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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노자의 음양 이론은 길항을 넘어, 계곡 물이 되어 흐르는 것이다.

3760.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7월 28일)

1
나의 <인문 일지>는 시간 여행자인 내가 잠시 머물고 있는 그 시대와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를 기록한 것들이다. 당시의 상황이 내 영혼에 어떤 공명을 일으켰는지를 기록하는 일이다. 나의 <인문 일지>는 편지를 병에 담아 바다에 띄우는 일이다. 이 이야기가 누구를 향해 흘러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지도조차 없이 걸어가야 하는
인생길에서 가끔 누군가의 글은 길잡이 구실을 해준다. 삶을 순례로 생각한다. 먹고 사는 일과 주어진 시간을 살아내는 일에는 엄정하다. 현실에 투항한 채 되는 대로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이다. 창문을 열어 환기하듯, 후덥지근한 일상 속에 영원을 새기는 일이 순례이다.

'순례(巡禮)'의 사전적 의미는 "종교 상의 여러 성지나 의미가 있는 곳을 찾아 다니며 참배 함"이다. 왜 그런 거룩한 장소를 찾아다닐까? 그 이유는 다양하다. 초자연적인 도움을 얻기 위해서, 감사를 표시하거나, 고행을 하기 위해서, 헌신을 위해서 등의 여러 가지 동기를 가지고 순례 한다. 

순례자는 순례 하는 사람이지만, 나는 구도자(求道者, 길을 구하는 자)로 본다. 삶은 '모른다'에서 시작한다. 내가 왜 지금 하필 여기에 던져 져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삶은 무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앎을 향한 여정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존재는 태어나는 순간 이미 구도자(求道者)가 되는 거다. 길을 찾는 사람이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도 어떤 점에서 모든 걸 다 알고 싶다고 하는 지식의 여정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삶을 이끌어가는 건 질문이다. 질문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좀비가 된다. 노인은 '꼰대'가 된다. 꼰대는 똑같은 대답을 반복하는 것이다. 단순한 반복은 반 생명, 즉 생명과 완전히 반대이다. 반복되는 똑같은 답을 하지 않으려면 계속 질문을 던져야 한다. 오늘도 질문을 던지며, 한 가지 더 잘 구분하고 분류하며, 알아간다.

산다는 건 자신의 수고로움을 마다하는 일이다. 그런 측면에서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기에 물은 탁월하다. 그래서 노자는 "상선약수"라는 말을 했다. 물처럼 사는 사람이 가장 잘 사는 거다. 물은 선하다. 물은 그 자체로 흐르는 모습이다. 흐르는 에너지이다. 물은 작은 샘에서 솟고, 뿌리에게 스미고, 하나의 의지로 뭉쳐 흐르고, 환희로 넘치고, 작별하듯 하늘로 증발하고, 우수가 되어 떨어져 내리고, 다시 신생의 생명으로 돌아와 이 세계를 흐른다.

우리가 태어나고 사귀고 웃고 슬프고 울고 아득히 사라질 때에도 물은 우리보다 먼저 이 세계에 왔으며 우리보다 먼저 사라졌으며 우리보다 먼저 다시 태어났으니, 유한한 우리에게 물은 한 번도 태어난 적이 없고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다. 물은 불과 흙과 공기와 더불어 이 세계가 온존하는 한 온존할 것이다. 해서 물은 모든 탄생과 소멸을 완성하며, 그 자체로 소생하고 순환하는 생명이다.

우리가 물이 되어/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處女)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의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萬里)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人跡)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이 시를 읽으니, '선한 물'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불이 어떤 부정과 대립이라면, 물은 그 마저도 끌어안는 어떤 관용이다. 그리고  물은 사랑, 자주 침묵하지만 한 번도 사랑을 잊은 적이 없는 마음 큰 이다. 이런 질문을 한다. 나도 서로에게 물이 되어 서로의 목숨 속을 흐를 수 없을까? 우리는 그렇게 만날 수 없을까? 물과 같고 대지와 도 같은 침묵의 큰 사랑일 수 없을까?

2
음과 양을 길항의 관계를 넘어, 깊은 계곡의 다른 차원으로 나를 안내하는 페친 민웅기의 다섯 개의  글을 잘 읽었다. 여기서 삶의 지혜를 읽었다. 어떻게 자신을 비우고, 다른 것들을 왜 포용하여야 하는지, 그리고 노자 <<도덕경>> 제28장을 잘 이해하고, '구도 자'로서 '도'를 좀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민웅기의 음양 이야기를 자세하게 읽고, 갈무리하여 본다. 그에 의하면, 서구 근대 사상이 그려낸 페미니즘의 역사는 ‘대립’의 궤적을 밟아 오늘에 이르렀다는 거다. 남성성과 여성성, 강함과 부드러움, 권력자와 피권력자를 둘러싼 투쟁은 불균형을 바로잡는 필수적인 과정이었으나, 역설적으로 그 과정에서 두 에너지는 더욱 견고한 이분법적 길항(Antagonism) 속에 갇히고 말았다는 거다. 내 생각과 같이 그는 노자의 음양론과 통합적 실존으로 풀이했다. 노자는 이 팽팽한 대립의 전장을 전혀 다른 차원의 풍경으로 안내하였다는 거다. 어제 다시 노자 <<도덕경>> 제28장으로 다시 꺼내 읽었다. 

노자의 음양 이론은 길항을 넘어, 계곡 물이 되어 흐르는 것이다. 길항(길항)은 서로 버티어 맞서는 것을 뜻한다.  두 가지 요인이나 물질이 동시에 작용할 때, 그 효과가 서로 반대되어 서로의 작용을 상쇄하거나 억제하는 현상이다. 그러니까 음과 양은 길항을 넘어 우주의 새상을 가능케 하는 두 개의 상보적인 것이다.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 완전하게 만드는 관계이다. 대립적 길항(Antagonism)은 이분법적 가치 체계 속에서 에너지를 대립시키고 승패를 겨루는 서구적 갈등 모델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웅수자계(知雄守雌谿)". 내가 좋아하는 말이다. <<더덕경>> 제28장의 "知其雄, 守其雌, 爲天下谿(지기웅, 수기자, 위천하계)에서 나온 말이다. 이 말은 “수컷을 알고서 암컷의 자리를 지키면, 천하의 시내가 된다”는 거다. 노자의 관점에서 보면, 남성성(陽)과 여성성(陰)은 서로를 무너뜨려야 할 적대적 타자일 수 없다는 거다. 그러니까 음과 양은 길항. 음양은 우주의 생성을 가능하게 하는 두 개의 거대한 수레바퀴와 같다. 서구적 관점이 ‘누가 더 힘이 센가’ 혹은 ‘어떻게 경계를 나누어 공정할 것인가’에 집착할 때, 노자는 ‘어떻게 두 에너지를 통합하여 더 큰 생명을 순환 시킬 것인 가’를 묻는다.

민웅기는 "길항으로서 의 페미니즘이 남성성의 전유물인 ‘지배적 에너지’를 빼앗아오는 것에 집중했다면, 동양적 음양의 도는 그 지배적 에너지(수컷)의 실체를 메타 인지적으로 파악하는 데서 시작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밖으로 팽창하고 경계를 세우려는 수컷의 에너지(양)는 그 자체로 필요한 동력이다. 문제는 그것이 ‘암컷의 자리(음)’를 빼앗아버릴 때 발생한다. 포용하고, 순환하고, 낮은 곳으로 흐르는 음(陰)의 에너지가 거세 된 지배력은 반드시 엔트로피를 가속화하고 파괴를 부르기 때문이다. 

세계는 대체로 흩어지는 방향으로 흐른다. 뜨거운 차는 식고, 또렷한 소리는 잦아들고, 형태는 마모 된다. 물리학은 이것을 '엔트로피(entropy, 가능한 상태의 수, 즉 '무질서도'의 척도)의 증가'라고 부른다. 가능성이 적은 상태에서 많은 상태로 이동하는 것, 즉 모여 있던 것이 퍼지는 것. 시간은 그 흐름의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우주에는 자연스러운 방향이 있다. 남아 있음이 아니라, 풀어짐 또는 흩어짐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바로 이 지점에서 생명이 시작된다. 생명은 흩어진 것들을 모은다. 예컨대, 식물은 빛과 공기와 물을 모아 한 장의 잎을 만들고, 인간의 뇌는 전기 신호의 파편들로 생각을 만든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수많은 감각과 기억의 조각들 속에서 하나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다. 세계는 퍼지는데 경험은 또렷해 진다. 이걸 우리는 '신트로피(syntropy, 흩어짐, 아니 무질서에 맞서, 질서와 의미를 향해 모여들게 하는 경향성)'라 부른다.

민웅기의 잘 정리된 다음 글이 마음에 든다. "진정한 통합은 어느 한쪽이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두 에너지의 ‘상호 침투'에서 일어난다. ‘암컷의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여성성으로의 퇴행이나 남성성에 대한 굴복이 아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고정된 자아와 편협한 이분법을 비워내고, 세상의 모든 흐름을 받아들이는 ‘계곡(谿)’이 되는 전략적 고지(高地)를 점령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스스로를 낮추어 만물을 담아내는 계곡의 정치는, 지배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가장 강력하게 세상을 품어 안는다. 대립적 길항은 결국 시스템을 쪼개지만, 음양의 도는 분절된 조각들을 다시 하나의 생태계로 엮어낸다. 페미니즘이 지향해야 할 종착지는 남성성과의 투쟁에서 승리한 ‘또 다른 남성적 권력'이 아니다. 성별이라는 범주를 넘어, 팽창하는 힘(雄)과 수용하는 지혜(雌)가 내 안에서, 그리고 우리 사회 안에서 조화롭게 춤추는 ‘통합적 실존'인 것이다."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 그러니까 음과 양의 통합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적대적 관계가 아닌, 팽창과 수렴이라는 우주적 운동의 보완적 요소로 인식하는 동양적 관점이고, 통합적 실존이란 젠더의 이분법을 넘어, 개인의 내면에서 음양의 에너지를 조화롭게 운용하는 고도의 생명적 지혜인 것이다.

 그리고 좋은 제안을 한다. "오늘 우리가 ‘암컷의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대립을 멈추고 시내가 되겠다는 선언이다.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上善若水, 상선약수). 물은 거의 도에 가깝다(故幾於道, 고기어도). 이제 투쟁으로 갈라진 사회의 균열 위에 부드러운 물을 채워 넣자. 그때 비로소 우리는 적대적 길항이라는 좁은 감옥에서 벗어나, 우주적 순환이라는 거대한 강물로 함께 흐르게 될 것이다. 결국 승리하는 자는 정복자가 아니라,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많은 것을 품은 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좋은 물을 큰 겁으로 마신다. 내 몸에 물을 흐르게 하고, 이 몸으로 세상에 물을 흐르게 하는 일을 하자고 다짐한다.

3
계곡에서 물로 흐르는 인간은  팽창과 수렴의 생태학을 터득한 사람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려 한다. 사회적 지위를 구축하고, 효율을 극대화하며, 타인보다 앞서 나가려는 욕망 같은 것은 태초의 빅뱅이 우주를 팽창 시키듯, 자신의 존재를 시공간 속에 강력하게 각인하려는 필연적인 ‘수컷의 에너지’, 양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매일 <인문 일지>를 쓰는 것이다. 인문 정신을 갖는다는 것, 인문적으로 산다는 것은 보편적으로 완성된 이론을 내면화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기가 처한 상황, 그곳에서 자기 눈으로 발견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덤비는 인문적 활동으로 일상을 채우는 것을 말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대답하는 삶에서 질문하는 삶으로 건너가는 일이다. 이론을 숙지하는 삶에서 문제에 빠져드는 삶으로 전환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뇌(특히 좌뇌)는 항상 재잘거린다. 한순간도 쉬지 않고 뭔가를 떠들어 댄다. 그러면서 생각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래 우리는 이 산만함에 맞서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것이 수렴과 집중이다. 요즈음 자신의 힘을 절제하지 못해, 원심력에 의지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 잔뜩 먹기만 하고, 발산하지 못해서 그렇다. 그런 사람은 중독을 유발하여 결국 자신을 파멸시키는 쾌락, 자극, 새로운 것을 항상 하이에나처럼 찾아다닌다. 쉽게 웃음과 울음을 자아내는 촌극을 감동이라 평가하고, 세네카의 구심력 찬양 문구인 ‘카르페 디엠(carpe diem)을 건배사로 착각하고  니체의 고통을 삶의 일부로 수용하라는 혜안인 ‘아모르 파티(amor fati)'를 노래방 춤 쯤으로 여긴다. 원심력에 경도되어 있는 사람은 힘이 없고 불안하고 산만하다.

반면, 원심력을 구심력으로 제어하기 위해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힘이 있다. 그런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원심력의 과시를 희생하여야 한다. 나는 이 구심력과 원심력의 조화를 위해, 아침 마다 <인문 일기>를 쓴다. 자꾸 밖으로만 출렁이는 생각과 본능에 영향을 받는 사람은 무기력하지만, 그것들을 제어하고 조절하여, 그 힘을 비축하는 사람은 강력하고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그 원심력을 제어하고 조절하는 힘은 인문 정신에서 나온다.

노자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거대한 팽창의 한복판에서 묵직한 반전을 제안한다. “수컷을 알고서 암컷을 지키면, 천하의 계곡이 된다(知其雄, 守其雌, 爲天下谿, 지기웅, 수기자, 위천하계)는 거다.” 물론 이 말은 단순한 처세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것은 우주, 사회, 그리고 생명이라는 세 층위의 음양(陰陽)을 관통하는 존재의 법칙이라 본 것이다.

페친 민웅기의 설명이 아주 좋다. 그는 이런 질문을 한다. 우주적 관점에서 생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팽창(陽, 양)과 수렴(陰, 음)의 끝없는 순환이라는 거다. 별이 폭발하며 에너지를 흩뿌릴 때 생명이 탄생하지만, 그 생명이 지속되는 이유는 다시 중력이라는 '수렴의 힘'이 에너지를 붙잡아 질서를 만들기 때문이다. 사회 또한 마찬가지다. 경쟁과 혁신이라는 팽창의 엔진이 시스템을 돌리지만, 그 시스템을 지탱하는 것은 공감과 포용, 즉 수렴의 자양분이다. 만약 팽창만 남은 사회라면 그것은 열역학적 죽음, 즉 엔트로피의 극치로 내달릴 뿐이다. 

또한 이 거대한 우주적 리듬은 우리 몸 안에서 자율신경계라는 정교한 메커니즘으로 구현된다는 거다. 교감신경은 외부의 목표를 향해 달리는 ‘양의 엔진'이다. 우리는 매일 이 엔진을 켜고 사회라는 정글 속을 누빈다. 하지만 이 긴장(교감)의 끝에서 부교감신경이라는 ‘음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인간은, 결국 내부로부터 붕괴될 수밖에 없다.

자율신경계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심장 박동, 소화 체온 조절 등 몸속 기능을 스스로 조절하여 항상성(균형)을 유지하는 말초신경계이다. 이 시스템은 주로 교감신경과 부교감 신경 두 가지로 나뉜다. 교감신경은 위급할 때 몸을 활성화하고, 부교감신경은 편안할 때 몸을 안정시키며, 두 신경은 서로 반대 작용(拮抗作用)을 한다. 항상성(Homeostasis)은 외부의 극심한 변화 속에서도 내면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생물학적이고 존재론적 원리이다.

노자가 말한 ‘지기웅(知其雄)’은 자신의 긴장 상태를 메타 인지적으로 간파하는 지성이다. 내가 지금 성취에 목말라 교감신경을 과도하게 돌리고 있음을, 내 안의 수컷이 거칠게 팽창하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리고 ‘수기자(守其雌)’는 그 긴장 속에서도 부교감신경의 고요를 끝내 지켜내는 생존의 기술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퇴보나 위축이 아니라, 오히려 팽창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고도의 전략적 비움인 것이다. 그렇다면 ‘천하의 계곡이 된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계곡은 낮은 곳으로 흐르기에 모든 물을 받아들인다. 스스로를 낮추어 비운 그 자리로 우주의 모든 에너지가 흘러 들어온다. 사회적 경쟁(팽창)을 수행하면서도, 내면의 고요(수렴)를 잃지 않는 사람은, 세상이라는 파도에 휩쓸리는 파편이 아니라 그 파도 자체를 품어 안는 거대한 계곡 물이 된다.

진정한 강함은 팽창하는 힘 그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팽창하면서도 동시에 수렴할 수 있는 중첩의 능력, 즉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이 몸 안에서 정교하게 맞물리는 항상성(Homeostasis)의 확보에 있다. 세상이 우리에게 더 빨리 달릴 것을 요구할 때, 역설적으로 나는 더 깊게 호흡한다. 수컷의 추진력과 암컷의 포용력이 우리의 심장 박동 안에서 조화를 이룰 때, 우리의 삶은 비로소 우주적 리듬과 동기화된 하나의 위대한 흐름이 될 것이다.

4
노자는 <<도덕경>> 제28장에서 계곡의 운명을 이렇게 말했다. “천하의 계곡이 되면, 영원한 덕에서 떠나지 않고, 마침내 갓난아기의 상태로 되돌아간다(爲天下谿, 常德不離, 復歸於嬰兒, 위천하계, 상덕이별, 복귀어영아).”

우리는 아직도 ‘비움’을 상실이나 퇴보로 오해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우주적 관점에서 비움은 ‘가능성을 확보하는 가장 고도의 질서’인 것이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닫힌 시스템은 무질서(엔트로피)를 향해 나아간다. 질서란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를 밖으로부터 유입하고 그 흐름을 수용할 때만 유지되는 ‘열린시스템’의 기적이다. 계곡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며 만물을 받아들이는 것은, 바로 이 엔트로피를 역행하여 자기만의 질서를 구축하는 우주적 생존 전략이지 않을 까라고 설명한다. 잘 알아 듣겠다. 열린 시스템(Open System)은 에너지와 정보를 외부와 끊임없이 교환하며, 엔트로피를 낮추고 질서를 유지하는 생명과 우주의 원리이다. 그러니까 외부 환경과 에너지, 물질, 또는 정보를 활발히 주고 받는 구조이다.

사회적 관계 또한 마찬가지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아(Ego)라는 단단한 성벽을 높이 쌓은 사람은 타인의 에너지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니 고립된 채 자신의 무질서 속에서 소진된다. 하지만 스스로를 ‘게곡’으로 낮춘 사람은 다르다. 그는 타인의 지혜, 환경의 변화, 예기치 못한 우연이라는 에너지를 받아들이는 데 망설임이 없다. 이를 다시 사회학적으로 말하자면, 낮은 곳에 머무는 자만이 네트워크의 중심이 된다. 모든 물이 모여드는 곳은 가장 높은 산봉우리가 아니라, 가장 깊고 낮은 골짜기인 까닭이다.

또한 이 ‘낮음의 역학’은 생물학적으로도 증명된다고 했다. 신경과학에서 말하는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MN)’는 우리의 뇌가 외부 과업(Task)이라는 성취의 짐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활성화된다. 뇌가 ‘비어 있을 때’ 비로소 흩어져 있던 기억의 파편들이 연결되고, 창의적 통찰이 발현된다. 오랜 진화 과정에서 뇌는 특별한 선물을 얻었다. 바로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가 그것이다. 외부의 정보가 뇌에 전해지는 통로 즉 감각 정보가 단순해졌을 때 뇌의 이 네트워크는 오히려 활성화된다. 이 역시 뇌의 활발한 활동이다. 정보의 유입이 적어지면서 불필요한 정보를 정리하고 지우기도 하는 등 뇌 안에 여유 공간을 확보한다. 많은 뇌과학자가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에 의해 확보된 이 여유 공간을 통찰력과 창의성의 생물학적 원천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핵심은 정보의 유입을 최소화해야 한다. 즉,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는 등 모든 감각 기관을 잠시 쉬게 하는 것이다. 뇌과학이 알려 주는 좋은 쉼의 조건은 바로 이것이다. ‘뇌의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MN)를 깨워라!’

갓난아기(嬰兒)의 상태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퇴행이 아니다. 그것은 고착화된 신경 회로와 사회적 가면(Persona)이라는 편향된 알고리즘을 초기화하여, 우주가 허용하는 최대치의 가능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갓난아기는 해맑고, 순수한, 아직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갓난 아기는 성별이 구별되기 이전이다. 그러니까 '항상 덕이 떠나지 않아 어린 아이와 같이 순수한 상태로 돌아 간다'는 거다. 다시 말하면,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노자가 말한 ‘상덕불리(常德不離)’는 바로 이 상태를 말한다. 자신을 비워 계곡의 물이 된 사람은 우주가 흐르는 방향과 일치한다. 장자의 말 대로 '순기자연(順其自然)'한다. 그는 저항하지 않기에 멈추지 않는다. 팽창과 수렴, 긴장과 이완이라는 우주적 음양의 리듬이 그의 안에서 끊김 없이 순환하는 상태. 그것이 바로 ‘영원한 덕’이 떠나지 않는 경지일 것이다. '순기자연'은 사물이 흘러가는 대러 억지로 힘쓰지 않고 자연스럽게 내버려둔다는 말이다. 인위적인 조작 없이 순리대로 살아가는 거다. 노자가 말한 '무위자연'과 통하는 말로, 억지로 바꿀 수 없는 상황에 마음을 비우고 흐름에 맡기는 거다.

우리가 나 자신을 증명하려 애쓰느라 혹 지쳐 있다면 다음을 기억하자고 했다. 강함은 깨지기 쉽지만, 비움은 결코 파괴될 수 없다. 그러니 자신을 낮추어 세상의 모든 흐름을 수용하는 계곡 물이 되는 거다. 자신이 비워낸 그 텅 빈 공간이야 말로, 자신이라는 존재가 우주와 가장 완벽하게 연결되는 지점이자, 가장 창의적인 질서가 시작되는 자리일 것이다. 그러니까 강박(강박)이나 집착을 내려놓고 흐름을 타는 거다. 내가 낮아진 만큼, 나는 더 넓은 우주의 품에 안기게 될 것이다.

5
연중 제17주간 화요일로 <마태오 13,36-43>로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하시다" 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와, “밭의 가라지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지금 여기에서 나>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 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마태 13,41-43)

끝내
온 누리
밝음이리니
지금여기에서

기꺼이
밝음이리라
끝내
온 누리
기쁨이리니
지금여기에서

기꺼이
기쁨이리라
끝내
온 누리
착함이리니
지금여기에서

기꺼이
착함이리라
끝내
온 누리
나눔이리니
지금여기에서

기꺼이
나눔이리라
끝내
온 누리
돌봄이리니
지금여기에서

기꺼이
돌봄이리라
끝내
온 누리
섬김이리니
지금여기에서

기꺼이
섬김이리라
끝내
온 누리
살림이리니
지금여기에서

기꺼이
살림이리라

- 온누리는 전부 도는 모두를 뜻하는 온과 세상을 에스럽게 이르는 누리가 합쳐진 온 세상을 뜻한다.

6
나는 내 안의 그림자를 서둘러 없애려고만 하지 않고, 주님의 인내 속에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2026/7/28/연중 제17주간 화요일
마태오 복음 13장 36-43절: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내 안의 ‘그림자’와 함께 자라기
우리는 삶이 늘 명쾌하게 정리되기를 바랍니다. 내 마음의 믿음은 깊어지고, 약함은 금세 사라지기를 기대하지요. 하지만 실제 우리의 내면은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 곁에는 언제나 차가운 이기심과 인간적인 계산이 공존합니다. 심리학자 칼 융은 인정하기 싫은 내 안의 부정적인 모습들을 ‘그림자’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이 그림자를 서둘러 잘라 내거나 없애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오늘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를 수확 때까지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두라고 하십니다. 가라지를 뽑으려다 밀까지 다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 안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억지로 부정하거나 억압하지 말고, 인내심을 갖고 수용하라는 영적 격려이기도 합니다. 심리적 성장은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빛과 그림자를 모두 통합해 나가는 과정입니다. 흔들림과 부족함 속에서도 우리 안의 선한 씨앗은 조금씩 익어갑니다. 그러니 오늘 내 안의 가라지 같은 모습에만 매몰되어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그 어둠마저도 당신의 빛으로 감싸 안으며, 우리가 인내로 성숙해지기를 기다려 주십니다. 진동길 마리오 신부(마산교구)/생활성서 2026년 7월호 '소금항아리'에서

7
2026년 7월 28일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속의 어둠과 아픔을 정직하게 직시하게 합니다. 동시에 그 고단한 현실 너머에 준비된 하느님의 최종 승리와 영광을 약속하며 우리에게 큰 희망을 전해줍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참혹한 위기에 처한 조국 유다를 바라보며 피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가뭄과 전쟁으로 땅은 메말랐고, 백성들은 굶주림과 칼날 앞에 쓰러져 갑니다. 예언자는 이 비극을 목격하며 하느님의 슬픈 본심을 다음과 같이 대변합니다.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다. 처녀 딸 내 백성이 몹시 얻어맞아 너무도 참혹한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예레 14,17).
예레미야가 흘리는 눈물은 단순한 절망의 눈물이 아닙니다. 비록 백성들의 죄 때문에 닥친 재앙일지라도, 그들의 아픔을 자신의 등에 지고 하느님 앞에 나아가 “당신의 이름을 보아서라도 저희를 저버리지 마십시오”라고 매달리는 간절한 ‘중재의 눈물’입니다. 우리 삶 역시 때로는 황량한 벌판 같을 때가 있습니다. 내 잘못이나 세상의 모순으로 인해 영적 가뭄과 마음의 상처를 입고 눈물지을 때, 주님은 그 눈물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자비로운 눈길로 우리와 함께 아파하고 계십니다.
세상에 왜 이토록 아픔과 모순이 가득한지,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가라지 비유’를 통해 그 영적 비밀을 명확히 설명해 주십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주님이시고 밭은 세상이며,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들입니다. 하지만 그 밭에는 한밤중 몰래 가라지(악마의 자녀들)를 뿌려놓은 원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느님이 살아계신다면 왜 악인들이 판을 치게 내버려 두실까?” 혹은 “왜 성당 안에서도 상처를 주는 사람이 있을까?”라며 의문을 품습니다. 이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명확합니다. 세상 종말의 날까지는 선과 악이 한 울타리 안에서 함께 자라도록 일단 ‘인내하며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당장 가라지를 뽑으려다가는 그 곁에 있는 소중한 밀(의인들)의 뿌리까지 다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악인에게도 회개할 시간을 주시는 하느님의 ‘낭비하는 자비’가 바로 이 기다림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다림이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수확의 때가 오면 주님께서는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세상의 소란함 속에 숨겨져 있던 ‘밀들’의 진가가 찬란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43). 세상에서는 가라지의 극성에 치여 상처받고, 바보처럼 손해 보며 눈물 흘리던 의인들이었습니다. 아무도 그들의 희생과 기도를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 쓸쓸할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시간표가 완성되는 날, 그들은 세상의 그 어떤 별보다 찬란하게,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눈부시게 빛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거칠어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악의 득세는 일시적일 뿐이며, 최종 승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것입니다. 오늘 하루, 내 힘으로 악을 처단하려 조급해하기보다 묵묵히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영양분을 길어 올려 내 영혼을 알찬 밀로 가꾸어 갑시다. 마침내 해처럼 빛나게 될 그 영광스러운 날을 희망하며 당당하게 걸어가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역사의 주인이신 주님, 저희가 세상의 불의와 주변의 가라지들을 보며 쉽게 흔들리고 실망했던 나약함을 용서하소서. 예레미야 예언자처럼 무너진 이웃의 삶을 위해 눈물로 중재 기도를 바치는 성숙한 믿음을 주소서. 세상 종말의 날에 의인들을 해처럼 빛나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가슴에 새겨, 오늘 어떤 시련 속에서도 묵묵히 선을 행하는 올곧은 밀 알갱이가 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