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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자기 자신 그리고 타인과 보다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더 행복하다.

6년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오늘 아침의 질문은 '잘생기고 예뻐야 행복한가'이다. '못생겨서 우리는 불행한가'이다. 미리 답부터 하면, 아름다움=행복의 등식은 허상이다. 그보다는 '자기 자신 그리고 타인과 보다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더 행복하다'이다.

나는 섹시하다는 말을 잘 설명하지 못했다. 무엇이 섹시한 것인가? 원시 미술의 주먹도끼를 보다가 알아차렸다. "섹시한 주먹도끼 이론(Sexy Hanaxe Theory)"(진화 생물학자 메렉 콘)이 있다. 멋지게 만든 주먹도끼를 가져가면 이성에게 잘 보일 수 있다. 그러니까 유혹하기가 쉽다. 그건 머리가 좋다는 증거가 될 수 있는 거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자기 보존 본능과 자기 복제 본능, 쉽게 말해, 생존과 번식의 본능이 프로그램 되어 있다. 그러니까 머리가 좋은 자식을 갖고 싶어, 생명체는 자신을 섹시해 보이게 하는 것이다. 이게 내 생각이다.

유혹이야기 좀 하고 싶다. ‘유혹하다’라는 의미의 'seduce'라는 단어는 라틴어 'seducere'에서 나온다. 'se'는 'away', 즉 '떨어져 있음'을 의미하고, 'ducere'는 'lead', 즉 '이끈다'는 의미다. 연결해보면, 떨어져서 이끄는 것을 말한다. 함부로 침범하고 윽박질러 끌어오는 것이 아닌, 거리를 두고 다가오게 하는 일. 나는 여기서 등장하는 거리를 두려움을 넘어선, 상대에 대한 존중이자 자율성의 공간이라고 받아들인다. 그래 유혹은 모든 관계의 기초라고 한다.

유혹은 기술이다. 먼저 상대방에게 내가 위험한 상대가 아니라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상대임을 설득하며 다가가고, 그 때 타자성을 인정하고, 상대의 욕망을 살펴보며 고민하는 과정 속에서 끈기를 갖고 기다린다. 이 과정에서 타자성을 인정하는 일은 두렵고 힘든 인내의 과정이다. 거부당할까 두려워 도망가거나 공격적인 태도로 미리 무장하기도 한다. 그 설득은 상대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상대가 나에게 자발적으로 다가오게 하는 일이다. 상대에개 함부로 침법하거나 욱박질러 끌어 오는 것은 유혹이 아니다. 타자성의 발견이란 상대가 나와 다름을 깨닫는 것이다. 유혹은 적극적으로 상대의 욕망을 탐험하고 고민하여 그가 내게 자발적으로 다가오도록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유혹의 기술을 3단계로 정리하면,
-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나임을 설득하며 다가가고,
- 타자성을 발견하고,
- 상대의  욕망을 살펴보려 고민하며 기다리서, 상대가 자발적으로 다가오게 하는 일이다.

다시 아름다움=행복의 등식 이야기로 되돌아 온다.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잘생기고 예쁘면, 아니 섹시하면, 선택지가 더 많아지고 더 조건 좋은 이성(異姓)을 만날 수 있다.  그래 사람들은 성형(成形) 수술을 한다. 우리는 성형 수술을 하면서, 보다 섹시한 '다른 사람'을 욕망한다. 머릿속에 있는 그 '다른 사람'은 완벽한 모습으로 문제 없는 삶을 산다. 그러나 현실은 당연히 그렇게 달라지지 않는다.

이 질문의 답을 찾았다. 나의 '단점'이 내 정체성의 일부일 뿐이지, 내 정체성의 전체가 아니라는 생각을 의식적으로 가지려 하는 것이다. 내가 가난하다는 것도 내 정체성의 전부가 아니다. 단지 일부일 뿐이다. 나의 멋진 정체성은 여럿이다.

선택지가 많아지면 행복하다. 정말 그럴까? 소설가 백영옥의 칼럼에서 만난 생각이다. 바스 카스트의 책 『선택의 조건』에 따르면, '누구를 사귈 것인가'라는 선택에서, 연애를 하면 할수록, 상대를 바꾸면 바꿀수록 만족도는 더 낮아진다고 한다. 심리학자 대니얼 길버트는 이런 현상을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이 원하는 경험이 아닐 때, 사람들이 재빨리 다른 경험을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가령 맘에 안 드는 렌터카는 되돌려주고, 형편없는 음식이 나온 레스토랑에서 나와 버리고, 말 많은 SNS 친구는 바로 차단하는 식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경험을 바꿀 기회가 없는 경우에만 기존 관점을 바꾼다고 한다. 이 말은 당장 이혼할 수 없기에 배우자에게서 장점과 고마움을 찾아내고, 바로 교체할 수 없기에 낡은 아파트를 수리하고 아끼게 되며, 되돌릴 수 없기에 밤마다 울고 집을 엉망으로 만드는 아이에게서 사랑스러움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도망가거나 취소할 수도 없을 때, 우리는 드디어 관점을 바꾸고 지금 일어난 일에서 긍정적인 면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니까 선택 가능성이 많이 열려 있다는 게 꼭 좋은 것은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인간은 '내가 다른 걸 선택했더라면 어땠을까' 후회를 하며, 행복해 하지 못한다.

오늘은 한글날이라 일정이 없다. 딸과 가을 들판을 좀 걸으며, 가을을 맞이하러 나갈 생각이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는 40년 전의 시이지만, 지금도 달라지지 않은 현실에 나도 슬프다. 아파트의 이름들이 죄다 외래어풍으로 꼬부린 이름들이다. 나열해 볼까. '뷰', '빌', '타운', '파크', '캐슬', '타워' 등이다. 요즈음 젊은이들이 쓰는 말들도 슬프다. "2만이세요."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나오셨어요." "Latte is horse(나 때는 말이야)." "여병추(여기 병신 하나 추가요)." 사람은 언어를 통해 사고하고 행동하며, 이 사고와 행동이 축적되어 문화를 형성한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고 했다.

식민지의 국어시간/ 문병란

내가 아홉 살이었을 때
20리를 걸어서 다니던 소학교
나는 국어 시간에
우리말 아닌 일본말,
우리 조상이 아닌 천황을 배웠다.

신사참배를 가던 날
신작로 위에 무슨 바람이 불었던가,
일본말을 배워야 출세한다고
일본놈에게 붙어야 잘 산다고
누가 내 귀에 속삭였던가.

조상도 조국도 몰랐던 우리,
말도 글도 성까지도 죄다 빼앗겼던 우리,
히노마루 앞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말 앞에서
조센징의 새끼는 항상 기타나이가 되었다.
어쩌다 조선말을 쓴 날
호되게 뺨을 맞은
나는 더러운 조센징,
뺨을 때린 하야시 센세이는
왜 나더러 일본놈이 되라고 했을까.

다시 찾은 국어 시간,
그날의 억울한 눈물은 마르지 않았는데
다시 나는 영어를 배웠다
혀가 꼬부라지고 헛김이 새는 나의 발음
영어를 배워야 출세한다고
누가 내 귀에 속삭였던가.

스물다섯 살이었을 때
나는 국어 선생이 되었다.
세계에서 제일 간다는 한글,
배우기 쉽고 쓰기 쉽다는 좋은 글,
나는 배고픈 언문 선생이 되었다.
지금은 하야시 센세이도 없고
뺨 맞은 조센징 새끼의 눈물도 없는데
윤동주를 외우며 이육사를 외우며
나는 또 무엇을 슬퍼해야 하는가.

어릴적 알아들을 수 없었던 일본말,
그날의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았는데
다시 내 곁에 앉아 있는 일본어선생,
내 곁에 뽐내고 앉아 있는 영어선생,
어찌하여 나는 좀 부끄러워야 하는가.

누군가 영어를 배워야 출세한다고
내 귀에 가만히 속삭이는데
까아만 칠판에 써놓은 윤동주의 서시,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는
글자마다 눈물을 흘리고 있다,
오 슬픈 국어시간이여.

*히노마루: 일장기
*기타나이: 더러운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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