, 군자는 이를 본받아 무리를 구분하고 일을 분별하라'고 했다. 여기서 군자는 하지 말아야 할 일에는 아예 몸을 담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불선(不善)하고 불미(不美)한 일의 결과가 선(善)하고 마(美)하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무리를 구별한다는 것은' 아무 하구나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다. 상호 신의가 두터운 사람들의 모임인지, 대의명분이 분명한지 살핀 후에 관계를 맺어야 한다. "물(物)"은 기본적으로 사물, 만물이라는 뜻이지만, '일'로 해석한다. 인간 사회의 일은 '물(物)'에 포함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 최근 뉴스에서 공인이 아닌 부인이 총선을 앞두고 하 명의 전 의원(구속)에게 '경남 창원 의창'이라는 지역구에 한 명의 전 검사가 당선되도록 도와주면 '장관 또는 공기업 사장 자리를 주겠다'고 말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그 외 불법은 다 나열하기 힘들다. 그의 육성까지 나온 상황이다.
▪ 그 문제적 인물은 오늘까지 일말의 반성과 뉘우침이란 없다. 부하 탓이나 남 탓을 하고, 거짓말, 헛소리, 궤변, 파렴치, 몰염치, 야비하고 비굴한 인성, 무지와 졸렬함, 그리고 사회 분열과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그와 그의 부인도 포함하여 그들은 우리의 현대사에서 ‘매우 드물어 듣지도 보지도 못한‘ 희대(稀代)의 기괴한 악마(惡魔)다. 

3. 
물론 온전한 사람은 없다. "뒤틀린 목재" 같은 게 우리들의 모습이다. 다만 그것을 바로 잡는 거다. '온전한' 나를 위해. 온전함은 완전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짐을 삶의 불가피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자세히 보면, 자연도 완벽하지 않다. 다만 변화하고 순환할 뿐이다. 완벽한 생태계가 있지 않다. 서로의 죽음으로 서로를 살리고, 어디선가 균형이 무너지면 어디선가 균형을 다시 세운다. 그저 '균형 찾기' 이다. 사회가 우리에게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것은 세상을 조종할 능력을 주는 '객관적인' 지식이다. 그러나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 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는 일에 소홀하다. 객관적 지식은 세상을 주무르고, 조종할 능력을 제공하지만, 그러한 지식은 오히려 우리들이 온전한 삶을 살게 하는 일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필요 이상으로 똑똑한 사람들을 나는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한 가지에 집착한다'는 뜻은 균형을 놓치기 쉽기 때문이다.

4. 
게다가 생활의 편의를 위한 도구는 날이 갈수록 발전하고 있지만, 가슴의 헛헛증은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아름다운 것을 보아도 무덤덤할 뿐 좀처럼 경탄할 줄 모르는 정신의 혼수상태에 빠진 이들이 의외로 많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방향조차 분명치 않은 길 위에서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달려간다. 그런 내달리기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영혼에 트라우마를 남긴다. 열정 뒤에 가려졌던 비애와 상실감 그리고 공허함이 모습을 드러낼 때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모습에서 낯선 존재를 발견한다. 존재의 불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는 구성원들 간의 분리를 권한다. 그러면서 사회는 우리들의 삶을 파편화 시킨다. 사회 구성원들 끼리 서로 싸우게 한다. 이렇듯 우리는 분리된 삶을 살면서 터무니 없는 대가를 치른다. 내가 나의 정체성을 부인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정체성을 확신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내가 나의 감정을 무시하면, 다른 사람의 감정도 쉽게 무시할 수 있다. 그러니 세상 모든 것이 그 출발은 '나 자신과의 관계'로 부터 이다. 내가 나에게 하는 행동이 결국 내가 남에게 하는 행동이다. 

5. 
사유를 좀 더 끌고 간다. 온전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온전한 자들은 자신의 기준, 자신의 욕망과 자신의 양심에 따라 사는 자들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온 권력을 틀어 쥔 사람들은 외부의 권력에 휩쓸리지 않는다. 지금부터는 그 온전한 나를 위해,  앞에서 말한 '6 가지 장애'를 극복하는 '나름의' 방법을 정리해 본다.

가장 먼저, 분노를 조절하려면, 장자가 말한 '허심(虛心)'의 세계로 건너가게 만드는 지혜를 길러야 한다. 우선 세 가지 마음, '성심(成心)', '사심(師心)' 그리고 '허심'에 대한 사유를 해본다. 장자는 ‘피차(彼此)'라는 말 대신에 ‘피시(彼是)'라는 말을 사용했다. ‘시(是)'는 ‘이것'이라는 뜻과 함께 ‘옳다'는 의미도 있다. 즉 '피시' 속에는 이미 ‘나의 쪽'이 옳다는 판단이 들어 있다. 이는 ‘자아’ 문제와 뿌리 깊게 연관되어 있으며, 우리 인식의 기본적인 틀을 보여주는 것이다. 요컨대 누구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거다. 그러나 이런 의식 자체는 비난 받을 일도 비난할 일도 아니다. 모두가 거의 그러니까. 따라서 ‘누구나 자신이 옳다'는 사실을 전제하면, 시비가 훨씬 더 줄고 평화로워질 가능성이 높다. 

반면 '피차'는 이쪽(차,此=이것)과 저쪽(피,彼=저것)으로 이분법적인 사고이다. 그러나 조금만 달리 보면, 이것과 저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각이나 입장에 따라 다르게 정해지면서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사태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는데, 그것이 피차의 이분법적 의식을 걷어내는 일이다. 나의 경우를 보면, 시비가 벌어지며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에서는 성심(成心)을 사심(師心)으로 삼는다. 이미 정해진 마음으로 가르치려 든다. 따라서 시비를 없애려면 허심(虛心)으로 상대해야 한다. 

장자에 의하면, ‘어리석은 자'가 '성심(成心, 에컨대 확증편향으로 굳어진 마음)'을 스승으로 삼는다는 거다. '성심'이 없는데도 시비가 붙었다는 것은 오늘 월나라로 간 자가 어제 도착했다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이는 '없는 것을 있다고 여긴 것과 마찬가지' 이다. 장자에 따르면, 이것과 저것, 옳음과 그름만이 동시적인 사태로 생기하는 것이 아니다. 생과 사, 가와 불가처럼 짝을 짓는 것은 모두 그렇다는 것이다. 장자는 ‘바야흐로 생이 있으니 바야흐로 죽음이 있고, 바야흐로 죽음이 있으니 바야흐로 삶이 있다’고 했다.

허심(虛心)의 지혜 없이 지식과 지성만으로 살면 자아가 아주 비대해 진다. 고전 평론가 고미숙은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준다. "내가 원하는 노동으로 당당하게 살겠어요"가 아니라, '엄청난 거액의 돈을 주무르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는 거다. 고미숙은 이걸 '자의식의 비만'이란 표현을 썼다. 이런 궤도를 타게 되면 이건 절대로 멈출 수가 없다. 게다가 그러고 나서 더 많이 얻고, 더 많이 누린 다음에 오는 건 반드시 허무이다. 누구도 멈출 수 없고, 더 목마르고, 마지막에는 허무에 몸부림친다. 이걸 고미숙은 "자기와의 완벽한 소외"라고 말했다. 이 말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사회적 성취를 이루고, 지식과 지성을 누리는 것이 결과적으로 삶을 질식 시키게 된다. 이게 '자기와의 소외 현상'이다. 이런 식으로 자기와 소통하지 못하면 당연히 타인과 공감하기도 불가능하다. <서유기>에서의 손오공처럼 힘을 갖고 불멸(불멸)을 얻게 되고, 이걸 감당할 수 있는 지혜가 없을 때 분노 조절 장애가 온다. 분노가 조절이 안되고, 그래도 힘이 넘치니 폭력을 휘두른다.

6.
"공감 능력이 없거나 부족하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 두 번째 장애를 살펴본다. 모든 삶은 풀어야 할 숙제를 안고 태어난다. 그 삶의 숙제를 잘 하려면 우선 다음 두 개의 힘을 기르고, 그 힘으로 일상을 영위하면 된다. 개인적인 철학이다. 다시 말하면, 삶에 필요한 단 두 가지의 능력, 더 나아가 온전한 삶을 사는 데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 능력만 갖추어야 한다고 믿는다. (1) "제 스스로 삶을 감당할 수 있는 힘"  (2) "자신과 이웃, 더 나아가 낯선 자와 원수까지 사랑하며 살아갈 힘".

첫 번 째로, "자기 스스로 삶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은 "자신에게 닥쳐오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기꺼이 제 스스로 해결하고 넘어설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이다. 그는 좀 더 구체적으로 필요한 능력을 다음과 같이 나열해 볼 수 있다.
▪ 한마디로 제 삶의 주인이 되어 그 주인 자리를 지킬 수 있는 힘을 갖추는 것이다. 
▪ 그것은 때로 도전과 역경 앞에 바위처럼 맞서는 용기와 내면의 힘을 갖추는 것이지만, 
▪ 한편으로는 겨울을 만나는 독사처럼 물러설 줄 아는 지혜를 포함하고 있는 힘이다. 
▪ 또한 필요와 상황에 따라 내어줄 것을 내주면서 협력하고, 홀로 만의 문제가 아닐 경우에는 연대를 이끌어내고 기꺼이 연대할 수 있는 관계 능력을 갖추는 것을 의미한다. ‘제 스스로 삶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갖추는 것은 온전한 삶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두 번 째로 모든 인간이 가져야 할 최고의 덕목이 '측은지심(惻隱之心)' 이다. 즉 사랑, 자비라는 말이다. 우리는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어려움에 처한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추어야 한다.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결여되면 자신이 준 것과 받지 못한 것에만 집착하게 된다. 이런 피해의식이 방어기제로 작동하면 ;측은지심;이 사라진다. ;측은지심;이 사라지면, 이런 시스템에 동의하게 된다.
▪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을 당연시하기 때문에 무한대의 빈부의 격차를 인정하는 신자유주의에 동의하게 된다.
▪ 자본주의가 창출할 수 있는 최악의 버전은 기본적으로 상위 1%를 위한 하위 99%를 착취하는 시스템이다.

다시 말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측은지심'이 배제된 이념이자 체제이다. 체제의 피해자들에 대해서도 '측은지심'이 있어야 한다. '측은지심'을 현대식으로 말하면 '공감능력' 이다. 이것을 신앙적으로 말하면 '사랑'이다.  몇 일전부터 <인문 일지>에서 말하고 있는 '거꾸로 사랑'까지 포함한다. 우리는 사랑할 시간이 부족하다. 우리는 조금만 더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었는데 늘 후회한다. 그래서 기독교가 주장하는 사랑, 믿음 그리고 소망 가운데 가장 으뜸이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랑은 따뜻함이다. 사랑은 불이다.  이 우주의 원동력도 사랑이다. "사랑이 세상을 움직이며, 사랑만이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힘의 원동력입니다"(김수환추기경). 사랑의 힘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다. 사람을 섬기는 것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 내가 물질 뿐만이 아닌 마음으로, 삶으로, 타인을 섬기는 도구가 되어 사랑을 실천한다면, 그 힘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다,

7. 
요즈음 우리 주변에는 다른 사람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이 모든 것들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매너의 부재 현상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주변에서 ‘꼰대’들이 많아지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꼰대’ 다른 사람의 입장을 배려하지 않는,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다른 사람을 내 몸같이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인 것이다. 자신만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입장을 배려할 줄 모르고, 자기의 생각만이 옳다고 믿는 고리타분한 어른들과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친구를 ‘겉늙은 녀석’, ‘애어른 같은 녀석’이라고 부르며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꼰대’라는 말을 흔히 사용한다. ‘꼰대’들의 특징은 공감능력의 부재로 인한 소통 장애자들이다. 그들은 자기가 만든 세상 속에 갇힌 채 다른 사람의 세상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이 자주 하는 말은 ‘난 그러지 않았다’, ‘그건 내가 해봐서 안다’ 등이다.

8. 
현재 우리 사회의 문제는 한국 엘리트들이 환대는 커녕 공감 능력마저 부족하다는 거다. 특히 현 정부 관료들과 일부 정치인들의 공감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이제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공감능력이 부족하면 당연히 소통과 협치 능력도 제한되며, 그래서 들이댈 수 있는 무기가 바로 ‘법과 원칙’이다. 이 과정에서 대화 단절과 투쟁이 뒤를 잇는다. 대화와 이해가 필요한 사람들, 특히 자신의 노동을 갈아 넣어야 겨우 기본적인 생활이 유지되는 사회적 약자층에 대해서조차 공감과 연대 대신에 ‘법과 원칙’이 작동했다.  공감능력은 ‘함께 살아가는 능력’의 핵심이다. 미국의 전 대통령 버락 오바마의 다음 말이 잘 말해준다. “공감한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의 처지가 되어 보는 것이다. 우리와 다른 사람의 눈으로, 배고픈 아이의 눈으로, 해고된 철강노동자의 눈으로, 기숙사를 청소하는 이민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일이다.” 그런데 왜 한국 사회는 엘리트일수록 공감 능력이 부족할까? 그 답을 한 숭희 교수의 글에서 얻은 적이 있다. "권력 엘리트들이 처음부터 공감능력 결핍이라는 DNA를 가지고 태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태생적 사이코패스가 아니라면 누구나 공감능력을 학습할 수 있다. 다만 양육과 성장, 교육과 경험 속에서 타자를 이해해야 할 필요성 혹은 상황에 노출되지 않도록 ‘관리’되었을 뿐이다. 청년 전기까지 이어지는 십수년의 과잉 경쟁 속에서 아이들은 학교성적을 올리는 데 공감능력이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부모들은 아이들을 사회적 관계로부터 고립시켜 공부에 집중하도록 한다. 이 과정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학생들이 입시에 성공하고 엘리트 계층의 반열에 들어선다. 결국, 한국 엘리트들의 공감능력 부족은 과잉경쟁이라는 시대상황이 만들어낸 창조물이다. 그러한 학습경험의 결핍은 그대로 공감능력의 결핍을 낳는다." 좋은 성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함께 사는 능력(공감-친교-협동)의 성장을 억제해야 한다는 것이며, 입시생을 둔 부모들은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9. 
공감 학습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유네스코가 강조해왔던 ‘함께 살아가는 능력을 학습하는 일(tolearntolivetogether)’은 모든 학교교육과 평생학습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함께 사는 능력'은 우리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 가장 중요하게 학습되어야 할 역량이다. 어릴 때 그나마 가지고 있던 사회적 연대와 공감, 공존의 능력을 갈수록 퇴화 시켜 가는 학교체제와 방식에 대한 대대적인 수술이 필요하다. 공감 학습은 정서와 인지, 상황과 맥락을 넘나드는 범경계적 학습을 필요로 한다. 공감학습을 위해서는 마음과 머리가 모두 필요하다. 이 문제는 여기서 멈추고 내일 더 이어간다.

10. 
지난 주일부터 '거꾸로 사랑하는 법'을 머리에 늘 담고 있다. "원수를 사랑하라' <루가 복음>과 <아제레 콘트라(agere contra - 거슬러 행동한다)가 촉발시킨 사유이다. 이를 일상에 어떻게 적용하여야 할까 고민하다가 만난 것이 '거꾸로 사랑하는 법'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었다. 다음 세 개의 변화를 시도하는 거다. (1) 나를 변화 시킨다.  공감능력, 사랑하는 마음 등이 안 생길 때는 나를 낮추는 거다. 낮아져서 사랑하는 거다. 무엇이라도 변화시키는 사랑은, 자신이 낮아질 때 일어난다. (2) 사랑하는 상대를 바꾸어 본다. 사랑하기 힘든, 사랑하기 싫은 사람들부터 사랑하는 거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자기에게 잘해 주는 사람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그건 아무나 다 할 수 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 나에게 상처 준 사람,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을, 더구나 그런 사람의 추하고 부족한 모습까지도 받아들일 때 그 사랑은 의미를 가진다. (3) 세상의 논리와 방법과 거꾸로, 아니 역설적으로 사랑하는 방법을 바꾸는 거다. 회사의 회장이 청소 아주머니에게 감사함을 표하는 것과 같다. 불가능한 사랑을 할 때, 우리는 상대에게 특별한 존재로 남는다. 


사랑하는 만큼 사랑받는 것/손병흥

주고 또 줘서 잃는 것 많을지라도
왠지 안타까워 애써 양보하고 싶은 마음
더 잘난 사람 비교는 커녕 매달려만 지는 것
비록 꿈꿔왔던 이상형 다를지라도
그냥 환상적 착각에 빠져 드는 것
끊임없이 주변 맴돌면서도
시침 뚝 떼고서 무표정 짓는 것
가끔씩 기다림에 지칠지라도
늘 가장 아름다운 시간은
사랑하는 순간임을 알게 해주는 것
누군가에게 큰 관심 갖게 해주던
새삼스레 믿음 주려고 노력하는 것
그 바람 같은 마음마저 머물도록
언약 가진 자의 축복 인냥
내가 믿어 줄 단 한 사람
때론 빗줄기에 흠뻑 젖어
삶의 고비고비마다 우수에 잠겨버려
크게 부족하고 많이 어긋날지라도
뭐 어때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하는
슬픔 외로움 허전함 달래 주던 포근함
마음 아파 괴롭고 미울지라도
되려 겸손과 감사함으로
더욱 더 성장케 해주던 영혼
닫힌 마음 활짝 열고서
늘 가득 채우게 해주던 그리움
조금 외롭더라도 간절히 원하는 그 마음
화해 손 먼저 내밀게 해주던 성숙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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