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움은 빛을 이기지 못한다.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1월 2일)
1. 건강한 공동체는 민(民)의 수준이 문제이다. 120년 전 올해 있었던, 을사늑약 이후 독립운동가들은 일본으로부터 주권을 되찾으면 그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했다. 다시 고종과 순종에게 줘봤자, 이완용 같은 자들과 함께 또 남에게 넘길 게 분명했다. 주권을 '민(民)'이 나누어 갖고 함께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독립 운동이 민주 국가 수립 운동이자 민주 혁명 운동이 된 이유이다. 그 후 우리는 주권, 아니 나라의 주인이 국민인 민주주의를 위해 꾸준히 싸워 왔고, 잘 지키고 있다. 다른 나라들이 우리를 부러워 한다. 그런데, 왜 "12,3 내란"이라는 친위 쿠데타로 어려운 시기를 보내는 것일까? 이게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 쓰게 된 <인문 일지>의 화두이다. 오늘부터 글을 쓰는 방식을 바꾸기로 했다. 너무 다양한 영역의 이야기가 계속 되다 보니, 머리에 정보의 양이 너무 들어 와 글이 어렵다는 지적에 짧은 단락으로 나누어, 번호를 매기면서 쓰기로 했다.
2. 지금 와서 보니, 민(民)의 수준이 문제였다. 전우용 역사학자의 말에 따르면, "군주제 시대의 정치는 군주의 수준에 따라 달랐다. 세종처럼 어질고 현명한 군주는 세종 시대를 열었지만, 연산군처럼 포악하고 방탕한 군주는 연산군 시대를 만들었다"는 거다. 그러니까 민(民)의 평균 수준이 세종에 가까워야 세종 시대를 바랄 수 있다는 주장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최근에 목격하고 있는 일부 소위 '태극기 부대'의 말들과 일부 목사들의 주장들을 들어 보면 그렇다.
3. 전 교수에 의하면, 당시 독립 운동가들이 민(民)을 바꾸는 방법으로 생각한 것들을 요약하면 ‘모이자, 배우자, 나누자, 뭉치자'였다고 한다. '4 자'이다. 한 줄로 말하면, 함께 모여 배우고, 토론하며 생각을 나누고, 그렇게 서로의 수준을 높이고 마음을 합치자는 것이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도 100년 넘은 이 생각을 표현한 것이라 보았다.
4. 민주 시민을 위한 정치 학교가 필요하다. 함께 모여, 공부하고 배우며, 생각을 나누고, 뭉쳐 연대의 힘으로 좋은 공동체를 만들 방법을 논의하여야 한다. 정치 공학이 아니라, 인문학적으로 접근하는 정치여야 한다. 공자는 <<논어>>에서 정치가 무엇인지 묻는 한 권력자의 물음에 “정치란 바르게 하는 것이다”(政者正也, 정자정야)라고 명쾌하게 정의한 바 있다. 정치는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과 실천의 문제이지 힘과 이익의 다툼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정치는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옳은 것(또는 이해의 공평한 배분)이라는 본래 목적을 잊고 그저 권력이라는 수단에 매몰된 것처럼 보인다.
5. 진영의 논리가 앞서는 정치는 옳고 그름의 문제를 모두 대결의 논리로 빨아들인다. 가령 현 정부의 반민주, 반헌법적 통치를 비판하면 바로 상대 진영의 주장으로 치부되는 경우가 그러하다. 정치가 이렇게 진영 선택의 문제가 되고 권력 교체에 불과한 문제가 된 것은, 결국 협소하고 졸렬하기 이를 데 없는 이 나라의 양당제 정치 때문일 것이다. 선거가 곧 정치가 되었고, 우리는 더 이상 선택과 상상의 여지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정치 과몰입도 몰 정치도 아닌, 마음 놓고 지지할 정치가 필요하다. 그런데 국민적 갈등을 자신의 이익의 동력으로 삼는 우리 정치인들은 "사람 안에 개가 들어 있어" "개 소리"를 하느라 바쁘다. 답답하다.
개의 정치적 입장/배한봉
개들이 짖는 소리를
개소리라 한다.
그것은 개들의 대화이기도 하고
개들이 달을 보고 하는 뻘 짓이기도 하다.
사람끼리 가끔
개소리한다고 할 때가 있다.
사람 안에 개가 들었다는 말이다.
개들도 그럴 때가 있을까.
개 안에 사람이 들어
울부짖으면
사람소리 한다고 개들끼리 수군거릴까.
그러면 그것은,
욕설일까,
정치일까,
철학의 한 유파를 형성할 수 있을까.
벽에는 커다랗게 얼굴 사진을 새긴 포스터가
일렬 횡대로 붙어 웃고 있다.
벽보 앞을 지나가다 나는
개 짖는 소리를 듣는다.
이것은
정치적 혐오일까, 무관심일까, 참여일까.
골목 앞, 신들린 무당집 개가
아무나 지나갈 때마다
컹컹컹, 컹컹 자꾸 묻는다.
6.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이라 정의했는데, 여기서 ‘정치적’이란 말은 정확하게는 폴리스라는 공동체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뜻이었다. 그는 인간의 활동을 다음과 같이 나누어 생각했다.
- 이론적 활동(테오리아),
- 윤리적 실천(프락시스),
- 제작 활동(포이에시스)
이런 식으로 나누면서 생존을 위한 활동을 넘어서는 공동체적 활동 곧 프락시스를 더 가치 있는 것으로 보았다.
7. 이런 생각을 일부 이어받은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 활동을 똑같이 셋으로 나누어 사유했다.
- 생존을 위한 노동(labor),
- 외부 세계에서 의미를 캐내는 작업(work),
- 개인을 넘어 공동체적 관계를 실현하는 행위(action)
이런 식으로 나누면서, 근대에 들어와 행위의 공적 영역이 생존과 노동의 사적 영역에 잡아 먹혔다고 지적한다.
8. 한국의 현실 정치에서, 공적 영역은 권력의 사유화로 증발해버리고, 시민들은 그들대로 개인의 사적 안녕과 이익이라는 몰정치적 태도에 빠진 것이 그러하다. 하지만 공적인 정의 또는 이해의 공평한 배분이라는 이상은 또한 현실 정치를 통과하지 않으면 달리 실현할 방법이 없다는 데 우리의 어려움이 있다. 현실 정치를 방기하면 정치의 이상은 더욱 멀어진다. 피곤하지만 정치를 놓을 수 없는 것이 시민의 삶이다. 아무리 싫어도 우리는 정치와 무관할 수 없다. 사월의 책 대표 안희곤의 지적이다.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기억한다. "정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함으로써 받는 벌 중의 하나는 자신보다 못한 사람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플라톤)
9. 1907년에 조직된 비밀 결사 모임인 ‘신민회(新民會)’의 이름은 ‘민(民)을 새롭게 바꾸는 모임’이라는 뜻이었다 한다. 연산군 수준에 가까운 민(民)을 세종 수준에 가깝게 바꾸어야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 후, 많은 우리 국민들은 윤석열이 계엄령을 선포하자마자 국회로 달려가 군대를 맨몸으로 막았던 시민들이었고, 함께 모여 음식과 온기를 나누면서 윤 탄핵을 외쳤던 시민들은 ‘모이자, 배우자, 나누자, 뭉치자’를 실천했다. 전 교수는 이런 시민들을 "K-데모크라시"의 최후의 보루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번 기회를 통하여 이렇게 현명하고 용기 있으며 수준 높은 시민들이 많은데, 왜 윤처럼 방탕하며 포악한 데다가 악귀에 씌우기까지 한 자가 대통령이 되었는지는 다 함께 성찰 해 봐야 한다.
10.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정치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해서는 안 된다 말이었다. 정치란 사회의 잠재적 역량을 최대한으로 조직해내고 키우는 일이다. 권력의 창출만이 전부가 아니다. 그리고 정치는 우리의 삶에 대단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정치는 우리들에게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정해준다. 신체를 구속할 수도 있으며, 돈도 걷어가며, 군대로 데려가기도 한다. 그리고 정치는 우리들의 '정신 세계'도 지배한다. 정치에 아무리 냉소적일지라도 정치는 우리들의 삶으로부터 단 1cm도 떨어지지 않는다. 원하지 않더라도 정치는 우리의 삶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며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는 사회에 대한 철학, 의지, 전문성이 없으면 해서는 안된다. 정치는 고도로 훈련된 전문가의 영역이다.
11. 우리 정치의 불행은 정치가 갖는 막강한 영향력 때문이 아니라, 그 엄청난 힘을 아마추어들이 다룬다는 사실이다. 선거에 나가 당선되었다고 저절로 전문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정치는 너무나 위험하고 중요한 일을 다루기 때문에 아무나 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민(민)의 수준이다. 아무나 정치를 해도 된다고 믿는 유권자들은 기성 정치를 혐오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인물을 '쇼핑'한다. 정치 경험이 전에 전혀 없는 어떤 명망가가 나라를 구해줄 것이라고 믿는 '메시아주의'는 아주 위험한 정치 포퓰리즘 이다.
12. 대니얼 부어스턴의 <<이미지와 환상>>에서 통찰한 대로 옛날에는 위대하면 유명해졌지만, 지금은 유명하면 위대해진다고 믿는 시대이다. 예능의 시대, 가벼움의 시대이다. 오늘날 정치인은 차고 넘치지만, 진정한 정치가는 너무나 귀하다. 그리고 현재 우리 사회의 위기 핵심은 자리에 걸맞은 능력과 책임감이 모자란 사람들이 너무나 중요한 자리를 뻔뻔하게 꿰차고 있다는 점이다. "이끌지도 못하면서 떠나지도 않는다(Lead or Leave)." 이번 기회에 청소를 하여야 한다.
13. '사자 한 마리가 이끄는 양 떼가 양 한 마리가 이끄는 사자 떼를 이긴다'는 속담이 있다. 우리의 현실은 양 한 마리가 양 떼를 이끄는 꼴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관선 이사가 파견 나와 있는 주인 없는 대학 꼴이다. 우리 사회를 이끄는 주류 의식을 자각하고 있는 주체가 확실하게 없다. 비전도, 전략도, 리더십도 없이 '처 삼촌 묘 벌초하듯' 시늉만 내는 비주류의식에 모두가 사로잡혀 있다. 우리는 지금 꿈도 잃고, 힘도 잃고, 길도 잃었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
14. 현 한국 정치의 핵심은 대통령의 권력이 약화되고 국회와 사법부의 힘은 커진 '과두'의 상황에서 누구도 결정할 힘은 갖지 못한 채, 상대 정당에 무조건 반대할 정도의 힘만 갖고 있는 '비토크라시(Vetocracy, 거부권 정치) 늪이다. 우리 정치는 머리카락을 잘린 삼손처럼 결정할 힘을 잃었다. 비전을 다시 만들고, 주류의식을 갖고 이 사회를 이끌며 결정하는 힘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 정치 전문가가 다시 나와야 한다. 누구나 해도 되지만 아무나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정치이다. 박성민 정치 컨설턴트는 이런 정치가를 꿈꾼다.
- '하나만 같아도 동지'로 보는 합목적적 유연함을 지닌 정치인이 필요하다. '하나만 달라도 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정치에 맞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학자, 종교인, 법조인, 언론인, 시민운동을 하는 것이 낫다. 정치가는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공산주의 소련과 '연합'도 할 수 있어야 한다.
- 정치를 '업'으로 하는 정치인이 필요하다. 정치는 정치를 좋아하는 사람이 해야 한다. 그저 무엇이 되고 싶을 뿐인 사람은 정치를 하면 안 된다. '직'을 쫓을 뿐 '업'을 지키지 않는 아마추어는 정치를 하면 안 된다.
- 지지자들에게 욕먹을 용기가 있어야 한다. 권력에 맞서는 것은 작은 용기만 있어도 되지만 지지자들에게 맞서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하다.
15. 사람들은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일했는데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본주의에서 부의 배분이란 정치가 한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들도 성찰 할 것이 있다. 건강한 개인적 욕망과 탐욕을 구별하여야 한다. 누구나 나름의 소원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이뤄지기를 바란다. 그 소원은 욕망이기도 하다. 하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어야 이룰 수 있는 욕망은 ‘탐욕’이다. 예컨대, 아파트 값이 올라 좋은 사람도 있지만, 그 때문에 좌절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 ‘내 아파트 값이 올랐으면 좋겠다’는 욕망은 탐욕에 가깝다. 이보단 차라리 ‘로또 당첨됐으면 좋겠다’가 건강한 욕망이다. 우리 국민 다수가 ‘건강한 욕망’이 아니라 ‘탐욕’에 투표했기에, 윤 같은 ‘탐욕의 화신’이 당선된 거다. 김과 윤이 거리낌 없이 표출한 ‘극악무도(極惡無道)’, "지랄발광"은, 우리 국민 마음 속 ‘탐욕의 총합'이다. 민주제 시대에는, 방탕하고 탐욕스러운 ‘민(民)’보다 어질고 현명한 ‘민(民)’이 훨씬 더 많아야 세상이 좋아진다. 전 교수의 주장이다. 나도 동의한다.
16. <논어> 제17장 "양화" 2절에서 공자는 "오직 지극히 지식이 많은 자(上知)와 가장 어리석은 자인 하우(下愚)는 변화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길을 걷던 공자가 하루는 길 옆에서 똥을 싸는 사내를 봤다. 공자는 함께 있던 제자를 시켜 그 사내를 자신에게 데려오게 했다. “너는 짐승이 아닌 이상 어찌하여 가릴 것, 못 가릴 것 구분을 하지 못하느냐. 너는 도대체 사람이냐, 짐승이냐.” 공자는 힐난의 말과 함께 엄청나게 사내를 꾸짖었다. 그러자 사내는 부끄러움에 머리를 감싸 쥐고는 줄행랑을 놓아버렸다. 다시 순행(巡行) 길에 오른 공자. 이번엔 길 한가운데서 똥을 싸는 또 다른 사내를 만난다. 하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 공자는 화를 내기는 커녕 제자에게 그 사내를 피해서 가자고 말한다. 제자는 길 가운데서 똥을 싸는 저 사내가 더 나쁜 놈인데 왜 피해 가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공자는 말한다. “길 옆에서 똥 싼 사내는 그나마 양심은 있어 가르치면 되지만 저 놈은 아예 양심 자체가 없는데 무엇을 어찌 가르칠 수 있겠느냐.” '하우불이(下愚不移)'의 교훈이다. '어리석고 못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뜻을 갖고 있다.
17. <논어(語)> 양화편(陽貨篇)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이 글 앞에는 항상 '유상지여(唯上知與)'가 함께 붙는다. '하우'와 '상지'를 같은 등급으로 생각한다. 하우야 어리석고 못났으니, 받아들이지만, 상지는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잘난 척하는 엘리트들이다. 바뀌지 않는 사람의 예로 '상지(上知)', 즉 태어날 때부터 자질이 우수하고 총명한 사람을 짝처럼 붙여 놓은 것이 공자의 통찰력이다. 그럼 상지와 '하우(下愚·아주 어리석고 못난 사람)'는 왜 바뀌지 않는다고 했을까? 그 이유는 그들이 바뀌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바뀌려고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잘난 사람은 잘났으니 그렇다 치고 못난 사람이 요지부동인 이유는 지레 포기하기 때문이다. <논어 집주>에 따르면, 하우는 머리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 '자포(自暴)'하고 '자기(自棄)'하는 사람이다. '자포'는 스스로 자신을 포기한 사람, '자기'는 스스로 자신의 몸을 버리고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다. 소위 엘리트라며 나만이 정의라는 확증 편향에 있는 자의 오만함, 그가 만들어낸 거짓에 놀아나는 우매함, 마치 종교 같은 믿음. 상지와 하우는 그래서 통하는 사이인가?
18. 지금 우리 사회를 힘들게 하는 게 '상지(上知, 엘리트)'에 해당하는 "관피아"라고 생각한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 한국의 정치는 지도자, 경쟁 체제, 돈, 조직을 잃었다. 물리력과 정치력의 시대가 끝나자 관료의 힘이 세지었다. 관료는 자기 부처의 이해를 중심으로 사고 하기 때문에 '패권에 대한 자각'은 약하지만, '법'도 사실상 관료들이 만들고, 그 법이 실질적 효력을 갖게 하는 '시행령'도 그들이 만드는 나라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패권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 이권이 있는 곳에 규제가 있고, 규제가 있는 곳에 권력이 있기 때문이다.
19. 기업과 공무원, 그리고 로펌의 결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뿌리 깊고 광범위하다. '관피아'는 척결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세력이 하나 더 등장했다. 법원, 헌법재판소, 검찰, 로펌을 포괄하는 법조가 그들이다. 이들은 대한민국 최고, 최후의 판단 자이다. 스스로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자신들이 직접 뽑은 정치적 권위에도 승복하지 않는 사람들도 사법적 권위에는 승복한다. 정치의 사법화가 그렇게 만들었다. 검찰과 법원의 정치적 공간은 정치가 그 공간을 버렸기 때문에 열린 것이다. 언젠가 박성민이라는 정치 컨설턴트의 주장에서 얻은 생각이다. 이젠 제대로 된 정치가 필요하다. 우선 정당이 정당 다워야 한다. 정당 다운 정당으로 정치를 회복해야 한다.
20. 새해 우리나라에선 대통령 선거가 다시 치러질 거다. 탐욕이 아니라 ‘건강한 욕망'을 무장하고 높은 정치력을 지닌 새로운 정당 다운 정당에 투표하는 시민이 많아 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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