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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내가 원하는 것들로부터 나를 지켜주소서.

5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아침에 눈을 뜨면, 나는 몇 시인가 보려고 스마트폰을 잡는다. 아주 나쁜 습관이다. 그러면서 침대에서 30분을 보낸다. 오늘 아침은 그 시간에 눈이 번쩍 뜨이는 문장 하나를 만났다.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 "지킨다"는 말이 끌렸다. 무엇이 아름다움인지? 내가 누구인지? 이런 질문은 자주 하지만, '지킨다'는 말은 자주 소홀히 한다.

자주 나는 이 문장으로 흩어지려는 나를 보호한다. 'Protect me from what I want(내가 원하는 것들로부터 나를 지켜주소서).' 정말 '나를 지킨다'는 것은 쉽지 않다. 정말 나를 지킨다는 것이 늘 깨어 있지 않으면, 어렵다. 그래 정약용은 자신의 방 이름을 "수오실(守吾室)"이라 지었는가 보다. '나를 지키는 방'이란 말이다. 이 이름은 정약용의 형 정약전의 서재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굳이 나를 지킬 필요가 있는가? 항상 나 자신에게 '나'는 찰싹 달라붙어 있는데 말이다.

정약용은 형님의 서재에 붙인 이름에 대해, '유배 생활을 하다 보니 그 깊은 뜻을 깨달었다 한다. '나'라는 것을 지키기가 어렵다는 것을. '나'는 잠시라도 제대로 보살피지 않으면, 출세에 혹하고, 돈에도 혹하며, 미인에게도 혹해 버리기 일쑤이다. '나'라는 존재는 한번 유혹에 휩쓸리면 다시 돌아오기도 어려우니, 붙잡을 수도 머무를 수도 없는 존재임을 깨달었다는 것이다. '나(吾)를 잘 못 간직했다가 나(吾)를 잃은 자'라고 정약용은 고백했다. 그는 욕심과 야망에 이끌려 진정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과거를 부끄러워했다.

오늘 아침은 '박사 농부' 영혼에 반한 도시 소설가 김탁환이 낸 에세이집 제목에서 시작된 사유이다. 오늘 아침 책을 주문하여 읽고, 다음 주에 두 사람의 만남 이야기를 공유할 생각이다. 살다 보면, 만남이 중요하다. 사람마다 결이 다르고 향기가 있다. 서로의 결과 향기가 뒤섞여 또 다른 결을 만들고 다른 향기를 피어 올리는 게 만남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만날 수 없으니, 최근에 SNS에서 아름다운 글을 만나면 그런 향기를 맡기 시작했다. 내 아침 글도 많은 이들에게 다른 결과 향기로 다가가, 자신의 결과 향기와 만나, 더 좋은 향기와 결을 만들었으면 한다.

사람이 걸어 온 길도 다 다르다. 비슷한 건 있어도 똑같은 길은 없다. 끊임없는 자기 선택의 반복으로 빚어낸 세상에 하나뿐인 시공간이다. 시시각각 길이 겹치면서 또 다른 길을 내고 누군가는 그 길을 지킨다. 지난 주부터 소수로 아침에 만난다. <대덕몽>의 이름으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아름다움을 지키고 있는 분들을 만나, '나'를 지키기 위해서이다.

나이를 먹는지, 글이 나를 지키지 않으면 길어진다. 오늘 아침도 천양희 시인의 시를 공유한다. 사진도 어린 새를 만난 것이다. 밥 딜런의 노래 가사를 인용한 시어, "얼마를 더 많이 걸어야 인간이 되나." 어린 새는 얼마를 더 걸어야 날 수 있는 새가 될까? 가까이 다가가도 날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 나간다. 이런 생각도 했다. 어린이 마음은 두려운 게 없으니, 내가 다가가도 어린 새는 제 길을 갈 뿐인가?

새가 있던 자리/천양희

잎인 줄 알았는데 새네
저런 곳에도 앉을 수 있다니
새는 가벼우니까
바람 속에 쉴 수 있으니까
오늘은 눈 뜨고 있어도 하루가 어두워
새가 있는 쪽에 또 눈이 간다
프리다 칼로의 '부서진 기둥'을 보고 있을 때​
내 뼈가 자꾸 부서진다
새들은 몇 번이나 바닥을 쳐야
하늘에다 발을 옮기는 것일까
비상은 언제나 바닥에서 태어난다
나도 그런 적 있다
작은 것 탐하다 큰 것을 잃었다​
한 수 앞이 아니라
한 치 앞을 못 보았다
얼마를 더 많이 걸어야 인간이 되나
아직 덜 되어서
언젠가는 더 되려는 것
미완이나 미로 같은 것
노력하는 동안 우리 모두 방황한다
나는 다시 배운다
미로 없는 길 없고 미완 없는 완성도 없다​
없으므로 오늘은 눈 뜨고 있어도 하루가 어두워
새가 있는 쪽에 또 눈이 간다

깨어 있지 않고 욕심에 따라 살다 보면, 아니 까딱 잘못하면 나를 잃어버릴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그것 때문에 그만큼의 양만큼 우리는 고통을 받는다. 사랑이 클수록 실망도 크고 희망이 클수록 절망도 크다.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클수록 함께할 수 없는 지금 이 순간이 고통스럽다. 무언가를 성취하려고 노력할수록 성공하지 못할까 봐 느끼는 두려움도 커진다. 내가 원하는 것들 때문에 나는 나 스스로를 착취하고 궁지에 몰아넣는다. 이런 나로부터 나를 '수오(守吾)'하는 길은 원하는 양을 조절하고, 통제하는 것이다. 그러면 나를 잃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나를 지키는 싸움은 쉽지 않다. 왜? 내가 무엇과 싸우고 있는가를 모르기 때문이다. 잘 싸우는 방법은 '싸움의 타깃'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예컨대, 누군가의 갈등을 빚고 있을 때, '그 사람의 존재 전체'와 싸운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 사람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특정한 생각과 싸우는 것이다.  사람을 싫어할 때도 사실 모든 것을 속속들이 싫어할 순 없다. 그 사람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주장을 싫어하는 것이다.

두려움을 느낄 때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그 사람을 두려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힘을 두려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갈등에 대처하기가 훨씬 더 쉽다. 그리고 실제로 적은 내 안에 있다. '나는 결코 이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니다'라는 나르시시즘에서 나온다. 나는 그때마다, 나 자신에게 말한다. "나는 없다." "I'm nothing." 사실 나는 싸울 일이 별로 없다. 그래서 자유롭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처럼, 원하는 것이 별로 없고, 적으니, 두렵지 않고, 자유롭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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