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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추석은/김사빈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1년 전 오늘 공유했던 글이다.

오늘은 추석연휴의 첫날이자, 9월의 마지막 날이다. SNS에 이런 말이 요즈음 돈다. "조상님은 어차피 비대면, 코로나 걸리면 조상님 대면" 소위 '추석강령(秋夕綱領)'이란다. 강령은 행동 규범을 말한다. 조상님을 직접 볼 수 없으니 차례는 굳이 모이지 않고, 비대면으로 지내도 되고, 대면 차례 고집하다 저승 가서 조상님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코로나와 함께 하는 시대에 대면 차례를 자제하라는 뜻으로 이해 하겠지만, 슬픈 일이다.

배철현 교수에 의하면, 추석은 겨울의 죽음을 준비하고 봄의 탄생을 기원하며 자신을 낳아준 부모 혹은 조상에게 예를 갖추는 오래된 의례이다. 동시에 추석은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회귀 본능을 확인하며, 근본을 찾아가는 인간의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의 의례이다.

코로나-19는 인간의 도리이며 본능적인 행위인 귀향을 금지했다. 무시무시한 전염병이 느닷없이 등장해 인류를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전염병에 감염됐거나 감염될 가능성이 농후해 불안하다. 소상공인의 매출은 곤두박질하고 직장은 사람들을 해고한다. 입을 마스크로 가리고, 타인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다. 하루에 몇 번이고 병적으로 손을 씻는다.

그래서 배교수는 인생을 '멋진 춤이 아니라 레슬링'이라고 보았다. 인생은 잘 짜인 안무라기보다 사각 링에서 펼치는 레슬링 경기라는 것이다. "링 안에는 나와 호흡을 맞추려는 파트너가 아니라, 나를 호시탐탐 링 바닥에 넘어뜨리고 목을 조르려는 경쟁자가 있다. 레슬러에게 고통과 예상치 못한 습격은 일상이다. 레슬러에게 링 위는 적 뿐만 아니라 자신의 한계, 감정 그리고 훈련의 성과가 여실히 드러나는 공간이다. 인생에서는 우아한 몸짓이나 감동적인 목소리보다 더 필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삶이란 링 위에서 나를 엄습하는 공격과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한 평상시 고강도 훈련이다."(배철현) 그래 나는 이번 연휴 기간을 체력과 영혼의 근육을 기르는 고강도 훈련 기간으로 삼을 예정이다. 연휴이지만, 쉬지 않고 나의 습관으로 고정된 아침 글쓰기와 산책은 멈추지 않을 생각이다.

그러나 송편을 먹으며 추석 기분은 얻을 생각이다. 추석의 대표음식인 송편의 원래 이름은 '오려송편'이다. '오려'란 제철보다 일찍 여무는 올벼를 뜻한다. 송편이란 이름은 떡 사이에 솔잎을 깔고 찐다는 의미로 소나무 송(松)과 떡 병(餠)을 붙여 부르던 데서 나왔다. 송편이 반달인 이유는 점점 기울어지는 보름달보다 앞으로 가득 차오를 반달을 중시한 우리 조상들의 우주관에서 유래되었다고 본다. 추석에는 달도 둥글고, 과일도 둥글고, 마음도 둥글어진다. 송편을 먹으며, 추석 이후 모든 것이 둥글어지고, 코로나-19도 잡히고, 일상이 정상으로 돌아오길 기도한다. 그래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는 우리 동네 시인이신 김사빈의 시를 읽는다.

추석은/김사빈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고향집 뒷마당 감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보름달이다.

달밤에 달구 잡기 하다 넘어져
무릎이 깨어져 울던 일곱 살이다

한참 잊고 살다 생활에 지쳐
고향 생각나면 달려가던
뒷동산에 만나던 첫사랑이다.

큰어머니가 해주던 찹쌀 강정과
송화 가루로 만든 다석이다

울담 안에서 오가던 정을
건네주던 푸성귀 같은
내 사랑 여인아

책갈피 속에 곱게 간직한
진달래 꽃잎 같은 내 친구야

괴롭고 힘들 때
영혼의 안식처
내 쉼터인 것을

나는 고향 친구들은 만나지 않지만, 형제 자매와 조카들과는 오늘 만나고, 내일 아침 차례를 지내고 조상님들께 술 한 잔 올릴 생각이다. 고향은 나의 까닭이기 때문이다. 고향을 한자로 이렇게 쓴다. 故鄕. 古鄕, 이 게 아니다. 고향은 단지 "단순히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오랜 시간 전의 동네"가 아니다. 故자는 '연고'고, '근거'고, '원래'이고, '본래'를 의미한다. '까닭'이자 '연유'다. 그러니까 고향은 나의 본래 모습, '원래의 나'가 있었던 곳이다. 거기서는 내가 '일반명사'로 이탈하지 않고, '고유명사'로 살아 있을 수 있었다. 고향에 산다는 것은 '나'로 사는 일이다. 내가 '나'로 존재하지 않고, '우리'의 일원으로 존재해 버리면, 그것은 모두 타향살이다. '나'를 삶의 주인으로 두지 못하고, 그 주인 자리를 화장기로 꾸며 놓은 뻣뻣한 가면에 양보하고 사는 사람은 고향을 잃고 방랑하는 사람이다. 고향은 바로 내가 나로 드러나는 곳이다. 네 주인 자리를 내가 가지고 있는 사람, 모두 고향을 떠나지 않거나 고향으로 되돌아 온 사람이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의 영웅 오디세우스는 트로이전쟁에 참전해 승리를 거둔 뒤, 트로이에 남아 살지 않았다. 그는 트로이 전쟁 참전 10년 만에 고향 아타카에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전쟁 승리를 통해 획득하는 '명성'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의 뿌리로 돌아가는 ‘회귀(回歸), 또는 '귀향(歸鄕)'의 임무이다. 오디세우스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데만 10년이 걸렸다. 트로이 전쟁 승리만큼 실행하기 힘든 것이 자신의 뿌리로 돌아가는 일이다. 호메로스는 '귀향'을 고대 그리스어로 '노스토스'(nostos)라고 불렀다. 노스토스는 인생이란 여정의 시작이자 마지막이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인 '향수'를 의미하는 '노스탤지어'(nostalgia)가 이 단어에서 유래했다. 배교수의 글에서 배웠다.

그리고 배교수는 코로나-19같은 예상치 못한 공격을 견딜 수 있는 힘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는 어디에서 오는가란 질문을 하고, 그 답으로 홍콩 출산 영화 배우 이소룡의 말을 소개 했다. 이소룡은 그 힘의 원천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는 한 번에 만 번의 발차기를 연습하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한 동작의 발차기를 만 번 연습하는 자를 두려워한다." 인간이 어떤 행위를 의식적으로 반복하면 그것이 무의식적인 행위가 돼 위급한 상황에서 즉흥적으로 등장한다.

그 무의식적인 행위를 우리는 습관이라고 한다. 우리는 습관에 따라 정해진 일상은 불확실한 환경에 위안과 안정을 가져다 준다. 그러니까 좋은 습관은 삶을 편안하게 살도록 해준다. 그렇지만 늘 기억해야 할 것은 인생은 정해진 생각과 행동의 반복 그 이상이다. 인간의 삶은 단순히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흠모하는 삶을 위험에도 불구하고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인생으로 쇼펜하우어는 돈키호테를 모델로 삼았다.

이어지는 글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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