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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만물이 연이어 생겨나지만 나는 그들이 돌아가는 것을 본다.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1월 20일)

나는 내가 나의 호를 목계(木鷄, 나무로 만든 닭)로 정했었다. '목계'처럼 완전한 마음의 평화와 균형을 지닌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었다. 완전한 평정심을 이룬 모습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어깨의 힘을 빼는 것이었다. 최고의 싸움 닭은 뽐내지 않는다. I am who I am이다. 나는 나일 뿐이다. 평상심으로 자신의 감정을 제어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 때 중요한 가치가 '부드러움'이었다. 교만, 조급함, 공격적인 태도의 사나움 대신,
▪ 세속과 하나가 되기도 하고(노자가 말하는 "화광동진 和光同塵", 자신의 광채를 누그러뜨리고 이 풍진 세상의 눈높이와 함께 한다),
▪ 움직이지 않기가 태산처럼 원칙을 지키며(조급함을 버린 『손자병법』에서 말하는 "부동여산(不動如山)"의 여유),
▪ 부드러운 감성을 지닌 사람이(노자가 말하는 유약승강강(柔弱勝剛强): 부드러움과 유약함이 결국 강하고 센 것을 이긴다.)이 되고 싶었다.

올해 '청허(淸虛)'라는 이름을 하나 더 가지려 한다. '청(청)'을 택한 것은 <<장자>> 제5편 <덕충부(德充符, 덕의 가득함의 표시)> 초반에 물과 거울에 대한 이야기에서 얻은 것이다. "人莫鑑於流水(인막감어류수) 而鑑於止水(이감어지수) 唯止能止衆止(유지능지중지)" 사람은 흐르는 물에,  자신을 비쳐보지 않고 멈춰 있는 물에 바쳐본다. 이처럼 멈춰 있는 것만이 능히 다른 것을 멈추게 할 수 있다. 이를 오강남 교수는 이렇게 해석했다. "사람이 흐르는 물에 제 모습을 비춰 볼 수 없고, 고요한 물에서만 비쳐 볼 수 있다. 고요함만이 고요함을 찾는 뭇 사람의 발길을 멈추게 할 수 있다."

장자 생각은 마음이 ' 지수(明鏡止水, 맑은 거울과 고요한 물처럼 잡념과 허욕이 없는 깨끗한 마음)'와 같다면, 그런 사람은 남의 눈치나 칭찬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기 실현만을 위해(爲己, 자기 자신이기 위해)', 차분하고 조용히 정진할 뿐이다. 그런 사람 주위에 사람이 모여드는 것은 이런 거울같이 맑은 마음에 자기들의 참모습을 비추어 보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우선 자신의 마음을 맑게 만들 일이다. 흐르거나, 탁한 물이 아니라 고요하고 맑은 물처럼 마음을 닦으라는 말이다.

그 다음 문단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鑑明則塵垢不止(감명즉진구부지) 止則不明也(지즉불명야) 久與賢人處(구여현인처) 則無過(즉무과)" 거울이 맑음은 먼지가 끼지 않았기 때문이고, 먼지가 끼면 흐려진다고 했네. 또한 어진이와 오래 사귀면 허물이 없어진다고도 했지. 그러니까 거울이 맑으면 먼지가 끼지 않고, 먼지가 끼면 정말로 맑은 거울이 아니다. 현인과 오래 지내면 잘못이 없어진다는 말이다. 거울이 맑으면 먼지가 끼지 않는 것처럼, 마음이 거울같이 맑으면 '나'라는 의식이 끼어 있을 곳이 없는 법이라는 말이다.

반면 '허(虛)'는 노자에게서 배웠다. 비움의 철학자 하면 노자이다. <<도덕경>> 제11장을 소환한다. "서른 개 바퀴살이 한 군데로 모여 바퀴통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가 비어 있음으로 수레의 쓸모가 생겨납니다.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가 비어 있음으로 그릇의 쓸모가 생겨납니다. 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가 비어 있음으로 방의 쓸모가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있음은 이로움을 위한 것이지만 없음(비어 있음)은 쓸모가 생겨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도덕경>> 구절이다. 제16장에 나온다. "완전한 비움에 이르십시오. 참된 고요를 지키십시오, 온갖 것 어울려 생겨날 때 나는 그들의 되돌아감을 눈여겨봅니다”라고 한다. 원문은 이렇다 “致虛極, 守靜篤, 萬物竝作, 吾以觀復(치허극 수정독 만물병작, 오이관복)” 이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비움을 끝까지 하고, 고요한 상태를 돈독하게 하여 지키는 일상을 꾸리라는 말로 읽는다. 도올의 주장처럼,  노자의 허(虛, 비움)는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 찬 '빔'이며, 그의 "정(靜)"은 '동(動)'을 함유한 '정'이기 때문이다. '정지정(靜祉靜)'이 아니라, '동지정(動之靜)'이라는 말이다. 노자의 정은 동의 가능태로서의 정일 뿐이다. 정하지 않고서는 동할 길이 없다는 거다. "유무상생(有無相生)"에서 처럼, '허(빔)와 만(참)', '동(움직임)과 정(고요)'과 같은 모든 개념이 상호 부정의 대자가 아니라, 서로 기다리고 서로를 긍정하는 대자의 관계에 놓여 있다. 기다림, 느낌, 수용과 배제 속에서 생성은 이루어진다. 생성은 곧 창조이며 창조는 새로움의 요소이다. 그래 나는 이 문장을 비워야 채워지고, 고요해야 움직일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한다. 비쁜 날들이 계속되면, 이 문장을 소환하고, 비우고 고요 해지려고 한다. 이젠 문장 구조를 알겠다. '치허'를 지극하게 하고, '수정'을 돈독하게 하라는 것으로 읽는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구절이 "萬物竝作(만물병작) 吾以觀復(오이관복)"이다. 이 말은 '만물이 연이어 생겨나지만 나는 그들이 돌아가는 것을 본다'란 뜻이다. 도올 김용옥 교수는 "만물이 더불어 함께 자라는데, 나는 돌아감을 볼 뿐이다"고 해석한다. 나는 '만물이 다 함께 자라는데, 나는 그것을 통해 되돌아가는 이치로 본다"로 읽고 싶다. 만물이 다 함께 번성하는 모양 속에서 되돌아가는 이치를 본다는 거다.

나는 이 문장을 만날 때마다 "되돌아 감"을 나는 늘 주목한다. 도(道)의 핵심 내용은 반대 방향을 지향하는 운동력, 즉 반(反)이다. 어떤 것도 변화하지 않거나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이 동양철학이고, 이를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 해석한다. 이를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도덕경> 제40장)라 한다. 나는 오늘 아침도 '되돌감'을 되새긴다. 달도 차면 기울고, 낮이 밤이 되고 밤이 낮이 된다. 아주 더운 여름이 되면 다시 추운 겨울로 이동하고, 심지어 온 우주도 팽창과 수축을 반복한다. 이 모든 것은 어느 한 쪽으로 가다가 극에 도달하면 다른 쪽으로 가는 '도'의 원리에 따르는 운동이라는 것이다. 너무 그리워하지 말자. 때는 기다리면 온다.

끝으로 비움을 강조하고 있는 <<도덕경>> 제48장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학문의 길은 하루하루 쌓아가는 것. 도의 길은 하루하루 비워가는 것. 비우고 또 비워 함이 없는 지경[無爲]에 이르십시오. 함이 없는 지경에 이르면 되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원문은 이렇다. '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無爲而無不爲(위학일익, 위도일손. 손지우손, 이지어무위, 무위이무불위)." 여기서도 내가 좋아하는 것이 "덜어내고 덜어내면 무위에 이르고, 무위하면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無爲而無不爲)"는 말이다. 여기서 '무위(無爲)'를 아무 것도 하지 않거나 무슨 일이건 그냥 되어가는 대로 내버려주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노자가 하고 싶었던 말은 '무위'가 아니라 '무불위(無不爲, 되지 않는 일)'라는 효과를 기대하는 거였다. 어쨌든 비우고 덜어내 텅 빈 고요함에 이르면, 늘 물 흐르듯 일상이 자연스러워진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뿐 포장하지 않으며, 순리에 따를 뿐 자기 주관이나 욕심을 고집하지 않는다. 그 결과 그의 모든 행위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항상 자유롭고 여유롭다. 샘이 자꾸 비워야 맑고 깨끗한 물이 샘 솟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만약 비우지 않고, 가득 채우고 있으면 그 샘은 썩어간다. 그러다 결국은 더 이상 맑은 물이 샘솟지 않게 된다.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을 자꾸 비워야 영혼이 맑아진다. 이 모든 일들은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가 말하는 것처럼, 맛있는 빵을 먹으려면 반죽이 발효되는 시간과 오븐에서 빵이 익는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오늘 시를 소개한 김정수 시인은 다음과 같이 덧붙임을 했다. "빵 반죽에는 밀가루, 설탕, 소금, 이스트, 버터, 우유 등이 들어간다. 반죽이 끝나면 발효의 시간이 필요하다. 화자인 ‘나’는 발효해 부풀어 오르는 반죽을 보고는 웃고 울다 “마지막에는 웃게 되어 있다”고 한다. 빵들의 웃음과 울음에 주목한 화자는 ‘웃는 빵’을 먹겠다는 강한 의도를 드러낸다. 맛은 부차적이고, 한 끼를 해결하는 게 우선이다. 빵에 침을 바르는 행위는 내 것이라는, 소유의 의미가 들어 있다. “웃는지 우는지 모”를 만큼 허겁지겁 빵을 먹는다. 허기를 면한 후에야 곁에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빵들이 웃고 있는 건 너무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굶주림 앞에선 그 무엇도 소용없다. “중앙으로 갈라지는 좋은 냄새”는 너와의 관계를 의미한다. 갈라지지만 좋은 냄새가 나니 긍정적이다. 맛있는 빵을 먹으려면 반죽이 발효되는 시간과 오븐에서 빵이 익는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적당한 재료의 배합과 정성, 온도 조절도 중요하다. 조급하면 일을 그르친다. 사람과의 관계도 빵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오늘 아침 사진은, 동네에 있는 <은샘 치아바타>에서 이병승 목사님이 만드시는 바게트이다. 빵이 웃고 있다.

웃고 있는 빵/허주영

빵들은 웃고 있다고 나는 본다

빵들은 웃고 울면서 부풀어지는데
결국 마지막에는 웃게 되어 있다
나는 웃고 있지 않은 빵을 본 적이 없다

나는 그걸 먹겠다
침 바른 빵을 나는 먹는다
내가 웃는지 우는지 모르는데

네게도 한입 내밀고
중앙으로 갈라지는 좋은 냄새

거기서 웃음이 났다

다른 글들은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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