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죽음과 앎의 실체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12. 6. 18:02

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1년 12월 6일)

죽음과 앎의 실체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웃는 것이 낫고, 웃음을 즐기는 것보다는 사물과 어울리는 것이 더 나으니, 사물과 편안히 어울려 변화를 잊은 채 텅 빈 하늘로 들어가도록 하라." 이를 이렇게 풀이하기도 한다. "잠깐의 즐거움은 웃음에 미치지 못하고, 드러난 웃음은 자연의 추이(推移)를 따름에 미치지 못하니, 자연의 추이를 편안히 여겨 그 변화조차도 잊어버리면 마침내 고요한 하늘과 일체가 되는 경지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장자>> "대종사"에 나오는 이야기 이다. 백신 3차 접종을 했더니, 힘들다. 근육통이 생기고, 머리가 맑지 못하다. 내 몸이 백신과 싸우는 것 같다. 그냥 그 변화 조차 잊고, 하늘과 일체가 되는 경지에 들어가려 한다. 이런 사람이 도가 튼 사람이다. '사물과 편안히 어울려 변화를 잊은 채 텅 빈 하늘로 들어간 사람이다. 이를 "入於寥天一(입어료천일)"이라 한다.

최근 우리 사회는 디지털 시대에 언론을 통해 노출된 지극히 단편적 정보 몇 가지로 이미 부도덕한 사람으로 낙인을 찍는다. 그렇지만, 대안도 없이 훈수만 두는 사람들 때문에 상처받지 말고, 서로 위로하며 자신의 선택에 당당하게, 각자의 시간을 써 나갔으면 한다. 목소리는 높지 않아도 응원하는 수많은 깨시민이 있음을 기억하고 힘내야 한다. 세상이 진창 같아도 안 망하고 조금씩 진일보해 온 이유는 도리를 아는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사물과 편안히 어울려 변화를 잊은 채 텅 빈 하늘로 들어간 사람'이다.

이어지는 <<장자>>는 "깨우쳐 노력하면 바른 길로 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 바른 길인 도(道)의 세계는 "만물을 이루어 놓지만 스스로 의롭다 하지 않고, 만세에 혜택을 베풀지만 특별히 편애하는 일이 없고, 아주 오랜 옛날보다도 더 오래되었으면서도 늙은 체하지 아니하며, 하늘을 덮고 땅을 싣고 있으며 온갖 형태를 다 조각하고서도 기술이 뛰어난 체하지 아니한다." 이것이 도(道)의 세계라 한다. 그 도(道)가 우리의 스승이라고도 한다. 도는 스스로 의롭다 하지도 않고, 편애하는 일도 없고, 진재주를 부리지도 않는다고 했다. 자만이나 집착 같은 자의식이 없는 상태, 완전히 자기를 비운 상태에 도가 들어오고 이렇게 하여 얻은 도가 바로 우리가 '노닐 곳'이라고 했다.

여기서 '안아서 잊음(坐忘)'이 나온다. 박노해 시인은 "깊은 침묵 속에서만 바로 듣는 것이 시작되고", "내가 소멸한 자리에서만 바로 보는 것이 시작된다"고 했다. <<장자>>에서 '좌망'은 이렇게 말한다. "손발이나 몸을 잊어버리고, 귀와 눈의 작용을 쉬게 한다. 몸을 떠나고 앎을 몰아내는 것, 그리하여 '큰 트임(대통, 大通)과 하나됨"이다. 도(道)에 이르는 깊이 이르는 길은 우선 인의(인의), (예악) 같은 주지주의나 윤리지상주의 의식 구조를 버려야 한다. <<장자>>에서 말한 기심(기심, 機心, 기계적인 마음), 관념적이고 계산적이고 논리적이고 분석적이고  합리적인 마음을 우선 잊어야 한다는 거다. 모든 인위적이고 차별적인 지식을 잊어버리는 상태이다. "대통(大通)의 세계와 같아지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없게 되며, 큰 도(道)의 변화와 함께하면 집착이 없게"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생래적인 무지 뿐이라면 잊고 버리고 할 것도 없다. 따라서 잊어버린다는 것은 잊어 버리 전에 먼저 획득함이 있고, 그 후 이런 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어서 이것을 초월하는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합리적 사고를 초월한 단계는 합리적 사고에도 마치기 이전의 단계와 분명히 다르다. 인의, 예악을 잊어버리는 것이 중요하지만 이런 것만으로는 아직 안 된다는 거다. 이런 외부적인 것을 잊어버리는 것을 소위 망외(忘外), 망물(忘物)이라 할 수 있다면, 내부적인 것 그리고 나 자신을 잊는 것을 망내(忘內), 망기(忘己)라 할 수 있는데 이 둘째 잊음까지 가야 좌망(坐忘)이라는 거다.

좌망에서 우선 지체(肢體) 같은 외형적인 것을 잊어버린다고 했다. 감각 작용의 중단이다. 그리고 나서 총명(聰明) 같은 이지(理智) 작용을 버리게 된다고 했다. 둘 다 이분법적 의식 작용을 잊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새로운 의식, '이것이냐, 저것이냐'에 구애되지 않는 '비 이분법적' 혹은 '초 이분법적' 의식. '우주 의식'이 생긴 것이다.

만물제동, 즉 평등은 허심(虛心)에서 비롯되며, 허심에 도달하기 위한 공부인 좌망(坐忘)은 더하기 공부가 아닌 걷어내는 공부, 즉 해체 시키는 공부이다. 이 길은 다음과 같이 네  가지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성심(成心)에서 사심(師心)으로 가지 않고, 허심으로 가는 네 가지 방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용선 선생의 블로그와 그의 멋진 책 <장자, 나를 해체하고 세상을 해체하다>에서 얻은 생각을 갈무리 한 것이다.

(1) 허심을 위한 공부로 첫째 ‘피차의 이분법적 의식을 걷어내는' 것이다. ‘이것’과 ‘저것’을 나누는 ‘피차’(彼此)는 ‘나’를 세우는 성심(成心)으로부터 비롯되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나’를 주체로 세우고, 상대를 대상화 하는 한, ‘나’와 ‘너’를 나누어 양 방을 모두 실체 화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피차는 이쪽(차,此=이것)과 저쪽(피,彼=저것)인데, 이것과 저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각이나 입장에 따라 다르게 정해지면서 동시 적으로 발생하는 사태라는 점을 알아차리는 것이 피차의 이분법적 의식을 걷어내는 일이다.

(2) 허심을 위한 공부 둘째는 ‘시비를 화(和)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나’만 ‘자신이 옳다’는 의식을 갖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렇다. 그렇다면 누가 옳은가. 아무도 옳지 않다. 그러면 누가 그른가. 아무도 그르지 않다는 것. 각기 각자의 방식으로 옳은 것이다. 장자는 이것을 ‘각자의 옳음에서 비롯하여 각기(各基)의 근거로 시비하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하는 인식의 기초인 ‘우리의 앎’은 과연 신뢰할만한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지각과 지성(분별지)은 부분성과 편파성으로 인해 사물의 전체를 한꺼번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3) 허심을 위한 세 번째 공부는 ‘도추에 서서 조지어천(照之於天)하라’는 것이다. 생사, 가와 불가, 시비는 모두 상대를 전제해야 성립할 수 있는 관계의 네트워크인데, 결국 상대하여 발생하는 것은 연관에 의하여 성립하는 것이고, 이 연관 역시 고정적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자는 피차와 시비의 이분법적 대립의 근거를 해체한 도추(道樞)에 서서 조지어천하라고 권한다. 여기서 도추는 문을 여닫는 ‘지도리'이다. 지도리는 열림과 닫힘에 모두 다 관계 하나 어느 하나 만을 옹호하지 않는다. 열림과 닫힘의 근원이면서도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는다.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나 모든 움직임을 그 안에 담고 있으면서 여 닫히는 문의 움직임에 제한 없이 반응하나 열림이나 닫힘에 매이지 않는다. 도추는 텅 비어 있으면서 모든 것에 응하는 허심의 은유이다.

(4) 허심을 위한 네 번째 공부는 각득기의(各得基意)를 말하면서 상정(相正)을 따지지 말고, 자정(自正)을 하라'는 것이다. "각득기의"라는 말은 <<장자>>의 핵심이다. 장자의 기본입장은 인간은 자연물이고 자연에 속해 있다고 본다. 자연은 다만 균형을 잡을 뿐, 시비하지 않는다. 균형을 잡는 것을 천예(天倪, 자연의 작용, 하늘의 맷돌(天硏), 하늘의 균형대(天鈞)라도 한다. 천예의 조화 속에 사는 각 존재자들은 각각 자기 방식에 마땅한 길을 가고 있다. 각자 생존의 방식, 실존의 방식, 사고의 방식이 다 있다. 모든 인간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한다.

복잡하지 않지만, 속상한 일이 있다. 그냥 허심으로 돌아 갈 생각이다.

사람이라서 미안하다/김기산

어두운 새벽 노쇠한 수소가 소리를 내어 운다
식구들 따라 잠이 들고 잠이 깨었으니
부리망 쓰고 걷던 들과 밭
발자국들 되새김질 하며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골목길로 끌려 나간다

몇 겁의 생을 건너와
나의 짚더미에 떨어질 때부터 한 가족이었으니
트럭 앞에서 할아버지 산소를 올려다보고
산울림 같은 소리를 낸다

축축한 눈물이 고여 있는
외양간 벽에 기대앉은 할머니
일만 죽도록 하고 인간들에게
가죽 한 벌 뼈 한 조각까지
다 내어주고 떠나가는 소에게

모진 인간들 세상 다 잊고 가라
미안하다 오늘 사람이라서 미안하다

인간은 누구나 다 자기 자신으로 태어나지 않고, 자기 자신 이상으로 태어난다. 따라서 인간의 존재적 사명은 자기 자신 이상으로 부단히 건너가는 것이다. 우리는 건너가야 한다. 같은 수준을 왕복 운동하며 너무 오래 머물러 있다. 도약하고 상승하는 수직운동을 시도해야 한다. 전략적이고 선도 력을 갖춘 높이로 올라서는 거다.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해야 한다. 최진석 교수가 자신의 기본학교에서 하게 하는 질문들이라 한다. 나도 이 아침에 다시 질문해 본다. 지난 토요일에 3차 백신을 맞았더니 혼돈으로 들어가는 거였다. 시간이 지나니, 질서가 잡힌다. 한 단계 위로 상승한 거다.
- 나는 누구인가
-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 나는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가
- 죽기 전까지 완수해야 할 나의 소명은 무엇인가

누구나 누군가에겐 좋은 사람이다. 알고 보면 괜찮은 구석 하나 없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걸 알아 낼 안목도 기회도 의지도 없다. 상대의 진짜 매력을 발견하는 건 다 비싼 비용이 든다. 모든 면에서 여유가 있어야 발휘할 수 있는 게 상대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보는 거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아쉬워하거나 억울해 할 것 없다, 그건 당연한 거다. 알아보는 사람이 특별한 것이지 대부분 내게 관심조차 없는 게 기본값이다. 따라서 알고 보면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 대놓고 그냥 괜찮은 사람이 돼야 한다. 자세히 봐야 매력이 드러나는 게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매력이 뿜어져 나와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항상 모든 문제의 시작과 끝을 내 의지로 바꾸고 결정하려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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