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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쓰기 : 2021년 2월 2일: 에세이-하라 (2)

1526. 인문운둥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대전 국립 현충원입니다.

 

나는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그 기준은 행동과 욕망이다. 쉽게 말하면, 나란 누구인가를 알려면. 나의 욕망과 행동을 살펴보면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 싶으면 욕망과 행동을 바꾸면 된다. 그런데 왜 안 할까? 철학이 없기 때문이다. 인식과 사유라는 정신활동을 하지 않으면 행동의 패턴이 절대 안 변하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가장 일차적으로 욕망의 지배를 받는다. 이때 욕망은 충동에 가깝다. 삶을 능동적으로 추동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 쾌락을 증식하는 쪽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엇이든 내 것으로 소유하고, 거기에서 오는 쾌락을 만끽하고, 그게 뜻대로 안 되면 화를 내는 식의 패턴을 갖는다. 그리고 그러한 패턴을 자기 자신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그게 어리석음이, 불교 용어로 말하면, 무명(無明)이다. 본성을 완전히 가리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태양이나 산과 들로부터 공짜로 얻는 게 많다. 그러니 우리는 늘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자본주의 속에서는 돈이 돈을 낳는다는 사실만 믿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졌다. 오로지 박탈감만 느낄 뿐이다. 그래 현대 인들은 벌어도 벌어도 불안해 한다. 그들은 스펙이나 재산하고 등가가 되어 버렸다. 나란 존재가 화폐로 환원되니까, 자존감이 떨어진다. 그래 도박이나 성에 중독되거나 다른 이들 한테 갑 질을 한다. 그리고 소유와 쾌락을 중심으로 욕망을 추구하다 보니 늘 불만족이다.

 

이 사슬을 끊으려면 욕망과 행동의 동선(動線)을 다시 그려 보아야 한다. 고립과 단절이 아니라, 대칭성을 회복하는 방식으로 동선을 재배치해야 한다. 욕망 그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소유와 증식을 향해 나아갈 때, 그리고 쾌락의 무한질주를 하기 시작할 때가 문제이다. 게다가 자본주의가 더 부추긴다. 그러니 그 구조와 사슬을 철저하게 성찰하고 그런 욕망의 궤도를 자아라고 생각하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소유와 쾌락은 생명의 본성과는 거리가 멀다. 거기서는 창조가 아니라, 쾌락 혹은 퇴행이 일어난다. 그러니까 행동의 동선을 다시 그려야 한다. 그러려면 욕망도 재구성되어야 한다.

 

나는 늘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인간의 욕망은 원심력의 속성이 있고, 인간의 본성은 중력때문에 구심성의 속성이 있다. 그러니까 우리의 욕망은 점점 더 커지고 높아지려 한다. 그러니 우리는 원심력을 타고 자신의 본성이 이탈하려는 욕망을 중심 쪽으로 끌어내려야 한다. 그래야 균형이 이루어진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절제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늘 내면을 들여다 보는 성찰이다. 그 것이 철학하는 것이다. 철학은 수행과 영적 훈련을 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철학 한다'는 것이 철학사를 정리하는 게 아니다. '철학 한다'는 말은 내 욕망의 심연을 탐구해서 행동의 리듬을 바꾸는 것, 욕망과 행동의 조화로운 일치를 시도하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어제 일들을 감사하는 마음에서 어제의 일들을 복기해 보고, 오늘을 위한 최선의 전략을 짠다. 그리고 네이버 뉴스의 <오피니언>을 열어, 여러 개의 칼럼을 읽는다. 이건 나 만의 세상과 접속하는 방식이다. 오늘 아침은 <서울신문>의 "길섶에서"란 코너의 글들을 여러 편 읽었다. 그 중 손성진 논설위원의 글을 오늘 아침 고유한다. 세상이 이율배반(二律背反, 서로 모순되어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명제로 영어로는 antinomy라 한다)이라는 이야기이다.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율배반은 자신과 조직의 이익,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비롯된다.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내로남불’이란 조어(造語)와도 통한다. 정치적 문제로 들어가면 더욱 심해진다. 이익을 포기하고 정의를 좇기는 참 어려운 문제지만 개개의 주체마다 중심을 잡아야 한다. 이율배반이 횡행하는 사회는 기초가 부실한 건축물과 같다. 생각이 다를 수는 있겠지만 옳고 바른 것은 언제나 하나다. 칼럼에서 소개되는 이율배반적인 우리들의 모습들을 나열해 본다.

  • 아침 방송에서는 뱃살이 출렁이는 사람들을 출연시켜 소식(小食)을 권유한다. 그러나 저녁이면 방송마다 온갖 맛있는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는, 소위 ‘먹방’으로 과식을 부추긴다.
  • 인문학 강의에서는 도덕과 예절을 강조하고 삼강오륜을 말하면서도 드라마에서는 패륜과 막말로 범벅이 된 비뚤어진 가족상을 버젓이 보여 준다.
  •  강남과 특목고를 비판하면서 강남에 살고 자녀를 특목고에 보내는 정치인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 우리 같은 소시민들도 집값을 상승시킨 부동산 정책을 비난하면서도 속으로는 집값이 올랐다고 좋아한다. 어떻든 자기 집값은 더 올라야 한다고 생각하고 떨어질까 봐 걱정하는 것이다.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간다! 이게 인생 법칙이다. 어느 사찰 입구에 “아니 오신 듯 다녀가소서”라 쓰여 있다 한다. 그렇다. 코앞의 이해득실에 목숨을 걸고 계급적 이익을 관철하고자 해 봤자, 인생 석양엔 모두 빈손으로 간다.  오늘 아침 사진은 대전 현충원 둘레길에서 찍은 것이다.

 

 

빈손/여태천

 

사람들이

큰소리로 외친다.

 

주먹을 불끈 쥐며

좋아요!

 

더 많은 것으로 합시다.

더 큰 것으로 합시다.

보기 좋은 것으로 합시다.

손실은 무엇입니까?

 

크고 우렁찬 목소리가 퍼진다.

 

얇고 투명한 불안이

목덜미를 파고든다.

 

우리의 두 손을

무엇으로 가득 채울 수 있을까요?

 

양손을 흔들며

빌딩을 나온

 

사람들

사람들

사람들

 

 

이 시를 소개한 박미산의 덧붙임 글을 함께 공유한다. "우리 인간은 큰소리로 외치는 사람들 따라 더 많은 것, 더 큰 것, 더 보기 좋은 것, 더 편리한 것을 찾습니다. 크고 우렁찬 목소리가 퍼지는 빌딩들. 얇고 투명한 불안이 목덜미를 파고들지만, 그것도 잠시 뿐. 사람들은 주먹을 불끈 쥐고서 ‘좋아요'를 외칩니다. 편리함을 찾아 큰 빌딩을 지으면서 자연을 파괴하는 사람들. 자연이 파괴되어 빙하가 녹아 흘러내리고 바이러스가 창궐하여 마스크를 쓰는 사람들. 인간의 편리함이 재앙을 부르는 줄 모르고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추구합니다. 빈손이 가득 찬 손인 줄 모르는 사람들! 사람들!

 

이젠 어떻게 살 것인가 이야기를 해본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해, "성실해", "착해", "모범적이야", 이렇게 평가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균질화의 산물이다. "그냥 자본, 국가, 가족을 유지하는 데 열심이다" 정도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실천과 행동이 어디를 향하는 가이다. 방향이 중요하다. 그것이 자기에게도 좋고 남들에게도 좋은 것, 다시 말해 자유와 해방을 위한 것이라면 설령 실천의 수준에서는 미비하다 할지라도 윤리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인정욕망이나 소유욕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아무리 착한 행위를 했다 해도 그건 예속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자유와 해방으로 나아가야 한다. 열심히 살고 성실하게 살면서 스스로를 얽어 매는 방향을 취하고 있다면, 그건 비윤리거나 반윤리라 말할 수 있다. 윤리는 도덕과 다르다. 도덕은 그 시대의 상식적 규범이나 관습적 명령이라면, 윤리는 훨씬 더 근원적인 것이다. 생명의 원리와 연결되어야 한다. 생명의 척도는 자율성과 능동성이기 때문이다. 그래 윤리적이라는 말은 자율성과 능동성을 구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선악이나 시비, 또는 동정이나 연민 등과는 질적으로 다른 가치이다. "윤리는 탈물질 세계의 도덕이다."(이순석)

 

보통의 상식과는 달리, 철학과 윤리, 영적 비전 같은 것은 생존에 아주 필수품이다. 수많은 타자들과 교감할 수 있는 무기이기도 하다. 인생은 결국 관계와 배움, 두 가지가 전부라고도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관계와 배움을 통해, 매 순간 인생과 세계에 대해서 깨달어 가고, 그럴 때만이 자유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그 자유의 지평선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비전'이라 한다.

 

그럼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소유, 성공, 쾌락을 향하고 있다면 멈추어야 한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얻은 다음에는 허무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주변에 성공한 다음에 도박, 성, 폭력 등으로 삶을 무너뜨린 사람들이 꽤 있다. 그건 예속을 강화 시키는 길이다. 소유와 쾌락의 방향은 노력의 대상이 아니다. 가만히 있어도 절로 그쪽으로 몸이 움직인다. 그래서 충동이라고 한다. 그 충동의 제어하는 것이 철학이다.

 

끝으로 에세이를 쓰는 실전을 정리해 본다. 제일 먼저 제목이 중요하다. 제목이 진부한데 본문이 잘 나온 글은 거의 없다. 그 다음은 본문을 구성하는 일인데, 중요한 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일이관지(以貫之) 논리적 연결이다. 차서(次序)를 부여하는 일이다. 두 번째는 독창적 사유, 차이를 생성하는 일이다. 철학의 정의 자체가 통념과 상식을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논리적 일관성과 독창적 사유, 다시 말해 차서를 부여하고 차이를 생성하는 것은 모든 글쓰기의 원칙이기도 하다. 차서에서 '차'는 시간적인 순서, '서'는 공간적인 질서를 말한다. 산다는 것은 시,공간적 차서 안에서 활동한다는 걸 뜻하기 때문이다. 이를 우리는 기승전결이고도 하고, 봄-여름-가을-겨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게 있어야 우리가 자연과 우주의 리듬에 조응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 닥쳐도, 차서를 지키면 시간의 흐름과 함께 매듭이 풀린다. 어떤 의미에서는 세월이 약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것 같다. 어떤 일이든 그때그때 차서에 따라 매듭을 짓고 넘어가야 한다, 그게 윤리이다.

 

철학은 좋은 삶의 양식을 창안하는 것이다. 내가 잘 살려고 하는 것이다. 그 일의 시작은 무엇이 걸림돌인지 솔직하게 체크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걸림돌과 정면승부를 하여야 한다. 그러면 거기서 개성이 나오고, 차이가 생성된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이 자의식의 장벽을 넘는 것이다. 현대인은 자의식의 비만이 심각한 수준이다. <축의 시대>를 쓴 저자 카렌 암스트롱은 영적 탐구를 "자아를 굶기는 것"이라는 정의를 소개하면서, 고전평론가 고미숙은 굶긴다는 것은 자의식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훈련, 그게 바로 "에세이-하라"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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