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법자연(道法自然)
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1년 12월 9일)
밖으로 향하는 시선을 돌려 자신을 향하게 하며, 나는 누구인가를 오랫동안 묻고 답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응시하여야 한다. 오늘의 화두는 '도법자연(道法自然)'이다. 이 말은 "인법지(人法地), 지법천(地法天), 천법도(天法道), 도법자연(도법자연)" 에서 나온 말이다. 이를 도식화 하면, "인-지-천-도-자연"이다. 사람은 땅에 의지해 살고, 땅은 하늘의 이치에 따라 움직이며, 하늘은 그 바른 도리(=순리)에 따르는 것이고, 그 바른 도리는 자연 그대로의 길을 가는 것이다. 12월도 벌써 반이 다 지나간다. 날씨도 덩달아 추워진다. 다시 한 번 '도법자연'을 소환하는 아침이다. 길은 저절로 그렇게 된(자연)을 본받는다. 흐르는 대로 하루 하루 착실한 보폭을 이어간다.
<<도덕경>> 25편에 나온다. 여기서 우리는 흔히 법(法)을 '본받다', '법칙으로 삼는다'는 타동사로 해석한다. 그래 "인간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로 해석한다. 노자는, 공자처럼, 어떤 정해진 법칙들, 즉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과 같은 가치를 유형의 가치로 결정하고, 그것을 수용하지 않는다. 무위(無爲)를 덕으로 여기는 노자가 생각하는 '법'의 의미는 다르다고 본다. 사람은 땅 위에서 산다. 그러니까 땅의 법칙을 어기고 살 수가 없다. 먹는 것도 다 땅에서 나오고, 죽어서도 다시 한 줌의 땅으로 돌아갈 뿐이다. 이 땅은 하늘을 본받는다. 하늘에서 비가 내려와야 땅은 그 생명성을 유지할 수 있다. 하늘과의 교섭에서 모든 풍요로움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늘은 도를 본받는다. 여기서 도(道)는 길(way)이며 사물 운행의 법칙(law)이다. 하늘은 법칙을 봅받아 운행하는 것이다. 사계절이 반복되고,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이 모두 도이다. 그러한 도는 자연(自然)을 본받는다. 여기서 자연은 영어로 nature를 뛰어 넘는 개념이다. 도는 그런 자연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自) 그러함(然)'을 본받는 것이다. '스스로 그러험'이 곧 자연이다. 그것은 사람과 땅과 하늘과 도의 궁극적 모습이다. 왕필(王弼)은 자연을 '무칭지언(無稱之言)'이라 했다. '스스로 그러함'은 인간의 언어를 단절시키고, 인간의 모든 인위적 조작을 거부한다는 뜻이다.
법(法) 자를 파지하면, 물(水)이 자연스런 움직임과 관련이 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면서, 만물을 이롭게 한다. 물은, 상선약수(上善若水, 지극하 착한 것은 물과 같다)라는 말처럼,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자신을 드러내지도 타인과 다투지도 않는다. 또한 물은 겸허(謙虛)가 몸에 배어 있어 언제나 낮은 곳으로 스스로 저절로 아무 소리도내지 않고 흘러 들어간다. 그러니까 법은 물과 같은 몸가짐이며 활동이다.
그런 측면에서 위의 문장을 다시 번역하면, "인간은 발을 땅에 디디고 살면서, 다른 인간들과 잘 어울려 살 뿐만 아니라. 지구의 동거존재인 다른 동물들과 식물들과 잘 어울려 산다. 땅에 있는 동물과 식물들은, 하늘이 가져오는 물, 공기, 햇빛을 흠뻑 받으면서, 주어진 짧은 수명을 살면서, 하늘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산다. 저 하늘에 있는 해, 달 그리고 모든 행성들은 지난 수 억년 동안 그랬듯이, 앞으로도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하염없이 갈 것이다. 그 길을 이탈하면 우주가 혼돈에 빠지기 때문이다. 우주가 운영하는 법칙인 도는 자연스럽다. 물과 같이 고요하게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 저 낮은 곳으로 조용하게 흘러간다."
오늘은 김광규 시인의 <그 손>을 공유한다. 그 손이 나에게는 '자연(스스로 그러함)'이다. 생각해보면 뒤에서 나를 도와주는 존재가 늘 있었다. 나는 원조를 받았고, 나는 지지를 받았다. 반짝이는 별에게 밤의 하늘이, 캄캄한 어둠이 배경이 되어주는 것처럼 누군가 혹은 어떤 힘은 나의 배경이 되어주었다. 험한 낭떠러지로 내몰리지 않도록 밑과 옆에서 내 존재의 근거가 되어주었다. 기초로 받쳐 놓은 주춧돌처럼. 그러나 그 후원의 손은 스쳐가는 바람 같고, 움켜쥘 수 없는 물과 같아서 대면하기가 쉽지 않다. 오동 잎처럼 큼직하고 묵직해서 듬직하다고 느낄 뿐이다. 그 것들에 감사해 하는 아침이다.
그 손/김광규
그 손
그것은 커다란 손 같았다
밑에서 받쳐주는 든든한 손
쓰러지거나 떨어지지 않도록
옆에서 감싸주는 따뜻한 손
바람처럼 스쳐가는
보이지 않는 손
누구도 잡을 수 없는
물과 같은 손
시간의 물결 위로 떠내려가는
꽃잎처럼 가녀린 손
아픈 마음 쓰다듬어주는
부드러운 손
팔을 뻗쳐도 닿을락 말락
끝내 놓쳐버린 손
커다란 오동잎처럼 보이던
배철현 교수가 말하는 창조는 무엇을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삼라만상이 원래 있어야 할 곳에 적절하게 배치하는 행위이다. 이 '창조'가 그는 '법'의 의미와 유사한 단어라고 본다. 그러니까 법이나, 창조는 '우주의 원칙에 따라 적재적소에 두다'란 의미이다. 신이 다음 네 가지를 창조했다. (1) 우리가 발로 밟고 있는 이 땅(地) (2) 우리가 보고 있는 저 하늘(天) (3) 그리고 그 가운데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인간(人) (4) 그리고 행복(道法自然)이다.
인간만이 죽는다는 사실을 유일하게 인식하는 동물이다. 인간만이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산다. 그 인식이 나에게 주어진 오늘을 빛나게 만든다. 그래 순간을 사는 인간이 행복하고 고요하다. 고요는 조용이다. 조용은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고요이다.
자연은 조용이다. 조용은 우주와 자연을 움직이는 강력한 힘이다. 조용할 때 힘이 생기고 떠들 때 힘이 빠진다.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스스로 자전하는 지구는 소리가 없다. 자연은 언제나 침묵한다.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도 간절하게 조용하다. 빅뱅이 생겨나기 전 상태는 어떤 소리도 허락하지 않는 진공(眞空)이다. 진공 속에 탄생하여, 우주를 만들고 그 안에 생명을 만든 것은 조용한 생각이다. 생각은 말이 없고 스스로를 간결하고 강력하게 다듬는다. 창조주, 발명가, 건축가, 작곡가, 작가 그리고 기업가는 먼저 조용한 생각으로 구상하고, 그 청사진 위에 완벽하고 조화로운 부분들을 채워 넣는다. 생각의 특징은 조용이며, 조용의 유전자는 완벽과 조화이다.
이런 측면에서 특정한 종교나 철학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주장한다면, 이 체계들을 주장한 성인들이나 성현들의 고귀한 삶에 대한 모독이다. 종교와 혹은 그 한정된 집단에서 진리라고 주장하는 교리와 학설을 무조건 수용하지 말고, 한 걸음 떨어져서 가만히 응시해야 한다. 윌트 휘트먼의 <<내 자신을 위한 노래>>에서 말하는 "교리와 학교는 휴지(休止)시키고"에서, 휴지는 영어로 Abeyance이다. 이 말은 법정용어로 최종 판결을 유보하고 일단 지켜보는 과정이다. 그러니까 위의 시구는 종교와 학교, 혹은 그 한정된 집단에서 진리라고 주장하는 교리와 학설을 무조건 수용하지 말고, 한 걸음 떨어져서 가만히 응시해야 한다는 거다.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우연히 접한 학문들에 대한 태도는 유보적이어야 한다. 인간은 부모를 통해 몸을 가진 존재로 태어나고, 학교를 통해, 자신이 속한 가족이나 공동체와는 다른 종교와 철학을 섭렵하여, 취사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취사선택을 허용하지 않는 교육은, 사람을 진부한 인간으로 전락시킨다. 인간은 교육과 배움을 통해, 타인의 입장에 서 볼 수 있는, 역지사지가 가능한 유연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기 때문이다.
휴지하면서, 조용히, 침묵하면 우리는 유연해 진다. 정신적으로 유연한 인간은 이제,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관들 가운데 자신에게 어울리는 세계관을 선택하기 전에 휴지기간을 자져야 한다. 그 휴지 활동 기간 중에, "그들이 무엇이든 간에 만족하여 잠시 퇴거 시키지만, 결코 망각하지 않는다"이다. 뉴톤의 말처럼, 인류는 이전에 혁신적인 사상과 체계의 발전을 시켜온 '거인의 어깨 위에서' 세상을 볼 때, 한 걸음 진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통념, 신념, 관습 그리고 법보다는 자신의 안목, 영감, 자신의 습관 그리고 양심을 믿고 행동하는 것은 위험하다.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양심(스스로 그러함)에 따라 행동하는 고독한 사람들은 오해를 받는다. 그러나 위대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오해 받는 인간이 되는 거다. 우리는 그런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내가 해야 할 말을 하여야 한다. 그것이 선과 악이라는 이원론에 세뇌 된 타인의 눈에는 오해이며 신성 모독이다.
긴 사유였다. 제 때에 쓰지 못한 <인문 일기>라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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