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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쓰기 : 2021년 2월 1일: 에세이-하라 (1)

와인을 파는 인문운동가입니다. 지난 3년 전부터 매일 아침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라는 이름으로 인문 에세이를 쓰고 있습니다. 2021년 2월 1일 것부터 티 스토리에서도 공유하고 싶어 왔습니다. 같이 읽고, 사유하며, 더 나은 나를 만들어 가요. 제가 직접 찍은 주변 사진과 제가 좋아하는 시를 한편 골라 함께 공유합니다. 바쁘신 분은 시라도 읽으시기 바랍니다.

 

1525.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한국화학연구소 운동장입니다. 눈이 녹으니 또 다른 분위기의 평화입니다.

 

나는 몇 년 전 우리 대전대의 <수필 반> 강의에 1년 이상 다닌 적이 있다. 내 글이 너무 무겁고, 오랫동안 외국어를 했기에, 내가 쓰는 한국어 문장에서 자주 비문이 나왔다. 그걸 고치려고 했지만, 아직도 글이 너무 무겁다. 학술논문보다는 좀 가볍게 에세이를 쓰려고 노력한다. 특히 인문학 에세이를 통해, 나의 인문정신을 고양시키고, 주변 사람들과 공유하면서 인문 운동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 몇 년 전부터 나는 나를 '인문운동가'로 명명하고 글을 쓴다.

 

나는 개인적으로 알게 하는 것과 사랑하게 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인문지식을 가르쳐 알게 하는 것은 인문학 교육이지만, 인문학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갖게 하는 것은 문화가 있어야 한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은 인문지식을 배우고 외우는 것이 아니라, 인문정신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갖게 하는 문화가 중요하다. 인문학의 역할은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해지지 말아야 한다는 각성을 요구하는 일이다. 더 나아가 고통받는 타인을 향한 위안과 공감을 불러내, 보이지 않는 연대를 이루는 일이다. 나 자신의 존재만을 위해, 나만 잘 살려고, 내 존재만 풍성하려고, 공부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이다.

 

그러려면 우선 우리는 자기 삶의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철학은 말 그대로 "지혜를 사랑하기"이다. 그런 철학은 삶과 분리될 수 없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곧 자기 삶의 철학자여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철학은 인식, 사유, 행동의 총칭이다. 그 결과 자신의 영혼과 언어 그리고 사유를 돌보는 일에 부지런해야 한다. 왜냐하면 게으름은 무지를 낳고, 무지는 충동과 허무를 낳기 때문이다. 고전평론가 고미숙은 이 "허무의 수레바퀴"에서 탈주하기 위한 실존적 결단의 일환"으로 에세이 쓰기를 하라고 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에세이-쓰기"가 아니라 "에세이-하라"고 강조했다.

 

사전 상으로는 수필과 에세이는 같은 말이다. 수필을 영어로 에세이(essay)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본다. 자신의 경험이나 느낌 따위를 일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기술한 산문 형식의 글을 수필이라고 한다. 그러나 에세이는 어떤 주제에 관한 다소 논리적이고 비평적인 글 또는 그러한 글 투의 작품이라고 본다. 그러나 수필가들은 수필을 경수필과 중수필로 나눈다. 신변잡기나 개인적인 취향, 경험, 생각 등을 자유롭게 진술하여 글쓴이가 주체로 분명하게 드러나는 글을 경수필(miscellany)이라 하고, 글쓴이가 주체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객관적인 관찰과 사생을 바탕으로 주제, 의견, 비평, 논증 등이 구체적이고 뚜렷하면 중수필(essay)이라 한다.

 

영어 essay(에세이)는 프랑스어의 essai(에세)에서 나온 말이다. 프랑스어 동사로 essayer는 영어의 try와 같은 뜻으로, 시험하다. 시도하다 등의 의미로 쓰인다. 일상 생활에서 'Je vais essayer(즈 베 에세이예, 제가 해보겠습니다)란 말을 많이 사용하다. 그 동사의 명사형이 l'essai이다. 이 essai라는 말을 작품 제목으로 처음 쓴 사람이 프랑스 16세기 작가 몽테뉴이다. 우리 나라에는 <수상록>으로 번역되었다. 이 원제가 Les Essais이다.

 

어쨌든 자기 삶의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에세이를 쓴다기보다 에세이 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나도 지난 몇 해 전부터 아침마다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란 이름으로 글을 써 오고 있다. 이젠 하루 중 중요한 일 중의 하나로 나 자신과의 약속이 되었다. 산다는 것은 늘 어떤 약속을 지키는 것의 연속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게 살다가 그날 주어진 일을 하다가 죽는 거다. 특별한 삶, 특이한 죽음 같은 것은 없다고 본다. 실제로 그 아침 글을 쓰면서, 삶이 매우 평온해 졌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사진처럼,

 

나는 이런 인문학 에세이를 철학적인 글이라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철학이란 인생과 세계에 대한 탐구이다. 현대인들은 철학을 특별한 전문가나 학자들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질병과 몸을 의사라는 전문가 집단에게 맡긴 것과 마찬가지이다. 현대인들은 취직, 연애, 쇼핑 가족 등에 대해 많이 고만하지만, 존재의 본질에 대해,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고민하는 시간이 별로 없거나 안 한다. 대신 전문가들이 하는 걸 구경만 한다. 그러나 구경만 해도 다행이다. 아예 무시한다. 아침에 공유하는 내 글이 길다고, 이해가 안 간다고 아예 무시하는 주변 사람들이 많다.

 

5인 이상 모임 금지와 9시 이후 식당이나 술집 영업 제한으로 이루어진 사회적 거리 두기가 한달 째 이어지면서, 1월은 허공으로 날라갔고, 벌써 2월이다. 달력 한 장이 속절없이 넘어갔다. 올 2월은 28일 뿐이다. 그리고 다음 주는 음력 설로 목금토일 황금 연휴가 있는데, 다 공염불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문제는 이 거다. 나와 가족, 우리의 안전은 당신의 안전에 달렸다. 그대가 건강하고 안전해야 나도, 내 아이도, 우리 모두가 안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외 다른 방법은 없다 한다. 그러니 사회적 거리 두기를 따라야 한다.

 

새벽에 누군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있어 깼더니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비가 오면, 난 친구 김래호 작가의 이 말이 생각난다. 가을은 갈무리하는 ‘갈’이고, 봄은 ‘보기’ 때문에 봄이고, 여름은 ‘열매’의 고어이다. 그리고 겨울은 ‘결’이 되는데, 나무나 돌, 사람 모두 세월의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켜 같은 ‘결’이 온당하다. ‘볼열갈결’(사계절)의 비는 그 철을 돕거나 재촉하는 촉매제 같은 것이다. 봄비에 만물이 잘 보이고, 열비에 튼실한 열매 열리고, 갈비에 나뭇잎 보내고, 졸가리 훤한 나목에 '결비' 내린다. '결비'에 나무는 나이테를 '뚜렷이' 긋고 뒤로 물러난다. 그리고 나무의 일에 손 뗄 준비를 한다.

 

오늘 아침은 오랫동안 공유할 시를 골랐다. 10편 이상을 읽고, 고른 것이 정일근 시인의 것이다. "‘따뜻한 말은 사람을 따뜻하게 하고요/따뜻한 마음은 세상까지 따뜻하게 한다고요" 시 귀절 때문에 택했다. 새롭게 시작되는 2월인데, 코로나-19로 그냥 갇혀 있지만, 따뜻한 말과 마음으로 2월을 맞이하고 싶다.

 

 

신문지 밥상/정일근

 

더러 신문지 깔고 밥 먹을 때가 있는데요

어머니, 우리 어머니 꼭 밥상 펴라 말씀하시는데요

저는 신문지가 무슨 밥상이냐며 궁시렁 궁시렁 하는데요

신문질 신문지로 깔면 신문지 깔고 밥 먹고요

신문질 밥상으로 펴면 밥상 차려 밥 먹는다고요

따뜻한 말은 사람을 따뜻하게 하고요

따뜻한 마음은 세상까지 따뜻하게 한다고요

어머니 또 한 말씀 가르쳐 주시는데요

 

해방 후 소학교 2학년이 최종학력이신

어머니, 우리 어머니 말씀 철학

 

 

다시 '에세이-하라'는 오늘 아침의 화두로 다시 돌아온다. 고전평론가 고미숙이 에세이 쓰기보다 에세이-하라고 강조하는 이유는 그냥 에세이라는 장르적 글쓰기를 하는 게 아니라 에세이를 쓰면서 철학을 하라는 말이었다. 그건 우리가 근본적으로 철학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다. 철학의 첫 번째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 이다. 이를 우리는 존재론 철학이라 한다. 이 질문을 던지면, 바로 내가 사는 세상에 대한 질문이 솟아난다. 그럼 이 세게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이 세계의 본질은 무엇인가 등의 질문으로 이어지면서, 나의 공간이 무한대임을 자각하게 된다. 그리고 시간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철학은 이 시점에서 인식론으로 넘어간다. 무한 시, 공간 속에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영역은 어디까지 일  까 묻게 된다. 우리라는 존재는 유한한데, 우리가 살아가는 시, 공간은 무한하다. 그럼 유한한 몸으로 무한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우리는 알고 싶은 것이 많다. 그게 호모 사피엔스의 운명이자 특권이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하는 질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문제이다. 이걸 우리는 윤리학이라 한다. 고미숙에 의하면, 윤리의 기준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 한다. 전자를 욕망, 후자를 능력이라 하면서, 욕망과 능력의 함수가 우리들의 행동을 결정한다고 보았다. 욕망과 능력이 간극이 발생할 때, 우리는 괴로움을 겪고, 고민을 한다. 거기서 윤리학적 테제가 나온다.

 

서양 철학이 존재론, 인식론 그리고 윤리학이라는 세 영역을 포괄한다면, 동양적 사유의 목적은 깨달음이다. 깨달어서 무지를 탈출하고 괴로움에서 벗어난다고 본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은 육체적 한계를 벗어나 해탈하는 것이다. 그건 생로병사라는 애착에서 벗어나 뜻한다. 애착이 분노를 낳고 다시 어리석음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걸 '탐진치(貪瞋痴)'의 3독(三毒)이라 부른다.

 

깨달음, 지혜를 얻으려면, '탐진치(貪瞋痴)'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탐진치'는 우리를 삼키는 세 가지 독이다. 탐진치는 '탐욕(貪欲)', '진에(瞋恚)', '우치(愚痴)'를 줄인 말이다. 요즈음 쓰는 말로 하면, '욕심', '성냄', '어리석음'이다.

  •  탐욕은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을 말하며, 본능적 욕구의 경계에서 지나치게 욕심을 내는 것이다. 가장 강한 독이다. 왜냐면 뒤탈이 가장 많이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진에는 노여움, 또는 성냄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마음에 맞지 않는 경계에 부딪쳐 미워하고, 화내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뜻에 맞지 않거나 자신보다 우월한 상대에게 나타내는 증오심과 노여움, 시기심, 질투심이기도 하다.
  • 우치는 탐욕과 진에에 가려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는 '어리석음(무식 無識)'이다.

 

이 삼독(三毒)이 살아가는데 번뇌를 일으키는 원인이다. 이것을 '아집'과 '무지', 두 가지로도 말할 수 있다. 아집, 나에 대한 집착과 그 집착이 일으키는 번뇌를 알지 못하는 무지를 말한다. 공부로 지혜를 키워야, 이 삼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탐진치'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계정혜 戒定慧'이다.  진, 노여움, 즉 화를 잘 내는 사람은 대인관계를 줄이고, 상대의 장점을 인정하는 태도를 길러야 한다. 깨달음에 이르려는 자가 반드시 닦아야 할 세 가지 수행이 '계戒/정定/혜慧'이다. 계율을 지켜 실천하는 계, 마음을 집중하고 통일하여 산란하지 않게 하는 정, 미혹을 끊고 진리를 주시하는 혜이다.

 

고전평론가 고미숙은 정화 스님이 말하는 '별별해탈"을 소개하였다. 욕망의 불꽃을 조금씩 끌 때마다 해달이 된다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위에서 말한 것처럼, '탐진치'가 존재를 다 잠식해 버릴 정도로 해롭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착의 불을 끄는 것이 열반이고 해탈이다. 그런 해탈을 이루는 것이 수행이다. 매일 수행을 하지 않으면 욕망과 능력의 간극, 그 사이에서 오는 '탐진치'의 불꽃을 제어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동양의 철학은 종교하고 구별이 잘 안 된다. 동양은 철학이 곧 종교이다. 인격신 대신 천지를 준칙으로 잡는다. 서양은 인간과 자연을 뛰어넘는 초월자를 인격신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은 인간의 원초적 동력이다. 모든 존재는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이고 구도자이다.

 

현대인은 공무원 시험, 임용 고시 같은 어려운 일들은 기꺼이 한다. 물질적 이익을 위해서는 몸을 사리지 않는다. 하지만 정신의 확충이나 인식의 자유에 대해선 대체로 무관심하다. 가지에 대한 사유, 삶에 대한 탐구는 게을리 한다. 그러나 철학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이 아니다. 철학은 내 행동과 일상과 관계, 나아가 삶 전체를 규정하는 키이다. 왜냐하면 세계를 보는 눈을 바꿔야 행동이 나오기 때문이다. 감정이나 유행에 휩쓸려서 뭘 하게 되면 금방 식어 버린다. 오래가지 못한다. 그러나 세상이든 인생이든 뭔가를 바꾸려면 관점이나 인식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

 

우리 인간의 본성은 애초 유동적이고 탈주체적이다. 모든 사물과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서 문명적 배치에 포획됨으로써 공감이 아닌 단절, 유동성이 아닌 분별의 세계로 들어서는 것이다. 이 세계는 물질이 선차적으로 지배하는 영역이라 다들 소외와 스트레스를 감당해야 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주체의 능동성을 발휘하여 본래의 자리, 곧 유동성과 탈주체화의 경지를 터득해 가야 한다. 철학이 필요한 시점이 바로 여기다. 그래 고전평론가 고미숙은 철학을 본성을 회복하는 인식과 사유의 지도라고 정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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