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7.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검은 셔츠에 총을 든 사진을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올린 미스 미얀마 출신의 타 텟 텟 씨. 구글에서 캡처
어제부터 생각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다. 인터넷에서 오늘 아침 사진을 만나고서부터 이다. 이 사진을 본 것은 부산일보 김은영 논설위원의 글이었다. 그녀가 라디오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했다. 나는 듣지 못했다. 그녀는 왜 총을 들었을까. 그만큼 절박했던 것 같다. 그녀는 “더 선택할 여지가 없었다"고 한다. 그녀의 말을 직접 들어 본다.
“혼자서 이기적으로 생각하고 집에만 있다면 언제든 우리 집에 군부가 쳐들어와서 체포할 수 있기 때문에 혁명의 길로 들어가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해 결정을 내렸다." 무섭고 두려운 마음이 왜 없었겠는가? 그리고 그녀는 합법적이지도 않고, 정의롭지 않은 군부 행위에 대해 저항하는 게 “국민의 의미"라고 힘주어 말했다.
반복적으로 "생각한다"라는 말이 등장한다. 나는 왜 그녀에게 그런 연대 의식을 가지게 되었까를 생각해 보았다. 그녀는 2013년 미스 그랜드인터내셔널 대회에서 미얀마 대표로 참여했던 타 텟 텟(Htar Htat Htat)이다. 그녀의 인터뷰에서 내가 감동한 지점은 ‘생각을 멈추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생각하며 산다는 것은 그만큼 고민한다는 의미일 테이고, 결과까지 책임지는 행동으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금의 미얀마처럼 목숨까지 위태로울 수 있는 상황에서 내린 결정이라 더 존경심이 들었다."(김은영)
나 또한 생각을 하며 사는지 쑥스럽다. 생각은 하는 데, 생각을 멈추지 않으려고 하는지, 생각을 하고 선택하여 행동으로 옮기는지,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까지 책임지는 행동을 하는지, 미스 미얀마 타 텟텟에게 창피하다.
김은영 논설위원은 내가 아직 보지 못한 영화를 하나 소개했다. 지난 12일 개봉한 영화 <아들의 이름으로>(감독 이정국)에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나온다고 한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행동하는지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 말이다. 그 영화의 주인공은 5·18의 가해자이자 피해자였던 계엄군 출신 대리기사 ‘오채근’(안성기 분)인데, 1980년 5월의 광주, 그때 그곳에서 채근은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거리에 나온 시민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고 한다. 심지어 교련복을 입은 고교생을 총으로 쏜 뒤 암매장했다 한다. 그런 채근은 그때를 잊지 못하고 괴로워하며 살지만, 모든 사람이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그때의 책임자 중 한 사람인 ‘왕년의 투 스타’ 박 회장, ‘박기준’(박근형)은 지금도 호의 호식하며 떵떵거리며 산다. 채근이 박 회장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편히 잘살 수 있었는지…” 박 회장은 말한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그때 일은 다 역사가 평가해 줄 거야”라고.
생각 없이 사는 것이 악을 키우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 상황인가? 가치가 능멸 당하는 시대, 윤리가 묵살되는 시대, 사유의 깊이가 조롱 당하는 시대이다. 이를 막아야 한다. 그리고 잘 보아야 한다. 반이성적 욕망을 부추겨 대중의 구호로 삼는 자, 촛불혁명 이후 민주주의를 독재로, 개혁을 권력투쟁으로, 혁명을 탐욕으로 몰고 있는 자들이 곧 파시스트이다. 이들은 이미 우리 안에 와 있고 호각을 불 때만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지금 생각을 많이 해야 한다. 이 파시스트 세력들은 대중의 욕망을 정치적 기반으로 삼아 대중을 결국 비참하게 만들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사유의 힘'이 필요한 때이다. 속아서는 안 된다. 파시즘이 우리 안에 왔다. 빈이성적 욕망을 부추겨 대중의 구호로 삼는 자가 우리 사회에 지금 가득하다. 특히 청와대만 공격해대는 이들의 안중에는 권력쟁취의 탐욕이 있을 뿐, 정책과 민초는 실종되었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처럼, "어떤 것 알려면", "정말로 그것을 알고자 한다면", "오랫동안 바라보고", 생각을 해야 한다. 그리고 책을 읽고, 세상을 관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 깊게 생각하며 살지 않게 된다. 그런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살지 못하고, 사는 대로 생각한다. 상상력은 '택도' 없다. 어떤 사안에 대해 손익을 잘 '계산하고', 이해관계와 감정에 따라 '의심'은 할지 언정, 근본의 이치를 헤아리고, 삶의 방향을 세우는 '사유'는 하지 않고 살아간다. 책이나 글을 읽지 않고 자신도 모르게 몸과 마음에 밴 편견과 습관에 안주하다 보면, 우리는 자신에게 익숙한 종교나 이데올로기 그리고 물질적 욕망에 맹목적으로 매달리며 매일 매일을 연명할 뿐이다.
어떤 것을 알려면/존 모피트
어떤 것을 볼 때
정말로 그것을 알고자 한다면
오랫동안 바라봐야 한다
초록을 바라보면서
숲의 봄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자신이 보고 있는 그것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땅 위를 기어가는 검은 줄기와
꽁지깃 같은 양치식물의 잎이 되어야 하고
그 잎들 사이의 작은 고요속으로
들어가야한다.
시간을 충분히 갖고 그 잎들에서
흘러나오는 평화와
만날 수 있어야 한다.
부산일보 김은영 논설위원은 한나 아렌트의 유명한 표현인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에 대해 이어 말하였다. “생각 없음이 결과적으로 악의 진부함을 낳는다”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무엇이 다를까? 유럽 전역에서 유대인들을 강제수용소로 이주시킨 나치 친위대 중령 아돌프 아이히만은 결코 괴물이나 악마가 아니었다. 지극히 평범하고 심지어 모범적이기까지 한 시민이었지만,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악을 저질렀다. 아무 생각 없이 상관의 혹은 상부의 지시나 명령을 무조건 충실히 이행했다고 악의 행위가 정당화될 수 없다. 만약 그 지시가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이고 비인간적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문제는 나치 정권이 몰락하고 전체주의가 끝난 것처럼 보이는 이 시대에도 아렌트의 섬뜩한 경고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이다." 김은영 논설위원의 주장에 나도 동의한다. "[우리는] 빠르게 변화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의 삶과 공동체,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관해 충분히 사유하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너무 바빠서, 혹은 문제가 복잡해서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습관적으로 살고 있지는 않은지 때때로 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를 잃어버리기에 십상이다. 늦었지만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 또 다른 아이히만이 되지 않으려면 결코 생각을 멈춰선 안 된다고 강조한 아렌트의 말을 다시금 가슴에 새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 문장과 함께 서양은 근대(모던, Morden)가 시작되었다. '생각하는 나'는 진리를 체현(體現)하고, 그 진리의 실현을 위해 꾸준히 나아간다. 생각하기 때문에 인간이고, 이 합리적인 생각이 인류를 자유롭게 한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인간 존재의 전제는 '주체적으로 생각하는 나'에 있다. 그런데, 내가 생각 하는 능동적인 주체가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생각 당하는 존재라면 어떻게 되는가?
미셸 푸코부터 문제를 삼다가, 포스트모던이즘은 생각하는 인간이 이성을 통해 근본적인 진리에 도달했고, 이 진리를 기반으로 상식을 만들었다는 주장을 의심한다. 포스트모던이즘은 "권력은 생각한다. 고로 나는 생각 당한다"고 말한다. 여기서부터 '힐링 인문학'이 아니라, '필링(peeling) 인문학'이 시작된다. '필링 인문학'은 생각을 지배하는 모든 권력, 구조, 자본주의의 관계를 문제 삼아 내가 진짜 생각하는 지를 성찰하는 것이다. '필링의 인문학'은 실존적 나가 생각 당하는 나인지 모른다고 의심하고, '성찰하는 나'가 '필링하는 나'라고 주장한다. '필링 인문학'은 나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생각하는 나인가, 생각 당하는 나인가, 이 질문을 하면서 내 생각의 제작자를 찾아내 맞서자는 것이다.
사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을 때, '생각하는 것'은 "방법적 회의"로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의심해 보라는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방법적 회의"란 무조건 의심하라는 말이 아니라, 진리를 찾기 위한 수단으로 서의 회의를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볼테르는 "의심하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확신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다"고 말했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확신을 가지고 시작하는 사람은 회의로 끝나고, 기꺼이 의심하면서 시작하는 사람은 확신을 가지고 끝나게 된다"고 말했다. 자기 힘과 전략을 완전히 확신할 때는 오만함 때문에 눈이 멀게 된다. 내가 아는 것에 대한 확신을 숙고하고 늘 회의하고 의심해 보는 것이 생각하는 일이다.
에셋 플러스 회장, 강방천이 늘 직원들에게 한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청언>이라는 분의 블로그에서 만났다. "사실을 알라. 그리고 남들과 달리 그 사실을 해석하라. 그리고 진보를 위한 의심을 하라." 이게 생각하는 한 가지 방법이고,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생각의 힘이 생길 것이다. 우선 사실을 알아 보아야 한다. 그래 관찰하는 고독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의심해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실이 독이 될 수도 있다. 의심하고, 의심하고, 또 의심하고 그래서 충돌 시키고 그래야 자기 것이 된다. 이때 의심은 중요한 나침반이 될 수 있다.
확신은 오만을 낳고, 그 오만은 우리의 눈을 멀게 한다. 사람은 오만에 빠지면 눈이 먼다. 두 눈을 부릅뜨고 직시해야 할 현실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고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자기 앞에 다가오는 위험을 감지하지 못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이 있어야 할 시간과 장소를 헤아려 아는 사람이다. 반면 오만에 빠진 사람은 장님이 되고, 그 뒤에 찾아오는 불행을 만나게 된다. 그것을 그리스어로는 '네메시스'라고 부른다. 이 말은 '복수'라고 번역되는데, '내가 당연히 감수해야 할 그 어떤 것을 받는 것'이란 뜻이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서 보실 수 있다.
원래 태어날 때 사람은 생각이 없다. 살아가면서 사회 체제나 구조 등에 의해 생각을 갖게 된다. 그래 그냥 있으면 내 생각이 진짜 내가 한 생각인가? 그 생각이 진리에 가까운가? 잘 모른다. 그래서 데카르트가 말하는 '생각하다'는 내 생각을 '의심하다' 아니 '회의하다'로 읽어야 한다. 고집스럽게 갖고 있는 내 생각을 부정해보아야 한다.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자신이 창조한 것이 아니고 '사회화 과정'을 통해서 형성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주관성이 개입할 수 없는 객관적인 진리 속에서 정답을 찾는 자연과학적 사유와는 달리 인문학적 사유는 정답이 없는 주관성이 개입된다. 예컨대, 사형제 폐지에 대한 생각의 경우 정답이 없다. 다만 이에 대한 각자의 견해가 있고, 우리는 그 견해가 풍요로운지, 나름대로 정교한 논리와 증거를 가지고 있는지를 따진다. 왜냐하면 풍요로운 사유와 정교한 논거를 갖춘 내 생각을 가져야 내 삶을 주체적으로, 내 삶을 내가 주인공으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내가 택한 방식은 글쓰기와 토론이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안 되는 것은 일제 식민지 교육 문법을 아직도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린 학교에서 주입식 암기 교육을 받았고, 그 방식은 아직도 그렇게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홍세화의 강의를 듣고 받아 적어 둔 것이다.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생각은 가정과 학교에서 구축됐다. 문제는 두 곳 모두 ‘생각하다’라는 과정이 없다는 것이다. 유대인 부모와 한국 부모를 비교하면 더욱 명확하다. 유대인들은 부모가 자녀에게 묻는다. “네 생각이 뭐니?” 자녀는 어렸을 때부터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정반대다. 부모가 자녀에게 생각하기를 이끌기는커녕 자녀의 “왜”라는 질문에 대답도 잘 안 해준다.
유럽의 한 아동학자는 아이의 의식세계를 연구하기로 했다. 말을 하기 시작하는 생후 18개월 안팎 아이 말을 36개월까지 녹취했다. 실험 결과, 유럽 아이들이 가장 많이 사용한 말은 ‘엄마(마마)’와 ‘왜’(질문)이다. 아이는 생각하는 존재이기에 만사가 궁금해 물어보는 것이고 엄마가 대답하면 또 다른 ‘왜’가 계속 이어진다.
한국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올 수 있을까? 홍 대표는 힘들 거라고 말했다. 바쁜 부모들은 ‘왜’라는 질문에 성실히 대답해주지 않는다. 질문은 또 다른 질문을 낳기 때문이다. 이는 토론문화, 합리성이 자리 잡는 데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홍 대표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성 등 한국 사회의 많은 문제가 ‘왜’라는 질문이 사라진 데서 시작한다고 설명했다. 인신공격적 인터넷 댓글도 마찬가지다. 차 사고가 났을 때 왜 부딪혔는지 따지기 전에 상대방 나이를 따져 묻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생각이 비뚤어지면, 창피한 줄도 모르고, 쉽게 말하고 행동한다. 모과나무처럼, 심사가 뒤틀렸으면, 모과 꽃 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이목을 끌지 않고 조용히 있었으면 한다. 아니면 지적으로 부지런한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다른 사람이 해 놓은 생각의 결과들을 수용하고, 해석하고 확대하면서 자기 삶을 꾸리는 사람은 지적으로 게으른 사람이다. 지적 '부지런함'이란 단독자로 자신의 개성을 유지하고 독립적인 삶을 사는 것으로 '따라하기'의 '편안함'과 '안전함'에 빠지지 않고, 다가오는 불안과 고뇌를 감당하며 풀릴 길이 보이지 않는 문제를 붙들고 계속 파고 들어가 가능해지도록 '틈'을 벌리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대답에만 빠지지 말고, 질문하는 사람이 지적으로 부지런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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