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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파렴치(破廉恥)함이란 모든 것의 가격만 알고, 가치는 조금도 모르는 것이다."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1월 12일)

시위를 떠난 화살을 어찌 잡을 수 있나? 그런데 나는 내 나이의 정체성에서 자주 혼란을 느낀다. 아직 지공거사(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나이)는 아니다. How old is old? 얼마나 늙어야 늙은 걸까? 난 내 머리와 가슴과 다리가 아직 늙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는 날 보고 결코 젊다고 하지 않는다. 유엔이 ‘호모 헌드레드(Homo Hundred)’ 시대를 맞아  제안했던 '새로운 인간 생애주기 연령지표'에 따르면, 난 아직 청년(18~65세)에 속한다. 그 기준을 보면, 중년은 66~79세이고, 80이 넘어야 노년이다.

“네 젊음이 네 노력의 보상이 아니듯, 나의 늙음도 나의 과오에 의한 것이 아니다.” (박범신, <<은교>>)  “나이 든 사람의 비극은 그 사람이 나이가 들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여전히 젊다는 데 있다.”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오스카 와일드가 했던 다음 말이 즉각 소환되었다. "파렴치(破廉恥)함이란 모든 것의 가격만 알고, 가치는 조금도 모르는 것이다."  모두들 '돈 돈' 하며, 자신 가치를 판다. 몇 가지 질들을 해본다.
- “몇 살이세요(How old are you)”라고 묻지 말고 “몇 살로 느끼세요(How old do you feel)”라고 물으면 웃기는 걸까?
- 얼마나 늙어야 진짜로 늙은 걸까?
- 내 나이는 진정한 나를 반영하는 것일까?
- 나는 몇 살로 살아야 하는 걸까?
- 이름과 성별도 바꿀 수 있는 시대인데 스스로 나이를 결정할 권리는 없는 것일까?

오스카 와일드는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예술이 삶을 모방하는 게 아니라, 삶이 예술을 모방한다." 이 문장을 찬찬히 읽어 보니, 예술을 모방하는 자가 삶을 더 풍요롭게 하며 더 잘 살아남는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인문 운동가는 예술을 모방하는 아티스트(예술가 artist)이다. 예술가는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다. 미래는 '지금-여기'에서 내가 원하는 나 자신이 되기 위해 부단히 수련할 때 만들어지는 예술이리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미래는 '지금 이 순간-저기가 아닌 여기'에 몰입해 최선을 다할 때 자연스레 다가오는 신의 선물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 때 내 일상(日常)은, 신의 선물인 예술로 승화된다. ‘예술’에 해당하는 라틴어 단어 ‘아르스(ars)’의 원래 의미가 ‘우주의 질서에 알맞게 만물(萬物)을 정렬시키다'라고 한다. 일상을 지배하며, 몇 가지 삶의 규칙을 가지고 '지금-여기'의 삶을 정돈하는 사람이 예술가이다. 그는 시간 있다고 TV만 보거나 잠을 자지 않는다.  '저 너머'를 꿈꾼다. 생존만을 위한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다.  인문학자와 인문 운동가는 다르다. 인문학자가 과학자라면, 인문 운동가는 공학자이고 기술자이다. 인문학이 이론이라면, 인문 정신은 일상에서 구현되는 행위이다. 예를 들어, 사랑의 중요성을 말하면 인문학자이고, 사랑이라는 말이 생활에서 구현되어 친절하라고 말하는 사람은 인문 운동가이다.

알게 하는 것과 사랑하게 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가령 과학지식을 가르쳐 알게 하는 것은 과학교육이지만, 과학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갖게 하는 것은 문화가 있어야 한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도 인문지식을 배우고 외우는 것이 아니라, 인문정신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갖게 하는 문화가 중요하다. 인문학의 역할은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해지지 말아야 한다는 각성을 요구하는 일이다. 더 나아가 고통받는 타인을 향한 위안과 공감을 불러내, 보이지 않는 연대를 이루는 일이다. 나 자신의 존재만을 위해, 나만 잘 살려고, 내 존재만 풍성하려고, 공부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이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보면,  망한 사람 앞에 두고 망해서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열변을 토하는 감독에게 배우가 말한다. "인간은요. 평생을 망가질 까봐 두려워하면서 살아요. 전 그랬던 것 같아요. 처음엔 감독님이 망해서 정말 좋았는데, 망한 감독님이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더 좋았어요. 망해도 괜찮은 거구나.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망가져도 행복할 수 있구나. 안심이 됐어요…. 전혀 불행해 보이지가 않아요. 절대로. 그래서 좋아요. 날 안심시켜줘서."

사는 것이 고통스러울 때는 나만 힘든 게 아니라, 다 같이 힘든 사람들이 소주를 나눠 마시며 고통을 n 분의 1로 나누다 보면,  우리는 그 세월을 견딘다. 성공은 희귀하고 실패는 흔하다. 망한 사람을 보며 '나만 그런 건 아니구나'라고 안심하는 우리의 마음속에는 여린 아이가 울고 있다. 인간이 위로 받을 때는 나와 같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볼 때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타인의 고통과 비교하며 자신의 '다행'을 인식하는 게 사람이기 때문이다. 혼자 울면 외롭지만 함께 울면 견뎌지는 게 삶이다.

난 이렇게 생각한다. 사랑은 상대방의 웃음 속에서 눈물을 살피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내게 주어진 귀한 시간 안에서 나를 꽃피우는 과정이다. 사랑할 수 없는 곳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 좋다. 더 이상 발전이 없는, 비생산적인 관계, 즉 순수하고 열정적으로 사랑하기가 더 이상은 불가능한 관계가 이루어지는 곳에는 머무를 필요가 없다.  관계를 끝낼 줄 아는 것이 감정적 성숙함이다. 내 행복의 비밀번호는 통장의 계좌번호의 비밀 번호가 아니라, 내 마음 통장 계좌번호를 여는 비밀번호이다. 행복의 열쇠는 금고를 여는 구멍과 맞지 않고, 마음을 여는 구멍과 맞다.

모든 삶은 풀어야 할 숙제를 안고 태어난다. 그 삶의 숙제를 잘 하려면 우선 다음 두 개의 힘을 기르고, 그 힘으로 일상을 영위하면 된다. 삶에 필요한 단 두 가지의 능력, 더 나아가 온전한 삶을 사는 데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 능력만 갖추면 족하다. (1) "제 스스로 삶을 감당할 수 있는 힘"  (2)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갈 힘".

우리는 살면서, 자신의 일에 집중하고 몰입하며 몰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영혼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 류시화 시인은 "당신도 누군가를 꽃피어 나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류 시인의 에세이에서 읽은 거다. "우리의 임무는 세상 전체를 한꺼번에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손이 닿을 수 있는 부분부터 손을 뻗어 나가는 것이다. 한 영혼이 슬퍼하는 다른 영혼을 돕기 위해 하는 작고 조용한 일은 큰 의미를 가는다."(크라리사 핑콜라 에스테스)

한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환영받는다고 느끼고, 자신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 준다고 느끼고, 지지 받는다고 느끼게 하는 것만큼 위대한 일은 없다. 친절은 상담 료를 받지 않는 심리 치료이다. 그러니 우리는 한 인간 영혼을 대할 때 따뜻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모든 상실감은 여러 형태로 다가오는 사람에 의해 회복된다. 불완전한 인간을 완전하게 만드는 것이 사랑이다. 그 사랑은 친절로 드러난다.

우리의 삶은 자신의 세계를 넓혀준 사람을 몇 번이나 만났는가에 따라 방향이 정해진다. 마음을 당 버리고 싶을 정도로 불안한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인간이는 존재의 의미는 관계에서 찾아진다. 류시화 시인의 말이다.  그리고 류 시인은 삶을 꽃 피우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스스로 꽃을 피우는 일이고, 또 하나는 다른 사람이 꽃피어 나도록 돕는 일이다.

사람은 사랑한만큼 산다/박용재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저 향기로운 꽃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저 아름다운 목소리의 새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숲을 온통 싱그러움으로 만드는 나무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이글거리는 붉은 태양을 사랑한 만큼 산다
밤하늘의 별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홀로 저문 길을 아스라이 걸어가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나그네를 사랑한 만큼 산다
예기치 않은 운명에 몸부림치는 생애를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그 무언가를 사랑한 부피와 넓이와 깊이만큼 산다
그만큼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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