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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피처 : 2021년 2월 5일: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읽고: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다. (3)

1529.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대전 갑천 상류

 

한참 돌아 왔다. <동물농장> 소설 속에서 반성 능력이 없고 착하기만 한 복서라는 말(馬)이 문제이다. 그 등장동물은 독재자가 야기한 비효율도 다 자기 책임으로 돌리며, 독재자 "나폴레온은 언제나 옳고", "내가 더 열심해야 한다"는 다짐을 하지만, 이 다짐으로 권력자 돼지들은 더 특권화 될 뿐이었다. 소설 속에서 복서의 말로(末路), 죽음을 우리는 잘 볼 수 있다. 그는 독재자 나폴레온만 따르면, 자신이 조금이라도 더 일하면, 모든 동물들이 평등해진 이상 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말 도살장에게 넘겨져 돼지 집권층들의 위스키 한 상자로 돌아와 소비될 뿐이다. 위스키 한 상자로 소비된 복서는 독재의 소모품일 뿐이지만, 무지라는 환각제를 맞은 상태라 언제나 당당하고 헌신적이었다. 어쩌 면 이 복서라는 등장 동물이 생각하지 않고 사는 우리들의 무지한 민중일 수 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독재자와 맞서야 할까? 삶의 진실은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것 너머의 개성적인 환상을 쫓으면서 커진다. 각자의 삶은 여기서 차이가 난다. 그러므로 전체주의적 독재자들은 언제나 이 생존 이상의 것들을 제거하려 한다. 모든 삶은 생존 이상을 향해 건너가려는 몸부림이다. 자기를 제한하며 멈추게 하는 울타리를 넘으려는 꿈은 모든 생명체들의 당연한 생명활동이다. 소설 속에서는 "제일 우둔한", "흰말 몰리"가 깃발이 완장으로 전락한 혁명의 남루한 대오에서 용기를 내어 이탈한다. 자신의 자유와 개성을 위해.

 

몰리는 반란을 준비하며 대오를 갖춰가던 때에 이런 질문을 한다. "반란 이후에도 설탕이 있을"지를 묻는다. 반란 지도자 스노볼은 단호하게 "아뇨"라고 대답하며, "당신한테 꼭 설탕이 필요한 것도 아니잖소? 귀리와 건초는 당신이 얼마든지 먹고 싶은 대로 먹게 될 거요." 몰리는 또 묻는다. "그때 가서도 내가 갈기에 댕기를 매고 다닐 수 있을까요?" 반란 지도자 스노볼은 몰리를 비웃으며 댕기는 노예의 표시하고 일축하며 매서는 안 될 것임을 분명히 한다.

 

귀리와 건초와 달리 댕기와 설탕은 생존을 돕는 직접적인 것들이 아니다. 필수불가결한 것이 아니며, 생존 너머에 있는 것이다. 생존 너머의 것은 생존을 생존 이상으로 끌어 올린다. 동물농장에서도 누구나 평등하게 산다는 이념을 집행하기 위해 생존 이상의 것들은 모두 제거해서 생존에 필요한 것들로 삶을 채우게 하려 했다. 몰리를 몰리에게 하는 것은 어떤 말이나 다 먹는 건초나 귀리가 아니다. 필요 없다는 댕기가 오히려 몰리를 몰리이게 해준다. 언제부턴가 몰리는 한참이나 "울타리 너머를 바라보"곤 했다. 혁명 지도자들이 생존에 직접적으로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아무리 세차게 금지하더라도 생명체는 언제나 울타리 너머를 포기하지 못한다. 몰리에게 울타리 너머는 설탕이고 댕기였다.

 

소설 속에서 몰리는 선동에 쉽게 휩쓸리는 간교한 지혜가 아니라, 투박하지만 진실한 자신 만의 고유한 활동성을 '우둔함' 속에 묻어둔 말(馬)로 등장한다. 몰리의 "집단 밑에는 각설탕 덩어리들과 형형색색의 댕기다발들이 여러 개 숨겨져 있었다." 혁명의 질서에 참여하지 못할 정도로 "우둔한" 몰리는 혁명의 이념이 들어서야 할 자리를 생명의 불꽃으로 채웠고, 마침내 혁명의 대오를 이탈해 "사라졌다." 몰리는 마을로 내려가 "앞머리에 분홍색 댕기를 달고", 술집 주인같이 생긴 남자의 마차를 끄는 삶을 시작했다. 혁명 주도세력이 볼 때는 다시 인간에 종속되는 노예적 삶으로 돌아간 것 같지만, 몰리는 소설 속에서 "석 기분이 좋아 보였다"고 묘사된다. 자신의 삶을 혁명의 이념에 종속 시키지 않고, 댕기라고 하는 자신 만의 욕망과 개성에 종속 시킴으로써 몰리는 자유를 찾았다. 자신이 자신으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어제는 좋아하는 선배님이 오셔서 '주님'을 실컷 모셨다. 복합문화공방 <뱅샾62>를 9시까지만 열어야 하니, 손님이 없다. 그런데, 그걸 아시고 일찍 찾아 주시는 분들이 있다.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가 생각난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반성 되는 아침이다. 어제 저녁을 생각하면, 숙취로 머리는 무겁지만, 마음은 따뜻하다. 선배님 처럼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는 아침이다. 오늘 공유하는 시는 곽재구 시인이 소개한 것이다.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이 있다면 우리는 행복하다. 곽재구 시인은 "강을 따라 걸어가며 인사하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흐르는 물에게, 줄지어 선 버드나무에게, 노랗고 하얀 꽃들에게, 바람에 흔들리는 풀들에게. 안녕! 간밤에 좋은 일 없었어라고 묻고, 또 강물 속 물고기에게 묻는다" 한다. 그리고 곽 시인은 "무엇을 위해 강물을 따라 흘러가나? 하하하! 물고기들이 웃는다. “멍청이 같은 이라구! 너는 왜 시를 써?”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며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믿었다"고 덧붙였다. 코로나-19가 생존을 위협하지만, 전쟁 통에 사신 분들도 있는데, 위로하며, 내가 좋아하는 일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산다. 그게 인생이지 뭐?

 

 

무엇을 위해 시를 써왔나/유안진

 

미국의 동서횡단철도 개통 20주년 기념 식장에서

종신 철도원으로 표창 받는 남자에게

한 노동자가 다가와 인사했다

이봐 윌리, 나야 몰라보겠나?

20년 전에 우리 일당 5불을 위해 일했잖아

 

그랬나? 그때도 난 철도가 좋아 일했던 것 같은데

 

 

 

다시 <동물농장> 이야기로 돌아온다. 소설 속의 등장인물이 아니라, 등장동물인 몰리를 통해 나는 다음의 사유로 나아갔다. 물론 최진석 교수의 글을 보며 한 생각들이다. 자신의 정치적 경향이 만든 믿음으로, 아니면 감각적이거나 감정적으로 세상을 대하면, 지성이 사라진다. 지적으로 파악한 세계에는 분명히 높낮이가 있다. 우리는 각자의 노력을 통해 지성으로 자신의 시선을 높이는 데 집중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시선은 지적인 시선이며 높이이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시선의 높이 이상을 살 수 없다. 일상에서 하는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자신이 가진 시선의 높이에 의해서 완전히 결정된다. 여기서 시선의 높이는 지적인 높이이다. 감정이나 감각의 높이가 아니다. 지적인 높이는 추상 정도에 의해 결정된다. 더 추상 되면 더 높아진다. 철학은 정치에 비해 더 추상적이다. 여기서 철학을 이야기 하는 것은 생각하자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추상이 구체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다. 추상(抽象)이란 말은 '여러 가지 사물이나 개념에서 공통되는 특성이나 속성 따위를 추출하여 파악하는 작용"이다. 그러므로 추상이 더 높은 곳에 있는 것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것은 더 낮은 곳에 있는 것보다 영향력의 범위나 두께 크다. 산을 높이 올라가 보면 안다. 학년을 더 놀라가 보면 안다.

 

우리가 빅 피처(Big picture)를 그리지 못하며 전체를 못 보고, 넓게도 못 보는 이유는 넓지 않아서 가 아니라 높지 않아서 이다. 우리는 그것을 '무식(無識)'이라고 한다. 산을 전체적으로 다 보려면, 산보다 훨씬 높은 곳에 올라가 내려다보아야 한다. 따뜻한 마음으로 산과 더불어 나란히 서 있다가는 산 옆구리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래 지성은 차가운 것이다. 차갑게 지성으로 시선의 높이를 끌어 올릴수록 전체를 넓게 보는 능력도 올라간다. 나란히, 더불어, 함께, 따뜻이, 곁에 있는 것보다, 좀 쌀쌀맞고 차갑더라도 높게 있어야 문제를 해결한다. 시선의 높이가 결국은 실력이다. 시선의 높이가 삶의 높이이기 때문이다.

 

분열된 상태를 내려다보는 높은 시선을 갖고 있지 못하면, 통합은 구두선(口頭禪, 실행이 따르지 않는 실속 없는 말)일 뿐이다. 실력 이상의 것에 대해서 하는 모든 약속은 다 허망하다. 시선의 높이 이상은 할 수 없다. 이제는 높이이다. 그래 나는 아침마다 글을 일고 베끼거나 쓰면서 공부한다. 시선의 높이를 위해 생각을 해야 한다.

 

다시 <동물농장>의 이야기 돌아온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함석헌 선생님은 혁명이 혁명으로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혁명가 자신이 혁명 되지 않은 상태에서 혁명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이다. 최진석 교수는 니체의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소개했다. 독재자인 소설 속 돼지 나폴레온은 농장 주인 존스씨의 독재를 타도하고 모두가 평등한 동물들의 이상사회를 세우려고 했으나, 읽기와 쓰기에 거리낌 없이, 자기 한 말을 염치 없이 부실한 내면으로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만의 특권을 깨부수려는 반란이었으나 결국은 자신들이 특권층이 되어간다. 동물들만의 평등한 세상을 완성하기 위해 정한 헌법과도 같은 일곱 계명에도 손을 댔다. 이런 식이다.

 

"어떤 동물도 침대에서 자서는 안 된다"는 "어떤 동물도 시트를 깔고 침대에서 자서는 안 된다"로, "어떤 동물도 술을 마시면 안 된다"는 "어떤 동물도 지나치게 술을 마시면 안 된다"로 바뀐다. 권력자 돼지들을 특권층으로 만들기 위해서 였다. 일곱 계명 가운데 제대로 남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인간들의 특권을 철폐하자던 돼지들이 결국은 자신들의 특권을 건설하는 일에 몰두하게 되었다. 사실, 함석헌 선생님의 말씀처럼, 각성 없는 혁명가들이 일으킨 대부분의 혁명이 다 이렇게 되고 만다. 최진석 교수에 따르면, "말(言)을 무너뜨리는 자들에 게서는 염치와 수치심도 따라서 없어진다고 했다. 염치가 없어야 특권도 만들 수 있는 거다. 소설 속에서 특권층이 된 돼지들이 몰리의 댕기를 노예의 상징이라며 금지하더니 "모든 돼지는 등급에 상관없이 일요일에 녹색 댕기를 꼬리에 매달 특권을 갖는다는 규칙"까지 만들었다. 어용 지식인 역할을 하는 돼지 스퀼러는 혁명 초기에 "두 발은 나쁘고 네 발은 좋다"는 구호를 강하게 외치면서 인간적인 모든 것과 싸웠지만 결국은 자신도 인간을 닮으려고 애를 썼다. 스퀼러는 "두 발로 서서 걷기"도 했다. '동물농장"은 다시 '장원농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 "어느 것이 돼지의 얼굴이고 어느 것이 인간의 얼굴인지 도저히 구별할 수 없었다." 인간 농장 주인 존스를 몰아내고, "일찍이 맛보지 못한 단잠"은 그 말 한 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