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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그리운 뒤란/권덕하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모든 것은 우주 전체의 조화로운 원리와 상호 관계에 따라 순리대로 되어갈 뿐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절제'. '중도', 아니 중용이 필요하다. 어느 날, 다른 사람 평가하기를 좋아하는 자공이 공자님께 물었다. 선생님, "자장과 자하 중 누가 더 현명합니까?" 공자님이 이렇게 대답하셨다. "자장은 지나친 면이 있고, 자하는 미치지 못하는 면이 있다." 그러자 다시 자공이 질문했다. "그렇다면 자장이 더 현명한 것입니까?" 그러자 공자께서 한 말씀 덧붙이셨다.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논어』"선진" 편에 나오는 공자님과 제자들의 이 대화에서 그 유명한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왔다. '지나치지도 않고 미치지 못하지도 않는' 자기 절제가 곧 삶의 지혜인 것이다. 그래서 불가는 중도(中道)를 이야기하고, 그리스철학과 유학은 중용(中庸)을 논했던 것이다. 지난 글들은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그러니까 평범하게 사는 것이 가장 위대한 삶이다. 이 말은 중국의 옛 시인 백거이(白居易)라는 이름이기도 하다. 그의 이름은 『중용』14장에 나오는 "군자거이사명(君子居易俟命, 군자는 평범한 자리에 살면서 천명을 기다린다)"라는 말의 거이(居易)를 따온 것이다. '거이'는 거할 거+평범할 이가 합쳐진 말이다. 그러니까 '평범한 곳에 거한다'는 뜻이다. 또 그의 자가 낙천(樂天)이라 한다. 이는 『주역』의 "계사편"에 나오는 "낙천지명고불우(樂天知命故不憂, 천명을 즐기고 알기 때문에 근심하지 않는다)"라는 말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는 낙천적이며 긍정적인 사고로 생활했기 때문에 중앙정치 무대의 격심한 당쟁에 휘말린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시인은 아마도 평범한 일상을 지향하면서, 다가오는 운명이 어떤 것이든 그에 맞는 가장 최적의 인생 방법을 찾아낸 고수라는 생각이 든다.

어제 저녁부터 비가 하염없이 내린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비가 그칠 줄 모른다. 장마인가? 비가 아침엔 더 줄기차게 내린다. 서윤규 시인의 <눈물>이 생각난다. "또 다시/내 몸 속을 흐르던 물이/역류하듯 밖으로 흘러 넘치는구나/올 장마엔/어느 저수지에 가둔/슬픔의 둑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그러나, 최옥 시인의 <장마>처럼, "일년에 한 번은/실컷 울어버려야 했다/흐르지 못해 곪은 것들을/흘려 보내야 했다/부질없이 붙잡고 있던 것들을/놓아버려야 했다//눅눅한 벽에서/혼자 삭아가던 못도/한 번쯤 옮겨 앉고 싶다는/생각에 젖고//꽃들은 조용히/꽃 잎을 떨구어야 할 시간//울어서 무엇이 될 수 없듯이/채워서 될 것 또한 없으리//우리는 모두/일년에 한 번씩은 실컷/울어버려야 한다." 그래도 또 한주가 시작되는 월요일이다. 그래도 우리는 오늘 또 살아야 한다.

슬플 때 외우는 문장이다. "모든 것은 우주 전체의 조화로운 원리와 상호 관계에 따라 순리대로 되어갈 뿐이다." 우주에는 하나의 로고스가 있는데, 그게 조화롭다. 그런데 고지식하게 그 원리에 따라 우주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상호 관계가 있다. 거기서 관계론이 나온다. 그러니까 내가 어떤 '관계적' 태도로 하루를 사는가에 따라 일이 순리(順理)대로 가느냐 아니면 그 반대이다.

이럴 때일수록, 나는,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처럼, '뒤란(=뒤뜰)'을 두고 살고 싶다. 내 어린 시절에는 있었다. 가만히 뒷마루에 앉아 마음을 달랬는데, 이젠 세상이 우리들의 뒤란을 빼앗아갔다.  

그리운 뒤란/권덕하

내 몸에는 모른 체 해주는 뒤란 있어  
눈물이 마음 놓을 수 있었다  
낙수에 패인 자리 바라보는 일은  
밀려난 풀만큼이나 자신을 달래는 일이었고

댓잎 만지작거리며 바람 쐬기도 하고  
손톱만큼 자란 수정도 보고  
숨겨둔 일 고백하듯 까만 꽃씨 받다가

텃밭으로 나가 지붕 내려다보며
고욤이 그렇듯 떫은 것도  
풀덤불에 두어 그리운 것 되면 상강 지나도록  
표해 놓은 삭정이만 봐도 좋았는데

뒤란 사라진 몸  
정처 잃고 잦은 슬픔에 먹먹하다  
금간 오지그릇처럼 철사로 동이고 싶은 마음  
조금씩 뒤틀리고  
붉은 혀 감출 데 없이 시드는 것도  
꽃대궁의 일로만 남아 신경이 쓰이다  

부끄러움을 알아차릴 뒤란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부끄러움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간디는 외국 제품을 불사르는 것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현명하다는 타고르의 반론에 대하여, 그것을 불태울 때 우리는 우리의 수치심도 함께 태울 수 있다고 말했다. 수치심은 수오지심(羞惡之心, 자기의 잘못을 부끄러워 하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에서 나온 말이다. 수치심은 부끄러워 하는 마음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사단이 났다.' 왜? 창피함, 부끄러움을 모른다.

맹자는 이 부끄러운 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렇지 못하면 정의(定義)를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당해서 싫은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 정의이다. 간디는 운명의 순간에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해 함(오 신이여!)". 이때 여기서 신은 진리이다. 우주가 작동하는 원리로서 진리.

우주의 원리는 균형(均衡)이다. 올라간 것은 내려오고, 내려간 것은 퉁겨져 올라오기 마련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아레떼(德덕)는 인간이 추구해야 할 것이다. 극단을 피하고 그 중심을 잡는 일이라고 했다. 용기는 만용과 성급함의 중간 어디며, 절제는 낭비와 인색의 가운데이다. 그 가운데를 찾으려는 마음이 중용(中庸)이다.

중용의 존재를 배운 적도 없고, 중용을 자신의 삶에 적용한 적이 없는 사람들은 극단의 유혹에 빠진다. 왜 유혹에 빠지냐 하면, 자신의 보 잘 것 없는 정체성이 보상받기 위해서는, 자화자찬이 특징인 극단적인 무리에 속해, 자신의 쓸모를 끊임 없이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좌도 없고 우도 없다. 왜냐하면 나에게 우가 상대방에겐 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좌와 우 같은 명칭을 가지고 네 편과 내 편을 가르는 행위는, 열등감과 이기심으로 가득한 인간들의 속임수일 뿐이다.

우주가 창조되기 위해서는 걷어 내야 한다. 덜어내는 행위없이, 새롭고 참신한 시작은 없다. <창세기> 1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맨 처음에, 신이 우주를 창조하기 시작했을 때"라는 종속절로 시작한다. 여기서 '창조하다'는 그리스와 로마인들이 잘 못 번역한 것이다. 전에 없는 것을 새로 만든다는 의미가 되었지만, 히브리어로는 '바라'라고 '덜고 덜어 더 이상 빼낼 수 없는 상태로 만들다'란 의미라 한다.

배철현 교수에 의하면, 창조는 자신의 삶에서 쓸데 없는 것, 굳이 필요하지 않은 것을 가려내는 지혜에서 출발한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는 과거에 의존하는 부실한 것을 걷어내거나 과감하게 제거해야 한다. 그러니까 <창세기> 1장의 의미는 "처음에, 신이 혼돈으로 가득한 하늘과 땅에서 쓸데없는 것을 걷어 내기  시작했을 때"란 의미이다. 우주는 그렇다. 그 속에 속한 우리도 과거에 의존하는 부실한 것을 제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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