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2. 인문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1년 8월 17일)

순수 능력주의는 없다. 다 '운칠기삼(運七技三)'이다. 재주(技)가 좋아도 그 역할은 30%밖에 되지 않고 성공에는 주변 상황 등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운(運)의 역할이 70%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인생은 운이 70%이고, 노력이 30%라는 뜻이다. 한 개인의 자질이나 품성, 능력이나 재주보다는 이른바 환경이란 시절 인연이라는 외적 요소가 성공이나 승리에 미치는 영향력이 원들이 크다는 말이다. 그 반대는 쉬지 않고 꾸준히 한 가지일에만 전념하고 뜻하는 바를 이룬다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이다. 한 가지일에만 매진하여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면 언젠가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30%의 운을 끌어들이는 방법 (1) 긍정적인 생각을 많이 한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다. 우리의 의식은 생각의 힘에 의해서 우주 공간과 자연 공간과 연관적인 관계 속에서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2) 긍정적인 생각으로 습관적인 관습이나 행동양식을 만든다.
'운칠기삼'이 이루어지려면 필요한 것으로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는 다음과 같이 3 가지를 꼽는다.
(1) 기다림: 조급함을 멀리하고 평정과 인내를 바탕 삼아서 돌고 도는 운세가 자기에게 도착할 때를 참고 기다린다. 이 때 이루어지는 '자기와의 싸움'이 중요하다. 이때 사욕(사욕)이나 과욕을 조심해야 한다. 오직 기적만 기다리는 자에게는 운이 오지 않는다.
(2) 믿음에 대한 믿음, 이를 우리는 염력(念力)이라 한다. 이를 '굳은 의지'라고도 한다. 운칠의 세계에도 염력이라는 중화제가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필요한 균형이 이루어진다. 염력의 주문은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지리라"이다. 그러면서 일기장에 실패는 지우고, 성공만 기록하며 그 주문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장면을 기록하고 꾸준히 체크해야 한다.
(3) 투신(投身), 즉 몸 던지기이다. 헌신(獻身)의 의미를 가진다. "상대의 목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내 뼈 하나쯤은 줄 수 있다"는 각오로 자신을 던져야 한다. 그 경지를 모르는 사람은 돌고 도는 운세의 흐름을 보지 못한다. 어쩌다 얻게 되는 짧은 행운은 오히려 인생의 독소가 될 수도 있다. 그건 마약과 같다. 잠시 그 시간이 지나면 연이어 닥치는 긴 불은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
운칠기삼이긴 하지만, 잘 보면, 오늘의 나를 만든 건 어제의 내 생각이다. 새상 살이에서 사람의 능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운이라는 존재를 인정하고, 또 그 운의 막대한 영향력을 인정하지만, 30%의 노력도 무시하면 안 된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의 기회는 온다. 그 때를 잘 잡기 위해서는 30%의 노력은 최소한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좌절할 필요가 없다. 그냥 존재하면 누구에게나 운이 한 번은 핀다. 그러니까 잊지 말하야 할 것이 정 그 운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전제 조건인 사람이 꼭 있어야 한다. 운이 존재하려면 먼저 사람이 존재해야 한다. 오늘의 나를 만든 건 어제의 내 생각이고, 내일의 나를 만드는 건 오늘의 내 생각이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세월은 나를 보고 덧없다 하지 않고
우주는 나를 보고 곳 없다 하지 않네
번뇌도 벗어 놓고 욕심도 벗어 놓고
강같이 구름 같이 말없이 가라 하네
(나옹 선사, 1320-1376, 고려 후기 고승)
지난 주 읽은 <<장자>>의 "덕충부" 마지막 문장이 소환된다. 장자가 말하는 "무정(無情)"은 절제와 균형을 말하는 것이다. '무정'에 대한 혜자와 장자의 생각이 다름을 보여준다. 혜자는 무정을 감정이 없는 상태로 보아 사람에게 어찌 감정이 없을 수 있겠느냐는 주장을 하고, 장자는 그것을 감정을 넘어선 경지,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 경지로 보어 이런 경지에 도달해야 정말로 싱싱하고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물론 성인이라고 해서 목석이 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성인도 기쁠 때 기뻐하고 슬플 때 슬퍼하되 보통 사람의 기쁨이나 슬픔과 다르다. 첫째, 성인은 그런 기쁨과 슬픔에 압도되어 헤어날 수 없을 정도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자의 말을 빌리면, "기뻐하되 거기에 빠지 않고, 슬퍼하되 정신을 못 차릴 정도가 되지 않는다(樂而不淫, 哀而不傷, 낙이불음 애이불상)."
하늘(自然, 道)에만 의지해 사는 성인에게는 '정(情)'이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을 혜자는 장자에게 물고 늘어진다. 원문을 읽어 본다. "吾所謂无情者(오소위무정자) : 내가 정이 없다고 하는 것은 言人之不以好惡內傷其身(언인지불이호오내상기신) : 사람이 좋고 나쁨에 의해 스스로의 몸 속을 해치지 않고 常因自然而不益生也(상인자연이불익생야): 언제나 자연을 그대로 따르면서 부질없이 삶을 덧붙이려 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익생(益生)에 방점을 찍는다. 익생은 일상의 군더더기를 말한다.
다르게 해석하면, "내가 말하는 정이란 그런 것이 아닐세. 내가 정이 없다고 하는 것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으로 속상하는 일이 없다는 것, 언제나 모든 것을 그대로 놓아두고, 삶에다 억지로 군더더기를 덧붙이려 하지 않는 것을 이름일세."
그러자 혜자가 다시 묻는다. "不益生(불익생) : ‘삶을 덧붙이지 않고, 何以有其身(하이유기신) : 어떻게 그 몸을 지켜 갈 수 있겠는가?" 장자가 대답하였다. "道與之貌(도여지모) : ‘자연의 도리가 얼굴 모습을, 天與之形(천여지형) : 베풀어 주고 자연이 몸의 형태를 베풀어 주었다." 无以好惡內傷其身(무이호악내상기신) : 그리고 좋고 나쁨의 정에 의해 스스로의 몸 속을 해치지 않게 한다. 今子外乎子之神(금자외호자지신) : 지금 자네는 자기 마음을 밖으로 향한 채, 勞乎子之精(노호자지정) : 자신의 정력을 지치게 하고, 倚樹而吟(의수이음) : 나무에 기대 서서는 신음하며, 據(槁)梧而瞑(고오이명) 책상에 기대서는 졸고 있네. 天選之形(천선지형) : 자연이 자네 형체를 가려내어 만들어 주었는데, 子以堅白鳴(자이견백명) : 자네는 그것도 모르고 쓸데없는 변론으로 떠들고 있는 것일 세."
다르게 해석하면, "도가 얼굴 모양을 주고, 하늘이 형체를 주었으니,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으로 속상하는 일이 없는데 지금 자네는 자네의 정신[마음가짐, 생각]을 겉으로 드러내 놓고, 정력을 쓸데없이 소모하면서, 나무에 기대어 신음하고, 책상에 기대어 졸고 있네. 하늘이 자네의 형체를 골라 주었는데 자네는 지금 견백론 같은 것으로 떠들고 있네. 그려."
이 긴 인용문을 한마디로 하면, 공자도 말한 "낙이불음, 애이불상"이다. 공자는 관저(關雎, 꾸욱꾸욱 하고 우는 물수리(새))라는 시를 평하며 말하기를 "낙이불음, 애이불상"이라 했다. 즐거우면서도 음탕하지 않거나 저속하지 않았고, 슬퍼하되 마음을 상하지 않았다. 지나치게 마음의 상처를 나타내는 표현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절제되고 중화(中和)된 표현을 했다는 것이다.우리들의 삶에도 적용 가능하다. 군자가 가져야 할 기쁨과 슬픔의 경계를 말하는 것이다. 슬픔이 지나쳐 마음의 평상심을 상하게 하는 데까지 가서는 안 되며, 즐거움이 아무리 커도 지나쳐 정상을 일어서는 안 된다.
내가 기쁘다고 주변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호들갑을 떨며 지나치게 기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어려움을 당한 사람의 입장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는 지나친 나의 기쁨은 남의 질시를 불러올 수 있다. 슬픔이 지나쳐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의 성정이 조화를 잃으면 병이 된다. 평상심을 잃지 않고 성정의 바름을 유지하는 것이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다.
둘째 기뻐하고 슬퍼하되 그 기쁨과 슬픔이 나의 이해 관계에서 생기는 감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체의 이기심이나 집착, 사감 없이 느끼는 순수한 감정이 무정이다. 따라서 무정이란 감정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보통 감정을 넘어선 감정이란 뜻이다. 그야말로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이랑 두지 말자" 하듯이 애증과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활달하고 트인 마음, 빈마음에서 작용하는 티 없는 감정의 흐름일 뿐이다.
나훈아가 부르고, 김석야 작사, 김호길 작곡 <하숙생>이라는 노래 가사이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말자 미련일랑 두지말자
인생은 나그네 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이런 마음은 어떤 경우에도 끄덕하지 않고 의연히 대처하는 부동심, 평등심, 영어로 해서 equanimity, 프랑스어로는 sang-froid, sérénité 같은 것이다. 외부 상황에 속을 태우지 않고 언제나 차분한 마음으로 정신적 자유를 구가하는 상태이다.
어느 선사가 노래한 것처럼, 호수 위를 날아가는 기러기가 제 그림자를 호수 위에 드리우되 일부러 하지 않고, 호수도 기러기의 그림자를 비추되 일부러 하지 않는 것과 같다. 둘 다 '무심히' 드리우고 무심히 비출 뿐이다.
이런 경지가 있는 줄도 모르고 일상적인 분별심,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의식'에 매달려 안달복달, 시비곡직, 좋고 나쁨을 캐고 앉아 있으면 결국 혜자처럼 나무에 기대어 신음하고 책상 엎드려 졸거나 하는 창백한 지성, 활기 잃은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속에 있는 신(神)[마음]을 밖으로 내쫓는 일이다. 여기서 말하는 신, 마음이 베르그송이 말하는 엘랑 비탈(élan vital), 우리 속에 잠재한 생명력, 그 활기를 말한다. 그 활기를 잃어버렸다는 말 같다.
다정(多情)도 병이런가? 어떤 육체적 조건이나 외부 환경에도 흔들리지 않는 무정의 경지, 어떤 고정 관념이나 집착에서 벗어나 의연하게 마음의 참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말로 끝을 맺은 셈이다. 이걸 요즈음 쓰는 말로 하면, '신경 끄기'라 말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신경 끄기'는 '무심함'이 아니라, 다름을 받아들이는 거다, 실패, 수치, 몇 번의 '폭망'에도 신경 쓰지 않고, 어떤 일이 있어도 자기가 믿는 바를 행하며, 그것이 옳다고 여기기에 그 일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신경 끄기'의 본질이다. 그리고 중요한 일에만 신경 쓴다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인생에서 중요한 본질을 찾고, 사소한 일에는 신경 끄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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