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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정치 : 2021년 2월 4일: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읽고: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다. (2)

1528.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어제에 이어, (사단법인)<새말/새몸짓(이사장 최진석)>의 "책 읽고 건너 가기" 12월의 책으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이야기를 이어간다. 사람들은 자기 생각과 다른 정치 이야기를 하면, 무조건 읽지 않고, 무시한다. 그래 오늘 아침은 정치는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정자정야(政者正也)", 즉 정치는 '바로잡는' 일이다. "자기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만들어 퍼뜨리고 거짓말이라는 게 밝혀졌는데도 사과조차 하지 않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사기이다. 사기를 법으로 다스리는 게 정치이다. 요즈음엔 사기가 정치인 줄 아는 '정치인'과 사기가 언론인 줄 아는 '언론인'이 너무 많다."(역사학자 전우용) 정치는 우리의 삶에 대단한 영향을 끼친다. 정치는 우리들에게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정해준다. 신체를 구속할 수도 있으며, 돈도 걷어가며, 군대로 데려가기도 한다. 정치는 우리들의 '정신 세계'도 지배한다. 정치에 아무리 냉소적일지라도 정치는 우리들의 삶으로부터 단 1cm도 떨어지지 않는다. 원하지 않더라도 정치는 우리의 삶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며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는 사회에 대한 철학, 의지, 전문성이 없으면 해서는 안된다. 정치는 고도로 훈련된 전문가의 영역이다.

 

이런 문제를 최진석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칼 야스퍼스는 지구상의 기원전 8세기부터 2세기 정도 사이를 기축시대(機軸時代, Axial Age)로 규정했다. 이 말은 인류 문명의 기본이 형성된 시대라는 뜻이다. 세계를 보는 기본 시각이 형성된 것이다. 이 말은 철학의 시작이란 말도 된다. 왜냐하면 문명에서의 주도권을 신으로부터 인간이 뺏아왔다는 뜻이다. 인간은 이제 신에 대한 믿음 대신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신에 대한 믿음으로 인간의 품격을 정하던 시대에 인간은 신에게 맹목적으로 복종만 하면 되었기 때문에 용맹함이 가장 중요했다. 즉 육체적 힘이 중요했다. 돌도끼 잘 던지고 주먹 센 사람이 지배적 위치를 점했다.

 

인간이 신으로부터 주도권을 뺐은 후, 신의 지배력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고, 생각하는 능력으로 역사의 책임자로 등장함에 따라 인간에게 힘이 되는 것은 주먹이 아니라, 말이 되었다. 즉 육체적 힘보다 머리의 힘이 중요했다. 따라서 이젠 생각에서 나오는 말이 중요했다. 이젠 말을 잘 사용하는 사람, 즉 대화를 잘하는 사람이 그 설득력의 수준에 따라 지배적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말 잘하는 사람을 웅변가(rector)라 했는데, 사실은 정치가이다. 이처럼 철학과 정치는 같은 시기에 함께 등장했다.

 

철학은 지적으로 높은 차원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면서 문제 해결을 논한다. 지성적으로 한다. 반면 정치는 구체적인 차원에서 구체적인 방식의 문제 해결에 더 집중한다. 둘 다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지적 방식이라는 점에서 둘 다 똑같다. 그러나 정치의 구체성과 철학의 추상성의 활동 능력이 잘 조화를 이루어야 문제가 훨씬 더 효과적으로 해결되고, 사회는 건강성과 진보성을 보장받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치가 철학의 인도를 받지 못하면 기능에 빠진다는 점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정치공학적 차원의 정치를 넘지 못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천한 공작적 행위에 공학을 부치지 말자는 주장도 있다. 철학이 있는 공학과 철학 없는 공학을 나눈다면 그 말을 난 받아들인다. 나는 철학의 인도를 받지 못한 공학은 진정한 공학이 아니라고 본다. 여기서 말하는 정치 공학 개념은 정치 행위자들이 정치 권력을 잡고 또 그것을 지키는 방법에만 관심을 두지, 삶의 문제를 해결하여 사회를 진보 시키는 데에는 별로 관심을 주지 않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이야기가 점점 무거워진다. 그러나 지성을 발휘해 잘 이해를 해야 한다. 이 이야기는 내일 이야기 한다. 오늘은 예쁜 우리말을 소개해 준 이미향 영남대 교수의 글의 일부를 공유한다. "2021년, 선물과 같은 시간에서 한 달이 지났다. 새초롬한 초승달이 보름달로 가득 찼다가 그믐달로 스러지는 동안이 한 달이니, 한 달은 달(月)의 생애다. 음력 첫 달은 정월이다. ‘정월이 크면 이월이 작다’는 말은 좋은 일 다음에는 나쁜 일도 있다는 통찰과 같다. ‘이월에 김칫독 터진다’는 말처럼, 이월 추위는 여전히 만만치 않다. ‘열매 될 꽃은 첫 삼월부터 안다’는 삼월 꽃봉오리를 기대하게 하고, ‘사월 없는 곳에 가서 살면 좋겠다’는 말처럼 사월은 보릿고개의 고달픔을 담는다. ‘유월 장마에 돌도 큰다’라 하니, ‘오월 농부 팔월 신선’과 같이 여름내 수고하며 보람을 기다린다. 그렇게 ‘동짓달’ 기나긴 밤을 지나 마지막 ‘섣달’에 이른다. 영어에서 달 이름은 신이나 역사적 인물을 기린다. June(6월)은 결혼의 신 유노, July(7월)은 율리우스 시저, August(8월)는 아우구스투스가 어원이라고 한다. 그런데 한국말에서 달의 이름은 그저 이 땅의 삶이다." 달(음력)과 함께 하는 예쁜 순 우리말의 '월(月) 이름'을 공유한다.

  • 1: 해오름달,
  • 2: 시샘달,
  • 3: 물오름달,
  • 4: 잎새달,
  • 5: 푸른달,
  • 6: 누리달,
  • 7: 견우직녀달,
  • 8: 타오름달,
  • 9: 열매달,
  • 10: 하늘연달,
  • 11: 미틈달,
  • 12: 매듭달

 

이 이름들 속에는 온갖 풍경화며 동화와 동요가 녹아 있다. 그냥 아라비아 숫자로 1월, 2월 하면, 너무 건조하다. 감옥에서나 이름 대신 사람을 숫자로 부른다. 그런데 최근에 방송의 한 프로에서 무명가수라고 그들을 숫자로 부르는 것이 불쾌했다. 2월달인 시샘달은 여전히 김장독이 터질 정도의 추위로 봄을 경계한다. 그러나 아무리 샘을 내도, 물오름달이 올 것을 시샘달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나는 2월이 좋다. 그 이유는 오늘 아침 고유하는 시가 말한다.

 

 

2월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희숙

 

2월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별이 서툰 자를 위해

조금만 더 라는 미련을 허락하기 때문이고

미처 사랑할 준비가 되지 않은 이에게는

아직은 이라는 희망을 허락하기 때문이고

갓 사랑을 시작한 이들에게는

그리운 너에게로 거침없이 달려가는

따스한 가슴을 허락하기 때문이다

 

 

다시 무거운 오늘의 주제로 되돌아 온다. 다음 말을 잘 읽어 보자. '올바를 조율'이라는 정치(政治)의 바른 지향이 없으면, 무색 무취한 '공학'은 언제나 사악한 모습으로 변할 수 있다. 여기서 무색 무취는 삶의 문제를 해결하여 사회 문제를 진전시키려는 인문정신의 부재를 말한다. 일상의 삶이나 사회의 진보와 유리된 공학은 성장과 효율만을 따진다. 올바른 조율의 시작은 언제나 내 마음을 먼저 열어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고 반응한다는 '소통'을 통한 중정(中正)을 추구하는 것이다. 좀 소극적이다. 공감을 통해 이해로 그치지 않고 새로운 것이 나오도록 하는 실천이 이어져야 한다. 그냥 조율하는 것은 절충이다. 서로 실천과정 속에서 충돌을 통해 새로운 것이 등장하도록 해야 한다. 거기서 나오는 것이 '중정'이다. 중정은 말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공학을 영어로 하면 공학은 엔지니어링(enginering)이다, 사전적 정의를 보면, "공업적인 생산에 응용하여, 생산력과 생산품의 성능을 향상, 발전 시키기 위한 과학 기술의 체계적인 학문"이다. 분명히 학문이다. 그러나 응용이 들어가고, 향상과 발전을 지향한다. 공학은 무언가를 만드는 일이다. 기술자(테크니션)처럼 그냥 주어진 제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공학도(엔지니어)는 과학적, 경제적, 사회적 원리와 실용적 지식을 활용하여 새로운 제품, 도구 등을 만드는 것 또는 만드는 것에 관한 학문이다. 공학과 과학은 서로 뗄 수 없는 분야이다. 왜냐하면 공학적 도구 없이 자연과학은 엄밀한 실험을 진행 할 수 없으며, 자연과학의 이론적 기반 없이는 공학은 논리 전개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논리 전개를 하는 과정에서 인간에 대한 이해를 더 잘하면, 즉 인문과학의 이론의 기반이 있다면, 삶과 세계의 진보를 위한, 생태학적이고, 더 인간적인 제품이나 도구들이 나올 것이라 믿는다. 공학은 융합 학문이다. 분명 세상을 바꾸고 미래를 창조할 수 있는 학문이다.

 

카이스트 교수들은 공학을 '기술적인 문제'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으로 문제를 발견하고 이에 대한 기술적 해결책을 제시하는 학문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기술적인 문제란 고장이나 오류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불편함 까지도 포함된다. 예를 들어 교통체증, 지구 온난화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는 넓다. 이러한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인류의 실생활을 모두에게 이롭게 바꾸어 주는 학문이 공학이다.

 

그런데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문제 해결을 한다면, 공학보단 공작(工作)이 어울린다. 그래 정치 공학하면, 공작 냄새가 난다 우리 정치는 정치공작이 대부분을 차지함으로써 지금은 정치가 사라졌다. 정치라는 말 그대로 '올바른 조율'보다는 권력을 잡고 유지하는 데에 사회를 분열시키는 것이 더 유리하다면 차라리 분열을 하나의 방법으로 채택한다. 철학적으로는 사회통합이 정치의 이상인데 말이다. 그리고 권력 유지에 필요하다면, 불필요하거나 타당치 않은 토목 공사를 감행하기도 한다. 정치 공작에 익숙한 정치인들은 철학적 문제 제기를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자의 헛소리라고 치부한다. 정치가 철학적 인도를 받아 정치 행위가 더 효율적인 방식으로 나아가야 하는 데 말이다.

 

정치가 정치공학적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말은 의식의 틀이 정치화되어 있거나 도덕적 판단에 익숙해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정치화는 진영에 갇혀 있거나 정치 공작의 습관에 젖어 있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되면 대상을 자세하게 알려고 하기 보다는 마음에 드는지 안 드는지 혹은 내 편인지 남의 편인지를 가장 먼저 따진다. 정치가 정치공작적 수준에 머물러 있으면 지적 확장이나 포용, 통합, 진보 등은 불가능하다. 지적 사유보다는 감정적 믿음에 빠진 것이다. 지성이 부족한 것이다. 감각만 사용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