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과불급 개위질(太過不及 皆爲疾)": 넘쳐도 부족해도 병이 된다.
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1년 12월 2일)
오늘은 20211202이다. 앞으로 해도, 뒤로 해도 같은 날이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장자>>를 읽는다. <<장자>>의 '대종사'에 나오는 절친 4 명(자사, 자여, 자려, 자래) 중, 이번에는 자래에게 병이 났다. 그 일을 공유한다."(25) 또 얼마 있다가 자래(子來)가 병에 걸려 헐떡거리면서 막 죽게 되자 그 아내와 자식들이 빙 둘러싸고 울고 있었는데, 자려(子犁)가 와서 위문하며 이렇게 말했다. “쉿! 저리들 비키시오! 돌아가는 분을 놀라게 하지 마세요! 이 엄숙한 변화의 작용을 방해하지 마시오!” 자래가 문에 기대어 자래에게 이렇게 말했다. "“위대하구나 조화여! 또 그대를 무엇으로 만들려 하는가? 그대를 어디로 데려가려고 하는가? 그대를 쥐의 간으로 만들 것인가? 그대를 벌레의 다리로 만들 것인가?” (26) 자래가 말했다. “부모란 자식에게 동서남북 어디로 가게 하든 오직 명령을 따라야 하는 존재이다. 음양(陰陽)은 사람에게 단지 부모와 같을 뿐만이 아니다. 저 음양이 나를 죽음에 가까이 가게 하는데, 만약 내가 따르지 않는다면 나만 버릇없는 자가 될 뿐이니 저 음양에 무슨 죄가 있겠는가! 대자연은 육체(肉體)를 주어 나를 이 세상에 살게 하며, 삶을 주어 나를 수고롭게 하며, 늙음으로 나를 편안하게 해주며, 죽음으로 나를 쉬게 한다. 그 때문에 나의 삶을 좋은 것으로 여기는 것은 바로 나의 죽음을 좋은 것으로 여기기 위한 것이다. (27) 지금 대장장이가 쇠붙이를 녹여서 주물을 만드는데, 쇠붙이가 뛰어 올라와 ‘나는 장차 반드시 막야와 같은 명검(名劍)이 되겠다’고 말한다면, 대장장이는 반드시 상서롭지 못한 쇠붙이라고 여길 것이다. 이제 한 번 인간의 형체를 훔쳐서 세상에 태어나 ‘나는 언제까지나 오직 사람으로만 살겠다.’고 말한다면, 저 조화자(造化者)도 반드시 상서롭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니, 지금 한 번 천지를 커다란 용광로로 삼고, 조화를 대장장이로 삼았으니, 어디로 가서 무엇이 된들 좋지 않겠는가! 편안히 잠들었다가 화들짝 깨어날 것이다.”
음양의 조화는 부모와 같다. 대자연 속에서 벌어지는 음양에는 죄가 없다. 자연의 음양은 나에게 다음과 4 가지를 베풀어 주었다.
(1) 육체를 주어 나를 이 세상에 살게 했다.
(2) 삶을 주어 나를 수고롭게 하며,
(3) 늙음으로 나를 편안하게 해주며,
(4) 죽음으로 나를 쉬게 한다는 거다.
그래서 우리는 삶이 좋으면, 죽음도 좋다고 여길 수밖에 없는 거라는 거다.
그 다음 "천지(하늘과 땅)을 용광로로 삼고, 조화를 대장장이로 삼는다면, 무엇이 되든 좋은 거 아닌가'라는 문장이 가슴에 빗금을 근다.
남은 아파서 죽어 가고, 부인과 아이들은 둘러앉아 울고 있는, 문병 온 친구가 농담 비슷한 말을 한다. 그러나 아픈 사람은 그보다 한술 더 뜬다. 아파서 지금 당장 죽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음양의 조화에 의한 것이고, 부모의 말에 복종하는 것이 자식 된 도리라는 거늘 부모보다도 더 큰 부모인 음양의 말을 안 듣는다면 그야말로 얼마나 한심한 자식인가? 몸이 있어도 좋고, 늙어 편안을 얻게 되도 좋고, 죽어서 쉬어도 좋고, 죽으나 사나, 실로 사생존망지일체(死生存亡之一體)라는 거다.
그리고 이어 자래는 조화자의 뜻에 따라 순명(順命)하는 태도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대장장이의 비유를 들어 다시 소상하게 이야기 한다. 우리는 모두 대장장이가 만드는 연장들, 어찌 우리 마음대로 '막야' 같은 최고의 명검(名劍)만 되겠다고 고집을 부릴 수 있겠는가? 조용히 대장장이의 큰 뜻에 맡기고 따르라는 거다.
장자의 주장은 기독교적 논리와 다르다. <<장자>>에 나오는 대장장이는 쇠의 윤리적 행위와 관계없이 자기 보기에 선하다고 생각되는 대로 거기에 맞춰 물건을 만드는 것이다. <<장자>>에서는 인간이 행한 행위에 따라 내세(내세)가 결정된다는 인과응보(因果應報)라든가 업보(業報) 같은 사상이 없다. 모두 자연이 그 순리(順理)에 따라 적절한 길로 만물을 변화시킬 따름이라는 것이다.
'음양오행(陰陽五行)'은 동아시아 사상에서 천지인(天地人)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키워드이다. 사주 명리학은 이것을 운명에 적용해서 어떤 사람이 태어난 연월일시의 오행의 리듬을 보면 그 사람이 가진 오장육부의 배치와 정서적 흐름을 알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오행은 언제나 태과불급(太過不及)의 상태로 배치된다. 모든 사람은 다 어떤 식으로 든 기울어져 있다. 그래 우리는 많은 것은 덜어 내고, 부족한 것은 채우면서, 균형추를 찾는 것이 사는 일이다.
'태과불급'이라는 말은 흔히 "태과불급 개위질(太過不及 皆爲疾)"로 쓰인다. 넘쳐도 부족해도 병이 된다는 뜻으로 과유불급(過猶不及)과 같은 말로 쓰인다. 그러나 이 말은 조화를 강조하며 지나침을 경계하는 말이다. 그냥 태과불급을 말할 때 '태과'는 지나침을 말하고, '불급'은 모자람을 말한다. 무엇이든 적당해야 한다. 그래야 건강한 것이다. 그러니 지나치면 덜어내야 하고, 모자라면 보태 주어야 한다. 남는 것을 덜어내고, 모자란 것을 보충하여 주는 것을 사주 명리학에서는 '억부(抑抔)'라고 한다.
그리고 음양 이야기만 나오면 나는 '금화교역(金火交易)'이라는 말을 빼놓지 않는다. 금화교역이라는 말이 어렵지만 흥미롭다. 음양오행설에서 목화는 양이고, 금수는 음이다. 목생화는 양에서 양으로 가고, 금생수는 음에서 음으로 가는 것이다. 이는 오행적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목생화는 양으로 성장을 금생수는 음으로 내실을 관장한다. 목화가 금수를 만나지 못하면 성장은 하나 허장성세(虛張聲勢)가 되고, 열매를 맺지 않으니 평생 배워 활용하지 못하고, 금수가 목화를 만나지 않으면 성장해 본 적이 없으니 가지고 있는 것만 지키고 사니 이 또한 발전이 없게 된다. 음양이 만나야 배운 것을 활용하고, 새로운 것을 경험하며 실패를 거울 삼아 다시 재기에 도전할 수 있는 지혜 또한 쌓이게 되는 것이다. 목화가 금수를 보지 못하면 경험이 축적되지 못하니 했던 실수를 반복하게 되니 앞에서 남고 뒤에서 밑지는 것이고, 금수가 목화를 보지 못하면 더 넓은 세상 속으로 나아가질 못했으니 우물 안 개구리 신세가 따로 없을 것이다. 이처럼 음과 양이 만나야 쓰임새가 생겨나고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니 양 중의 양인 화와 음 중의 음인 금이 만나 서로의 경험과 능력이 상호작용을 일으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를 금화교역이라 한다. 이렇게 자연은 해마다 역,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래야 우주가 제대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런 시기가 12월 초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오광수 시인의 시를 오늘 아침 공유한다.
12월의 독백/오광수
남은 달력 한 장이
작은 바람에도 팔랑거리는 세월인데
한해를 채웠다는 가슴은 내놓을 게 없습니다
욕심을 버리자고 다잡은 마음이었는데
손 하나는 펼치면서 뒤에 감춘 손은
꼭 쥐고 있는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비우면 채워지는 이치를 이젠
어렴풋이 알련만
한 치 앞도 모르는 숙맥이 되어
또 누굴 원망하며 미워합니다.
돌려보면 아쉬운 필름만이 허공에 돌고
다시 잡으려 손을 내밀어 봐도
기약의 언질도 받지 못한 채 빈손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말입니다
해마다 이맘때쯤
텅 빈 가슴을
또 드러내어도
내년에는
더 나을 것 같은 마음이 드는데 어쩝니까?
다시 오늘 <인문 일기>의 처음 부분으로 되돌아간다. 위에서 길게 공유한 이야기에서 하고 싶은 말은 대장장이가 다양한 칼을 만들 뿐만 아니라, 그릇 등 아무 종류의 것이나 만들 수 있듯이, 우리도 반드시 인간으로만이 아니라 아무 형태의 존재, 심지어 '쥐의 간'이나 '벌레의 다리' 같은 것으로 다시 나타나더라도 그것을 그대로 감수하고 거기에 순응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여기서 등장하는 조화자나 대장장은, 유대교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인격적인 '신(神)과 달리, 자연이나 도의 변화 과정을 의인화한 메타포(metaphor)이다.
나는 이 태극도를 좋아한다.
'음정양동'이 나온다. 이 말은 태극이 움직여 양이 되고, 정지하여 음이 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자연은 서로 맞서는 두 성질의 분화와 교대, 대치와 협력으로 정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음과 양의 동적 긴장이 자연의 크고 작은 변화를 낳는다. 변화는 일정한 한계를 넘어서지 않는다. 반드시 음양은 자신의 극점에서 반전, 회귀하고, 고유의 사이클을 갖게 된다. 전체적으로 안정된 상태가 되었다고 느끼는 순간, 미지의 것이 느닷없이 닥칠 가능성이 커진다. 반대로 모든 것을 상실한 듯한 순간에 새로운 질서가 재앙의 혼돈 속에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인간은 그 경계의 길에서 살아간다. 그 경계에 걷는다는 것은 삶의 길 위에 있다는 거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정과 변화의 경계에서 의미를 찾고, 그 중도(中道)를 유지해야 한다. 우리는 혼돈과 질서, 즉 음과 양의 경계에서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려고 노력해야 한다.
물론 우리가 주위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것에 안달하지 않으려면, 장자가 말하는 도나 조물자 혹은 조화자가 결국은 만사를 선한 길로 이끌 것이라는 신뢰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런 형이상학적 '믿음' 있을 때 삶은 그만큼 두터워지고 믿음직해 진다. 그래 나는 삶의 좀 힘들 때, 다음 문장을 기억하고 소환한다.
세상이 움직이는 원리는 무엇인가? 하늘과 땅 그리고 성인으로 대표되는 도는 "편애하지 않는다("천지불인天地不仁")." 하늘과 땅은 어질지(仁) 않다(不)는 말로 저 하늘과 땅은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에 대하여 사랑이란 이름으로 간섭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도는 인간적 감정에 좌우되어 누구에게는 햇빛을 더 주고 누구에게는 덜 주는 따위의 일을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우주 전체의 조화로운 원리와 상관 관계에 따라 순리대로 되어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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