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서울 시청 앞에 도로변 시국미사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낸 성명서를 공유한다. 기존 메거시 미디어들이 입을 다물기에 공유한다. 끝까지 읽고, "깨시민"이 되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공유한다.
14일 월요 시국 기도회 성명서
이것이 인간인가? ‘법과 원칙’을 더럽히는 자가 “법과 원칙”을 떠들 때,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물어뜯는 괴물을 보았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신앙이 중요하다.”(갈라 5,6)
1. 고달픈 여름
폭염경보가 울려도 하던 일을 차마 멈추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푹푹 찌는 논밭에서 진땀 흘리는 농부, 세상의 삼시 세끼를 짓느라 뜨거운 불을 지켜야 하는 살림꾼들, 땡볕 아래서 집 짓는 건설 노동자들과 밤늦도록 이고 지고 나르느라 고달픈 택배 노동자들, 사람들 모르게 사람들이 쏟아낸 쓰레기를 치워주는 청소 노동자들. 어디 그들뿐이랴. 궂은일이라고 해서 마다않는 저 엄숙한 수고와 헌신 덕분에 지글거리는 대지 위에서 우리는 가을에 거둘 열매들을 키우고 있다. 아무도 혼자 힘으로 살지 못한다.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상호부조 덕분에 인생의 멍에는 편하고 짐은 가볍다.
그런데 혈세의 집행자인 대통령직에 앉아있는 윤석열은 사람의 슬픔과 고뇌를 나누는가? “퇴진하라”는 구호가 “탄핵하라”로 바뀌는 동안에도 그는 고운 손에 흙먼지 하나 묻히지 않는 백수白手,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불한당(不漢黨)에 지나지 않았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물난리가 나서 여럿이 떼죽음을 당했지만 “지금 가봤자 특별하게 뭐가 바뀔 수 있겠냐”며 태연했다. 그는 자신이 꿈꾸는 나라는 어떤 세상인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최고 권력을 바랐는지 말한 적이 없다. “저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은 이 말에 감동한 나머지 검찰총장에 이어 대통령 자리에도 올려주었으나 섣부른 선택이었다.
사람이 사람 아니면 무엇에 충성하겠다는 것인지 물었어야 했다. 그는 5년간 5천만을 지키고 모시고 살리는 데 복무하는 신성한 기회를 탕진하고 있다.
2. 욕심 내고 성내는 어리석음
그가 나타나는 자리마다 저만 알고 저만 위하는 각자위심(各自爲心)의 탁하고 역한 기운이 깔린다. 오늘 이 나라 곳곳에 번지고 있는 불행과 비극은 생명의 일체성, 만물의 유기적 연관성을 모른 채 “나는 나, 내 맘대로, 내 뜻대로” 하고 돌아다니는 윤석열의 미숙한 인격에서 비롯한다.
사람들이 물에 떠내려가든 말든 호화쇼핑을 즐기고,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말든 노선을 변경해서 사익을 챙기는 탐심(貪心). 거슬린다 싶으면 벌컥 화부터 내고 파렴치의 범법자로 몰아 잔인하게 짓밟아 버리는 진심(嗔心). 역겨운 짓을 저질러 놓고도 얼굴조차 붉힐 줄 모르는 마비된 양심, 치심(痴心). 그의 세 가지 독한 마음이 하늘과 땅, 사람을 어지럽히고 더럽히고 괴롭히고 있다. 하느님 모상으로 태어났으면서 그 영광을 빛내지 못하는 그가 딱하고, 못난 사람 하나를 어쩌지 못해서 질질 끌려 다니는 우리 신세가 불쌍하다. 무엇보다 무섭고 두렵다. 사람들이 허약한 순서대로 쓸려가는 게 무섭고, 내년 봄에는 뿌릴 종자가 있기나 할지 그게 두렵다.
3. 너와 나에게 달렸다
죽음이 한 사람을 통하여 왔고, 생명도 한 사람을 통해서 왔다(1코린 15,21)는 말씀은 참으로 옳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다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살게 됐다는 이치를 믿는다.
윤석열 ‘하나’ 때문에 이 지경이 됐다면, 마찬가지로 너와 나 ‘하나’로 말미암아 새로워질 수 있다. 너와 내가 사람의 도리를 외면하지 않는 한 바닥을 치고 도약할 기회는 남아있다.
여기서 물러서면 그것으로 끝이다. 문재인이라는 ‘하나’가 촛불혁명이 맡긴 역사적 책무를 팽개치는 바람에 청산됐어야 하는 적폐보다 더 지독한 적폐가 닥쳤음은 모두가 아는 바다.
더 이상 너와 나 말고 어떤 하나에게 믿고 맡기는 일은 없기로 하자. 민주주의의 함정이 거기에 있다. 울고불고 매달리며 하느님을 부려먹는 고약한 짓도 그만 두기로 하자. 신앙의 모순도 거기에 있다. 하느님이 바라시는 바는 우리가 역사의 주인이 되어 스스로 구하고, 찾고, 두드려서 이룰 것을 마침내 이루는 것이다.
시시각각으로 재난이 몰려드는 이때 너와 내가 서둘러야 할 일이 있다.
강자들이 쌓아 놓은 바벨탑의 악랄한 구조를 정확하게 깨닫고(覺), 그 밑바닥에 깔려 신음하는 이웃들의 현실을 함께 아파하면서(痛), 기존의 제도에서 자기 몫을 찾아보겠다는 착각을 완전히 끊어내는(斷) 것이다.
우리가 먼저 깨우치고 끊으면 다른 사람들도 뒤따를 것이다. 곤이지지(困而知之), 곤란을 겪고도 그 이유와 이치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어디에 쓰겠는가?
하느님은 ‘야훼의 종’처럼 고난을 통하여 악을 악으로 직시하고 새날을 위해 아우성치는 사람을 기다리신다.
무너지는 한국을 바라보면서 벗이여, 무엇을 생각하는가? 콩 한 톨이라도 고루 나눠 먹는 ‘노나메기’, ‘고루살이’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 해질 무렵 모든 일꾼이 똑같이 하루 품삯을 받고 집으로 향하게 만들던 이상한 계산(마태 20, 1-16), 곧 기본소득 이야말로 오늘과 내일을 위한 가장 이성적이고 이상적인 해법이다.
4. 지렁이들조차 울부짖는다
꽃샘추위가 채 가시지 않았던 삼월에 시작한 월요시국기도회가 팔월의 폭염 속에서 오늘 폐막한다. 전국 14개 교구에서 총 16회에 걸쳐 진행된 기도회는 약자들의 원성이었으며 땅속 지렁이들의 울부짖음이나 다름없었다.
장기집권을 추구한 독재자 이승만, 박정희였지만 안보국가, 발전국가라는 목표를 위해 나름 애를 썼다. 시민을 학살해서 집권에 성공한 전두환, 노태우도 경제성장이나 북방외교라는 성과를 원했다. 이명박, 박근혜처럼 엉성하고 이기적인 지도자들도 때로는 청와대 뒷산에 올라가 시민들의 함성에 귀 기울이거나 종종 시늉 일망정 대국민담화와 함께 머리를 숙였다. 그런데 탐욕과 포악, 몰염치 말고 윤석열의 미덕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가 “국민 안전을 도외시한 이권 카르텔은 반드시 깨부수어야 한다”고 호통치던 날 사제들은, 순박한 노동자들을 조직폭력배로 몰고, 요즘 방송 장악을 위해 쾅쾅 주먹을 내리치는 난폭한 내면을 들여다보았다. 이태원에서 수백 청년들이 길바닥에 깔려 죽어도, 오송에서 수십 시민들이 물에 잠겨 죽어갈 때도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던 비정이 떠올라 소름 돋았다.
미국 일본 앞에서는 비굴한 웃음을 지어 보이고 저 자신과 강자의 이익을 위해서 ‘법과 원칙’을 더럽히는 자가 그런 소리를 할 때,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물어뜯는 괴물을 보았다.
천사보다 존귀할 수 있지만 짐승만도 못할 수 있는 게 사람임을 명심하라. 사람 다움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사람들의 목숨과 운명을 맡길 수 있으랴. 이성과 신앙, 무엇보다 사랑의 명령이다. 윤석열은 퇴진하라! 윤석열을 탄핵하라!
월요시국기도회를 개막하던 날, 사제들의 호소는 “곤경을 위한 곤경은 없다”는 말로 시작되었다. “뽑고 허물고 없애고 부수며 세우고 심는”(예레 1,10) 하느님의 뜻을 받드는 데 어찌 어려움이 없으리오. 하지만 치울 것을 치우고, 세울 것을 세우기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새날을 맞을 수 있다. 머 잖아 여름은 가고 돈의(敦義)의 계절, 가을이 온다. 기운이 솟는다.
2023년 8월 14일
친일매국 검찰독재 윤석열 퇴진, 주권회복을 위한 월요시국기도회를 마치면서
광복절 전야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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