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6.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1984>로 잘 알려진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만큼 권력의 속성을 설득력 있게 묘사한 작품은 없다. '모든 권력은 부패하기 쉽고,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오웰의 다른 작품들도 개인의 성스러운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힘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 인문학의 정의 중 하나가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권위에 대한 저항'이다. 전체주의가 아니라도 자본주의와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이 책은 (사단법인)<새말새몸짓(이사장 최진석)>의 "책 읽고 건너 가기" 12월의 책이었다. 지난 1월은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였고, 2월의 책은 이솝(Aesop)의 <이솝우화>이다. 이번 기회에 발췌본이 아니라, <이솝우화전집>을 읽자고 한다. 나도 이번 기회에 2500년전 그리스인들의 지혜를 이야기를 통해 얻고 싶다. 그래 빨리 지난 두 권의 책 에 대한 리-라이팅을 할 생각이다.
오늘부터는 우선 <동물농장>을 세 번에 나누어서 리-라이팅해 본다. 그리고 설 명정을 끝나고 <걸리버 여행기> 이야기를 한다. 설 연휴 기간 동안은 <이솝우화 전집>을 꼼꼼하게 읽을 생각이다. 최진석 교수는 "독서는 정보 수집이 아니라 수련"이라고 말하면서, (사단법인) <새말/새몸짓(이사장 최진석)>의 "책 읽고 건너 가기" 2월 책으로 <이솝우화 전집>을 선택한 이유를 다음과 같은 취지 문장으로 발표했. 설 연휴 동안 <이솝우화 전집>으로 수련을 할 생각이다.
“논증이나 논변에 빠지는 사람보다 이야기하는 사람의 영혼이 한 뼘 더 높다. 이야기가 논변보다 시에 가깝기 때문이다. 치밀하게 짜진 논변의 숲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잃는다. 누구나 이정표가 없는 곳에서는 요동치고 떨린다. 요동치고 떨려보라.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정표도 하나 없이 많은 공터가 허용되어 누구나 들락거릴 수 있다. 거기서는 도란도란 대화가 열린다. 어떤 규제도 없다. 길도 없다. 당신은 거기서 길을 찾지 마라. 길을 내려는 자신이 보일 것이다. 자신이 궁금하면, 논증하지 말고 이야기하라. 아주 오래전에 이솝이란 사람이 펼쳐 놓은 이야기 숲에서 길을 잃어보자.” 이야기의 힘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에, 즐거운 시간이 될 것 같다."
오늘은 춥지만 절기상 입춘이다. '춘(春)', '봄'자 소리만 들어도 기분 좋다. 왜 오늘이 입춘인지는 다음 지도를 보면 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24절기는 태양의 움직임을 이용하여 24개의 지점으로 구분한 표시를 말한다. 한 달에 2개의 절기가 반드시 들어가며, 계절 당 6개의 절기로 이루어지며 3개월 마다 바뀌는 계절의 변화를 말한다.
어느새 입춘인데, 다시 춥다. 아침에 영하 8도였다. 24절기의 처음이자 봄의 시작을 알리는 날로, 한문으로는 이렇게 쓴다. 立春. 들어갈 입(入)자를 쓰지 않고 설입(立)자를 쓴다. 입춘이란 중국 황제가 동쪽으로 나가 봄을 맞이하고 그 기운을 일으켜 제사 지낸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기운, 숨결, <장자>에서는 '野馬'라고 표현하는 우주의 기운이 돌아야 봄이 시작된다. 어떤 이는 한문의 입(立)자가 '곧', '즉시'라는 뜻도 있어 이제 곧 봅이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입춘이란 '봄 기운이 막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춥다. "입춘에 물독(오줌 독) 터진다." "입춘 추위는 꿔다 해도 한다." "입춘 추위에 입 돌아간다." 이런 말들이 있는 것 보니, 옛날에도 입춘 무렵에는 추위가 찾아왔나 보다. 그래서 이런 말들이 있겠지.
입춘이 시작되는 시점이 새해의 시작으로 보았던 풍습으로 이날 시간에 맞추어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이라는 글 귀를 써놓은 격문을 대문 앞에 붙인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사진처럼. 그 뜻은 "입춘에는 크게 좋은 일이 있고 새해가 시작됨에 경사스러운 일이 많기를 바란다"이다. 이를 우리는 '입춘첩(입춘축)'이라 한다. 올 봄에는 코로나-19로 어려웠던 지난 해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해가 되었으면 한다. 그래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는 <나무기도>이다. "입춘대길, 건양 다경"을 나누고 싶다.
나무 기도/정일근
새해에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
우린 너무 빠르다, 세상은
달려갈수록 넓어지는 마당 가졌기에
발을 가진 사람의 역사는
하루도 편안히 기록되지 못했다
그냥 나무처럼 붙박여 살고 싶다
한 발자국 움직이지 않고
어린 자식 기르며 말씀 빚어내고
빈가지로 바람을 연주하는 나무로 살고 싶다
사람들의 세상은 또 너무 입이 많다
입이 말을 만들고 말이 상처를 만들고
상처는 분노를 만들고 분노는 적을 만들고
그리하여 입 속에서 전쟁이 나온다
말하지 않고도 시를 쓰는 나무의 은유처럼
온몸에 많은 잎을 달고도
진실로 침묵하는 나무가 되고 싶다
침묵으로 웅변하는 나무가 되고 싶다
삶은 베풀 때 완성되느니
그늘 주고 꽃 주고 열매 주는 나무처럼
추운 아궁이의 뜨거운 불이 되어 주기도 하고
사람의 따뜻한 가구가 되는 나무처럼
가진 것 다 주는 나무로 살고 싶다
새해에는 그대를 위한 나무가 되고 싶다
그대는 나를 위해 나무가 되어다오
우리 나무와 나무로 만나 숲을 만들자
그런 사랑이 만드는 새로운 숲이 되자
오늘 아칩부터는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 대한 리-라이팅을 해 본다. 이 책은 두껍지 않아서 금방 읽는다. 이 소설의 저자인 조지 오웰은 필명이고, 진짜 이름은 에릭 아서 블레어이다. 소설의 내용은 최교수가 12월의 책으로 선정 발표할 때의 글로 대신한다. 글이 아주 깔끔하다.
“농장에서는 동물들이 인간의 독재에 시달리며 살고 있었다. 늙은 수퇘지 한 마리가 인간의 야비함을 지적하며 혁명을 호소하자 동물들은 분노에 휩싸여 혁명을 일으키고 인간들을 축출한다. 동물들은 ‘동물주의’로 뭉쳐 평등한 이상 사회를 건설하려 하지만, 돼지들이 읽고 쓸 줄 안다는 이유로 주도권을 잡고 스스로 세운 규칙마저도 지키지 않는 특권층이 되어, 동물주의 사회는 결국 독재 사회로 전락한다. 독재로의 변질을 막기에는 다른 동물들이 너무 무지하였고, 지도자에게 너무 쉽게 현혹되었다. 인간의 독재를 뒤집어 평등한 이상사회를 건설하려는 동물들의 혁명 정신은 돼지들의 선민의식과 일반 동물들의 무지가 얽혀 인간이 지배할 때보다도 더 심한 착취가 가해지는 독재로 회귀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1) 혁명이 성공했다. 왜 혁명이 이루어졌는가? 2) 그런데 어떻게 돼지들이 주도권을 잡았을까? 그들은 읽고 쓸 줄 알았다는 것이다. 3) 그런데 돼지들이 혁명 후에 특권층이 되었고, 오히려 동물주의 사회는 독재 사회로 전락 했을까? 4) 다른 동물들은 가만히 당했을까? 왜 오히려 인간이 지배할 때보다 더 심한 착취가 가해지는 독재가 된 것일까? 이런 질문들을 해보며, 어린 시절에 읽었던 이 책을 다시 읽었고, 최진석 교수가 <광주일보>에 기고한 칼럼과 함께 생각을 다시 정리한 후 공유한다. 최진석 교수와 고명환 개그맨이 함께 하는 "라이브 북토크"를 유튜브로 여러 번 들었다.
삼 일에 걸쳐 (사단법인)<새말/새몸짓(이사장 최진석)>의 "책 읽고 건너 가기" 12월의 책으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를 선택했던 최 교수는 농장 주인 존스씨를 몰아내고 동물은 처음으로 "잠자리에 들어가 일찍이 맛보지 못했던 단잠을 잤다"는 문장을 가장 인상적으로 꼽았다. 그러면서 맨 처음으로 '존재하는 것들은 외부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개 내부적 원인으로 스스로 무너진다'는 말부터 시작했다.
사실 존스씨네 장원 농장도 주인 존스씨는 스스로 무너졌다. 무슨 소송을 냈다가 지는 바람에 돈을 날리고 잔뜩 울적해져서 몸 생각은 않고 매일 술타령이었다. 조지 오웰은 소설의 첫 부분에 이런 문장을 배치했다. "소송에 큰 돈을 탕진해버린 뒤로는 의기소침해져 몸을 망칠 정도로 술을 마셨다." 농장 주인 존스씨가 이렇게 스스로 무너져가면서, 농장의 동물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도 모른 채 반란을 성공시켰다." 농장 주인 인간 존스를 쫓겨났고, 이제 그 농장은 동물의 소유가 되었다. 그래 소설 이름이 <동물농장>이다. 동물들의 혁명이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혁명이 준 첫 소득은 "일찍이 맛보지 못한 단잠"이었는데, 혁명의 성공이 준 해방감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어떻게 혁명 후에 돼지들이 주도권을 잡았는가? 단 한 가지 이유가 돼지들은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다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읽기와 쓰기에서 성장한 힘이 지배력의 근원이 된다. 소설 속에서 "뛰어난 지식이 있는 그들이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는 문장을 우리는 읽게 된다. 반면, 읽기와 쓰기의 밭에서 자라지 못하면 누구나 무지해 진다. 게다가 더 무서운 것은 독재자는 읽고 써 놓은 것에 제 맘대로 손을 댄다는 것이다. 무지한 대중들은 독재가 읽기와 쓰기에 아무렇 게나 손을 대도 괜찮다 한다. 무지하면 우선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읽기와 쓰기에 약하고 싫어해서 생각을 포기한 채 사는 무지한 대중은 쉽게 조종된다.
흥미로운 것은 그런 독재자 옆에는 언제나 무지한 대중을 조종하는 어용 지식인과 어용 예술인들이 있다. 소설 속에서는 스퀼러라는 돼지와 미니머스가 그 역할을 한다. 이들의 수준 높은 언어 구사력은 대중들이 그들에 의해 조종되면서도 자신이 천하게 사는 것이 아닌 것처럼 느낄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맹목적 추종은 더 공고해진다.
소설 속의 늙은 수퇘지 혁명가 메이저는 "굶주림과 회초리에서 벗어난 동물들의 사회, 모든 동물들이 평등하고 모두가 자기 능력에 따라 일하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 "인간에 맞서 싸우는 데엔 우리 동물들이 결코 인간을 닮아서는 안 된다는 점도 기억 하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죽는다. 혁명의 깃발을 든 자 메이저 수퇘지는 혁명이 완성되려면 동물들의 기본 정신과 자세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간파하였다. 그러나 혁명가 메이저를 계승한 수퇘지들 가운데 그의 말에 담긴 정신을 계승한 돼지는 없었다.
소설은 풍자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잘 설명한다. 독재자들은 대개 앞선 영웅들로부터 정신은 빼고 이미지만 끌어와서 임의로 소비하다가 결국 특권과 권력 놀이에 빠지는 완장으로 전락한다. 읽기와 쓰기의 기능적인 힘으로 권력만 잡았다, 염치와 수치심을 기반으로 한 인간적 성숙을 단련하지 않으면, 특권을 누리고 권력놀이에 빠지는 일 이상은 할 줄 모른다. 최진석 교수의 멋진 표현이다. "깃발을 찢어 완장을 만드는 일, 그것이 전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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