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16.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2월 25일)
1.
지난 주일에 만난 루가 복음 말씀 중,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는가?"가 들어 있다. 어제 <인문 일지>에서 '거꾸로 하는 사랑 법'을 소개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원수를 사랑하라'' 메시지와 선이 닿는다. 그 방법은 세 가지였다. 하나는 주체의 변화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낮아져서 사랑하라. 두번째는 대상을 바꾸어서, '거꾸로' 그 상대를 사랑할 수 없을수록 사랑하라. 사랑하고 싶지 않을수록 그를 사랑하라.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나를 좋아하는 사람만 좋아하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예수님은 낯선 자가 신이라고 하셨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 사랑받기 부족함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쉽다. 셋째는 사랑하는 방법을 바꾸는 거다. 역설적으로 사랑하라. 가격이 아니라, 가치 있는, 보람과 의미 있는 존재가 되려면 세상의 상식과 달라야 한다. 나보다 약한 자에게 자비를 실천하는 거다.
2.
하느님이 인간에게 한 첫 질문, '아이에카((ayyeka, 아예카라고도 함)'는 '너는 어디에 있느냐?'란 뜻이다. 이 문장에는 동사가 없으니 시제가 없다. 이 문장은 다음과 같이 세 개를 의미한다. 언젠가 <인문 일지>에서 공유한 적이 있는데, 다시 한 번 더 소환한다.
▪ 너는 지금 너에게 어울리는 장소에 있느냐? (네가 어디에 있느냐?)
▪ 너는 어제 너에게 어울리는 장소에 있었느냐? (네가 어디에 있었느냐?)
▪ 너는 내일 네가 가야 할 곳을 알고 있느냐? (네가 어디에 있을 거냐?)
죄를 범하고 숨어 있는 아담에게 하느님이 하셨던 위의 질문은 육체의 위치를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아담의 죄로 인해 하느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현실에 대한 비탄의 음성으로 아담에게는 현재 주어진 현재 상태에 관한, 즉 현재 영적 상태를 스스로가 자각하고 있는 지에 관한 내용의 질문이었다. 아담이 도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스스로 알고 있는지? 그 현실의 심각성을 깨닫고 있는 지에 대한 질문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 질문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질문이기도 하다. 삶을 살아가며 성과를 내야 하고, 결과를 만들며 성공을 꿈꾸는 우리들, 자기 계발과 같은 자기 발전을 생각하고,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욱 나아지기를 계획하고 노력하며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어느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는 우리에게 '출발 지가 어디인 가?'라는 현실 인식의 질문은 '자가 진단'의 관점에서도 너무 중요한 질문이라 생각한다. 그 출발 지를 잘 알아야 우리는 올바른 방향 설정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어디'는 인간으로서 마땅히 깨닫고 도달해야 하는 완벽한 자기만의 장소, 신이 개인에게 할당한 장소를 의미한다. 그 사람이 자주 가고, 거주하는 장소는 그 사람을 의미한다. 나의 정신과 육체는 내가 자주 가는 곳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 장소는 내가 사는 집일 수도 있고, 오늘날과 같은 디지털 시대에는 내가 자주 들르는 인터넷 사이트일 수도 있다. 나의 몸과 마음이 편해지는 장소, 그것이 곧 나의 수준이다. 이 질문을 다음과 같이 확장하였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어디에 계십니까?, '그대로 있어도 괜찮은 겁니까?', '이대로 이렇게 세월이 흘러도 괜찮은 겁니까?'
하느님이 우리들에게 하신 마지막 질문, 즉 언젠가 다가올 우리의 마지막 날에 "네가 어디에 있었느냐"라는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이 대답을 준비하는 것이 영성을 키우는 신앙의 길이 아닐까? 나의 '마아트', '도리(道理)를 잊지 않는 것이 아닐까? 여기서 나는 '최후의 심판'을 이야기 하시는 <마태 복음> 제25장 40절을 소환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 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이 말은 예수가 ‘신성 모독죄’로 십자가 처형을 받기 전, 제자들에게 당부한 유언이다. 이것이 복음서의 핵심이기도 하다. 예수는 인간들의 최후 심판을 말한다. 마지막 날에 예수의 자기 명칭인 ‘인자(人子)’가 천사들과 함께 땅에 내려와, 구원 받을 사람과 저주 받을 사람을 구별할 것이다. 착한 사람을 의미하는 동물인 ‘양’은 오른 편에, 악한 사람을 의미하는 동물인 ‘염소’는 왼 편에 몰아넣을 것이다.
그는 왜 착한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는지 명료하게 설명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종교의 교리 이야기는 없다. 평상시 종교 시설에 꼬박꼬박 다녔다든가, 헌금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특정 종교를 믿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없다. 그들이 구원 받은 유일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내가 배고팠을 때, 너는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내가 목 말랐을 때, 너는 나에게 마실 물을 주었다. 내가 낯선 자였을 때, 나를 집으로 초대하였다. 내가 입을 옷이 필요할 때, 내가 입을 옷을 주었다. 내가 병들었을 때, 나를 돌봐주었다. 내가 교도소에 있을 때, 나를 면회 와 주었다.”
그들은 예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그에게 묻는다. “우리가 언제 굶주린 당신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 마른 당신에게 마실 것을 주었습니까? 우리가 언제 낯선 자가 된 당신을 보고 집으로 초대하였고, 헐벗은 당신에게 옷을 입혀주었습니까? 우리가 언제 당신이 병들거나 감옥에 감금되어 있을 것을 보고, 당신을 방문했습니까?” 그들은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도 자신들이 왜 구원을 받았는지 알지 못한다. 구원은 은총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종교, 그 종교를 설명하려는 교리, 그리고 교리를 정기적으로 가르치기 위한 공간, 그 공간에서 배운 예수의 모습만이 예수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허상인 경우가 많다.
예수는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알려준다. “내가 너에게 말하겠다. 너희들이 내 형제와 자매들 가운데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다.” ‘지극히 작은 자’는 우리 주위에서 아무도 거들 떠 보지 않는 그런 존재 들이다. 외국인 노동자, 고아들 뿐만 아니라, 고통을 당하고 있는 동물들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 그에게 한 것이 바로 예수에게 한 것이다. 내가 일상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나 동물들을, 그 미물은 그냥 지나치면 나와는 상관없는 존재다. 그러나 나의 관심과 사랑을 쏟으면, 그 대상이 신적인 존재, 즉 거물이 된다.
4.
‘낯선 자’는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이나 생물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나의 안전을 위협하는 원수일 수도 있다. 야곱이 얍복강 가에서 만나 밤새 씨름한 무명의 낯선 자는 신이었다. 그는 더 이상 ‘발뒤꿈치', '얌체’를 의미하는 ‘야곱’이 아니라 ‘신과 씨름 하여 이긴 자’인 ‘이스라엘’이란 새로운 이름을 부여 받았다. 엠마오 출신 두 제자는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어간 예수를 보고 실의에 빠져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들을 길가에서 ‘낯선 자’를 만나, 그를 자신들의 집으로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한다. 그 낯선 자가 예수였다.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공간과 시간에서만 신을 찾으려는 사람들은 이런 ‘낯선 자’를 무시하거나 적대시하고 ‘지극히 작은 자’를 피한다. 낯선 자 중 ‘지극히 작은 자’는 나의 손길이 필요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며 생명들이다. 이들은 내 안에 존재하는 ‘자비’를 일깨우기 위해, 스스로 고통을 짊어진 생명들이다. 내가 그들의 고통(passion)에 공감하여 내 안에 숨겨진 자비(compassion)를 일깨우면, 그 ‘지극히 보 잘 것 없는 대상’이 예수가 된다. 그리스도교가 지난 2000년동안 생존한 이유는 이 단순하지만 감동적이며 강력한 명제 때문이다.
5.
질문(質問)은 자신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재화인 패(貝)를 만들기 위해 양손에 도끼 두 자루 '斤斤'를 들고 만들기 시작하는 수고이다. 이 수고로 나오는 해답은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이 아니라, 더 깊은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고 그것을 해결하려는 수고이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나는 무엇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으로 바꿀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이 목숨을 바칠 만한 것을 찾지 못했다면, 그는 어리석고, 만일 찾았으나,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비겁한 거다. 말 그대로 죄를 짓고 있는 거다. 영어의 죄(sin)라는 말이 '과 녘을 벗어나다'라는 뜻이다.
인간이 자신이 간절하게 열망하는 그것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열망하는 그것과 하나가 될 때, 우리는 행복하다. 그 때 만나는 고통은 소중한 그것을 알려주는 유일한 통로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 길이 좁아 들어가려고 시도하지 않고, 남들이 가는 넓은 길로만 가고 싶어 한다. 좁은 문을 통과하려면, 자신을 겸손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6.
베드로가 자신의 눈앞에 있는 그 존재가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이며, 육신을 지닌 존재가 신이라고 고백했다. 이 고백은 베드로가 자신의 스승을 신적인 존재로 여기고, 자신도 예수처럼 신적인 삶을 살겠다는 다짐을 한 것이다. 베르로도 사랑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전파하다 십자가 처형을 당하였다. 베드로처럼, 인간은 고통을 통해 다시 태어난다. 외부에서 오는 고통보다도 자신이 택한 고통에 나는 주목한다. 인간은 다시 태어나기 전, 이기심과 본능의 노예가 되어 그럭저럭 연명한다. 이 속에서 인내와 절제를 발휘하는 것 자체가 고통을 선택한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주인 같지만, 사실은 쾌락과 편함이 주인이 되어 나를 마음대로 움직인다. 그러나 인간의 심연 속에는 신적인 불꽃이 숨어 있다. 그 불꽃에 불을 지펴, 빛으로 살지 못할 때, 그는 죄인이 된다. 죄인이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무식이고, 알더라도 최선을 경주하지 않는 게으름이다.
고통은 내가 누구인가 가장 선명하게 알려주는 훈련사이다. 신이 욥에게 한 질문이다. "내가 세상의 기초를 세울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욥이 고백한다. "저는 이제 손을 입에 갖다 대고 신을 눈으로 보기만 하겠습니다." 본다는 것, 듣는다는 것, 맛을 본다는 것, 감각할 수 있다는 것, 이 당연한 모든 것은 사실 기적들이다. 질문이 답이다. 그리고 "네 이웃이 누구인가?" 이 질문도 중요하다. 신은 언제나 낯선 자이다. 왜냐하면 낯선 자에게 사랑을 베풀면, 그 낯선 자는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 본모습이 신이다. 나의 사람이, 낯선 자를 신으로 둔갑시킨다. 내가 자비를 베풀 때 그 가운데 신이 등장한다. 그 이웃이 내 친구이다.
7.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 준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일까?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고 하셨다. 예를 들면, "남을 판단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 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 받을 것이다"라 말씀하셨다.
8.
용서, 그거 어렵다. <<논어>>의 <위령공>편 제23장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자공이 물었다. "子貢問曰(자공문왈) 有一言可以從身行之者乎(유일언가이종신행지자호) 子曰(자왈) 其恕乎(기서호) 己所不欲(기소불욕) 勿施於人(물시어인). "한마디 말로 평생토록 지키고 행할 수 있는 말이 있겠습니까? 공자께서 말했다. '바로 서(恕)일 것이다.' '서(恕)'란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것이다. 공자 철학의 '일이관지'하는 핵심 원리는 '서'이다. 위에서 이미 말했던 것 처럼, '충', '속마음을 다하는 것(中心), '서'를 '같은 마음(如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여기서 '같은 마음'이란 '공감, 교감'을 뜻한다. 공자는 '서'의 뜻을 "己所不欲 勿施於人(기소불욕 물시어인)",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서양에서 말하는 '황금률(Golden Rule)'과 같은 의미이다.
많은 연구자들이 공자 철학의 도를 '인(仁)'으로 본다. 여기서 '인'은 '사람 사랑'이다. 그러면 '서'는 '인'의 실천을 만드는 근거가 된다. '서'가 공자의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개념이라면, '인'은 실천원리이다. '서'와 '인'이 완전히 대칭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서'가 공감적 감정 작용으로써 아직 '인'이 아니며, 그냥 감정으로 끝날 수도 있고, 아니면 '수신(修身)'을 통해 '인'의 덕성으로 발전할 수 있다. 그러니까 '서'에 항상 '인'이 따라다니는 것은 아니고, '서'의 감정을 갈고 닦아 습관화한 덕성이 곧 '인'이다. 반면 '인'에는 '서'가 항상 따라다닌다. '인'을 행할 때는 '서'의 감정작용이 받쳐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공자의 '인'은 맹자에게 가면 더 적극적이 된다. 맹자의 '四端之心(사단지심)' 중에 하나인 '인'은 남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보다 더 힘들어 하는 것을 넘어, 남의 기쁨을 나의 기쁨보다 더 즐거워하는 공감능력과 그 공감능력이 함양되는 정도에 따라 한 두 사람이 아니라 천하를 포괄할 수도 있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남에게 해줄 수 있는 적극적인 형태의 '거룩한 인', 즉 숭고한 도덕원리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9.
그게 어려운 일이기에, 스페인 왕비의 기사였던 이냐시오 성인은 '아제레 콘트라(agere Contra)', 즉 '거슬러 행하라'고 했다. 숭고한 도덕 원리를 위해서, 무질서한 애착들, 즉 나를 두려움에 빠뜨리는 것, 자유롭게 살지 못하게 하는 것, 오랜 악습들, 거부감, 저항, 혐오감 등 등을 회피함 없이 '거슬러 행하다' 보면, 어느 사이 면역이 생기고 두려움이 사라지면서 온통 무질서한 애착 안에서도 비로소 그것들에 마주하여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 길은 ‘자신의 고유 임무’ 혹은 ‘일생 동안 마쳐야 할 의무’ 이다. 우리는 개인이 지켜야 할 마땅한 '법'을 '도리'라 한다. 그리고 이 '도리'의 일부를 문자로 기록하여 한데 묶어 '법'이라고 부른다. 수메르 문명은 그 법을 메(ME), 이집트 문명은 '마아트(MAAT), 인도 문명은 르타(Rta), 히브리 문명은 토라(Torah), 중국 문명은 도(道, Dao)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그리고 반드시 지켜야 할 도리이다. 국가가 제정한 법은 인간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도리의 지극히 일부이다. 그래 후진 사회는 법률 조항들의 정신인 도리를 무시한다. 선진 사회는 이 법률조항들은 인간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도덕과 윤리의 표현, 즉 도리의 일부라고 여긴다. 게다가 선진 공동체는 인간의 양심을 일깨우고 고양시키는 교육에 힘쓴다. 인생을 놀이로 가정한다면, 그 놀이에는 내가 반드시 따라야 할 규칙이 있다. 스포츠 경기도 마찬가지이다. 내일 그 임무, 아니 의무 이야기를 이어간다.
10
어제는 멀리 신안 비금도에서 겨울 한철 한뎃바람에 자란 시금치를 사왔다. 우리는 그 이름보다 섬초라고 한다. 오늘 사진이 그 거다. 발그레하게 굵은 뿌리를 보면 입맛보다 먼저 마음이 동한다. 눈서리 맞고도 그만큼 야무지게 광합성을 잘한 푸성귀가 또 없다. 살아 낸 관성대로 푼푼한 생김새. 씨 뿌려진 날부터 해풍에 엎드렸으니 팡파짐한 앉은뱅이다. 귓불처럼 도톰한 잎, 바닷가 성긴 햇볕을 어떻게 움켜 삼켰으면 속속들이 단물인가 싶은 뿌리. 키만 커서 싱거운 비닐하우스 시금치 따위는 댈 게 못 된다. 지붕 없고 집 없는 것이 가장 달게 겨울을 이겼다. 매운 날에는 부서지게 얼었다가, 푹한 날에는 쓰러지게 녹아도 내렸다가 한 섬초가 단 이유는 추위에서 살아남고자 당을 스스로 저장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도가 올라가면, 어는 점이 높아져 낮은 온도에도 잘 얼지 않는 이치에 따른 것이다. 겨울이 추우면 추울수록, 매서운 찬바람에 맞서 자란 시금치, 아니 섬초는 그래서 더 달다. '버티는' 섬초 뿌리처럼, 그렇게 달큰해질 수 있다면, 나도 어디 한 번, 도망치지 않고 버티며 살고 살고 싶다. 이하늬라는 배우의 연기대상 수상 소감이 소환된다. "저는 되는 이유보다 안되는 이유가 많은 배우였거든요. 키가 너무 크다, 눈이 너무 찢어졌다, 목소리가 너무 낮다 등, 갖가지 이유 들이 있었지만 한 10년 버티다 보니까 세상도 바뀌고 그런게 어떨 땐 장점이 되기도 하더라구요. 꿈을 향해 좇아가는 분이 계시다면 지금 지치고 힘들고 막막할 때도 있겠지만 지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버티면 뭐라도 됩니다." 그러는 가운데, 오늘 공유하는 시처럼, 시간과 함께 우리들의 삶은 흘러간다. 조금 느릴 수도 있겠지만, 그 시간은 결국 나의 제일 말갛고 가장 분명한 것 만을 드러내 줄 것이다. 섬초의 뿌리처럼.
의외의 대답/천양희
내가 세상에 와
잘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말보다 침묵으로 말하겠다
강변에 나가 앉아
물새야 왜 우느냐 물어보았던 것
나는 왜 생겨났나 생각해보았던 것
내가 세상에 와
잘한 것이 무엇이냐고 다시 묻는다면
흘러가는 말로 다시 말하겠다
강가에 서서
그냥 미소 짓고 답하지 않은 노을을 오래 바라보았던 것
나는 왜 사나 알아보았던 것
내가 세상에 와
제일 잘한 것이 무엇이냐고 거듭 묻는다면
사람의 말로 거듭 말하겠다
무릎 꿇고 앉아
남의 고통 앞에 '우리'라는 말은 쓰지 않았던 것
나는 왜 사람인가 물어보았던 것
내가 세상에 와
끝까지 잘한 것이 무엇이냐고 끝까지 묻는다면
마지막 남은 나의 말로 끝까지 말하겠다
단 한 사람이라도
마음 살려주고 떠나는 것
다시는 몸 받지 않겠다며
나를 잃는 것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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