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공거사가 된 후부터 나는 내호를 허당(虛堂)으로 정했다.

3519.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1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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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공거사(地空居士, 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노인이라는 뜻의 은어)' 두 번째 해를 맞는 생일 아침이다. 나는 매년 생일마다 다음과 같이 다짐한다. "사람은 마지막까지 유쾌하게 살아야 한다. 사소한 기쁨과 웃음을 잃어버리지 않는 한 인생은 무너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즐거움은 마음만 먹으면 주변에서 언제든지 찾을 수 있다."(이근후) "인생의 비극 앞에서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절망할지 언정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이근후) 그래 나는 아침마다 <인문 일지>를 쓴다 그 이유는 이 시대에 대해, 내가 훈련 받은 '생각하는 능력'으로 갖게 된 어떤 '시각'으로 내 삶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내 글이, 사람들이 나에 대한 기억을 토대로, 더 나은 무언가를 시도해 볼 수 있는 플랫폼이 되었으면 하기 때문이다. 이 플랫폼을 통해 내가 이 세상에 다녀갔기 때문에 모두가 더 행복해지고, 더 건강해지고 더 깨끗해 졌으면 한다. 이 플랫폼이 있었기 때문에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과감하게 도전하는 젊은이들이 많았으면 한다. 우리가 세상에 남길 수 있는 흔적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남기는 좋은 기억들이었으면 한다. 내가 죽은 후에 누군가 나로 인해 사는 게 조금은 행복해졌다고 말해 준다면 그보다 값진 삶이 또 있겠는가?
나는 다섯 가지의 "유'를 좋아한다. 그리고 그걸 지향한다. (1) 자유(自由) (2) 사유(思惟) (3) 여유(餘裕) (4) 온유(溫柔) 마지막 다섯 번째가 YOU(당신)이다. 인간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자신이 왔던 흙으로 다시 돌아간다. 그 사실과 진리를 깨달은 인간은, 한정된 시간에 자신의 최선을 발휘되는 전략을 짠다. 유한함에 대한 아쉬움이 인문-과학-예술이다. 인간은 자신이 아닌 타자들, 타인과 자연과 함께 살기 위해 ‘문화(文化)’를 구축하였고, 그 문화를 가시적인 성과로 표현한 것이 ‘문명(文明)’이기 때문에 마지막 YOU가 중요하다.
그래 생일 아침에는 오탁번 시인의 시를 또 읽는다. 내가 나에게 부르는 노래이다. 반칠환 시인의 덧붙임도 아름답다. "‘왔데이’ ‘뭔데이’ ‘버스데이!’ 토착 몽골로이드 경상도 할매와 서방 코카소이드 아재가 만나 서로 딴소리 하는데 장단이 맞는다. 불통이 소통이 되는 기적이 연출된다. 경상도 사투리의 어미 ‘-데이’와 앵글로색슨어계의 명사 ‘데이’가 의미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음가적 같은 세계에서 만나 서로 다른 버스데이를 노래하며 행복한 코스모폴리탄의 세계로 떠나간다. 웃음이 배어 나오는 동화적 설정이다. 하지만 저 불통의 아전인수가 유쾌한 것은 둘 다 승객이기 때문이다. 만약 운전기사마저 승객들의 목적지를 자의적으로 판단해 데려간다면 저 여정의 끝은 노랫말처럼 해피하지 않을 것이다."
해피 버스데이/오탁번
시골버스 정류장에서
할머니와 서양 아저씨가
읍내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시간이 제멋대로인 버스가
한참 후에 왔다
- 왔데이!
할머니가 말했다
할머니 말을 영어인 줄 알고
눈이 파란 아저씨가
오늘은 월요일이라고 대꾸했다
- 뭔데이!
버스를 보고 뭐냐고 묻는 줄 알고
할머니가 친절하게 말했다
- 버스데이
오늘이 할머니 생일이라고 생각한
서양 아저씨가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해피 버스데이 투 유!
할머니와 아저씨를 태운
행복한 버스가
힘차게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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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공거사가 된 후부터 나는 내호를 허당(虛堂)으로 정했다. 그 대신 '목계(木鷄)'는 자로 정했다. 원래 허당이라는 말은 '능숙해 보이지만 이외의 부분에서 어설프고 빈틈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내가 택한 호의 '허당'의 허(虛)는 빌 허(虛)자에 당당한 당(堂) 이다.
'허(虛)'는 노자에게서 배웠다. 비움의 철학자 하면 노자이다. <<도덕경>> 제11장을 소환한다. "서른 개 바퀴살이 한 군데로 모여 바퀴통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가 비어 있음으로 수레의 쓸모가 생겨납니다.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가 비어 있음으로 그릇의 쓸모가 생겨납니다. 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가 비어 있음으로 방의 쓸모가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있음은 이로움을 위한 것이지만 없음(비어 있음)은 쓸모가 생겨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도덕경>> 구절이다. 제16장에 나온다. "완전한 비움에 이르십시오. 참된 고요를 지키십시오, 온갖 것 어울려 생겨날 때 나는 그들의 되돌아감을 눈여겨봅니다” 라고 한다. 원문은 이렇다 “致虛極, 守靜篤, 萬物竝作, 吾以觀復(치허극 수정독 만물병작, 오이관복)” 이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비움을 끝까지 하고, 고요한 상태를 돈독하게 하여 지키는 일상을 꾸리라는 말로 읽는다. 도올의 주장처럼, 노자의 허(虛, 비움)는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 찬 '빔' 이며, 그의 "정(靜)"은 '동(動)'을 함유한 '정' 이기 때문이다. '정지정(靜祉靜)'이 아니라, '동지정(動之靜)'이라는 말이다. 노자의 정은 동의 가능태로 서의 정일 뿐이다. 정하지 않고 서는 동할 길이 없다는 거다. "유무상생(有無相生)"에서 처럼, '허(빔)와 만(참)', '동(움직임)과 정(고요)'과 같은 모든 개념이 상호 부정의 대자가 아니라, 서로 기다리고 서로를 긍정하는 대자의 관계에 놓여 있다. 기다림, 느낌, 수용과 배제 속에서 생성은 이루어진다. 생성은 곧 창조이며 창조는 새로움의 요소이다. 그래 나는 이 문장을 비워야 채워지고, 고요해야 움직일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한다. 비쁜 날들이 계속되면, 이 문장을 소환하고, 비우고 고요 해지려고 한다. 이젠 문장 구조를 알겠다. '치허'를 지극하게 하고, '수정'을 돈독하게 하라는 것으로 읽는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구절이 "萬物竝作(만물병작) 吾以觀復(오이관복)"이다. 이 말은 '만물이 연이어 생겨나지만 나는 그들이 돌아가는 것을 본다'란 뜻이다. 도올 김용옥 교수는 "만물이 더불어 함께 자라는데, 나는 돌아감을 볼 뿐이다"고 해석한다. 나는 '만물이 다 함께 자라는데, 나는 그것을 통해 되돌아가는 이치로 본다"로 읽고 싶다. 만물이 다 함께 번성하는 모양 속에서 되돌아가는 이치를 본다는 거다.
나는 이 문장을 만날 때마다 "되돌아 감"을 나는 늘 주목한다. 도(道)의 핵심 내용은 반대 방향을 지향하는 운동력, 즉 반(反)이다. 어떤 것도 변화하지 않거나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이 동양 철학이고, 이를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 해석한다. 이를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도덕경> 제40장)라 한다. 나는 오늘 아침도 '되돌감'을 되새긴다. 달도 차면 기울고, 낮이 밤이 되고 밤이 낮이 된다. 아주 더운 여름이 되면 다시 추운 겨울로 이동하고, 심지어 온 우주도 팽창과 수축을 반복한다. 이 모든 것은 어느 한 쪽으로 가다가 극에 도달하면 다른 쪽으로 가는 '도'의 원리에 따르는 운동이라는 것이다. 너무 그리워하지 말자. 때는 기다리면 온다.
또한 비움을 강조하고 있는 <<도덕경>> 제48장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학문의 길은 하루하루 쌓아가는 것. 도의 길은 하루하루 비워가는 것. 비우고 또 비워 함이 없는 지경[無爲]에 이르십시오. 함이 없는 지경에 이르면 되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원문은 이렇다. '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無爲而無不爲(위학일익, 위도일손. 손지우손, 이지어무위, 무위이무불위)." 여기서도 내가 좋아하는 것이 "덜어내고 덜어내면 무위에 이르고, 무위하면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無爲而無不爲)"는 말이다. 여기서 '무위(無爲)'를 아무 것도 하지 않거나 무슨 일이건 그냥 되어가는 대로 내버려주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노자가 하고 싶었던 말은 '무위'가 아니라 '무불위(無不爲, 되지 않는 일)'라는 효과를 기대하는 거였다. 어쨌든 비우고 덜어내 텅 빈 고요함에 이르면, 늘 물 흐르듯 일상이 자연스러워진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뿐 포장하지 않으며, 순리에 따를 뿐 자기 주관이나 욕심을 고집하지 않는다. 그 결과 그의 모든 행위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항상 자유롭고 여유롭다. 샘이 자꾸 비워야 맑고 깨끗한 물이 샘 솟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만약 비우지 않고, 가득 채우고 있으면 그 샘은 썩어간다. 그러다 결국은 더 이상 맑은 물이 샘솟지 않게 된다.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을 자꾸 비워야 영혼이 맑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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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당(虛堂)에서 당(堂)은 흙 토(土)에 오히려 상(尙)이 합쳐진 것이다. 상(尙)은 다시 향할 향(向)에 팔(八)이 놓인 모습인데, 향(向)은 창문이 나 있는 집의 모양이다. 집을 뜻하는 향(向) 위에 팔(八)이 놓였다는 것은 집 이에 무너가 더 얹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상(尙)은 '높이다. 올리다, 숭상하다' 등의 뜻도 함께 가진다. 이렇게 보면 당(堂)은 토대(土) 위에 지어진 "더 높인 집'이라 해석할 수 있다. 그러니까 당(堂)은 중심이 집(尙)이 아니라 토(土)에 있다고 보면, 당의 본래 의미는 집(向)을 짓기 위한 토대(土)인 것이다.
아름답고 튼튼한 집일수록 그 터를 제대로 파고 집의 토대를 단단히 하여야 한다. 그 집의 당당함은 멋지고 아름다운 겉모습이 아니라, 그 터의 견고함에서 나온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쉽사리 무너지지 않고, 그 자리에 변함없이 꼿꼿이 서 있는 그 모습이 진정한 당당함이다. 그렇게 당당한 사람이 되려면, 아무런 기본이나 실력도 없이 사람들 앞에서 빨리 인정받고 사랑하고 싶다는 조급한 마음으로 아무렇 게나 쌓아 올린 집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기초부터 단단히 다진 뒤 조금씩 내 영역을 확장해 가며 든든하게 쌓아 올린 집에서 온다.
당당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당당한 모습은 참으로 멋지지만, 당당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 당당한 모습은 오히려 안타깝다. 기초 작업은 등한시하고 외관을 멋지게 꾸미는 데만 공들인 집은 오래가지 않아 무너지기 마련이다. 꾸준히 기초 토대 위에 실력을 연마하고, 그 위에서 집이라는 자기 인생을 쌓아가는 사람이 진짜 당당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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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공거사(地空居士, 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노인이라는 뜻의 은어)' 두 번째 해에 다시 한 번 다짐한다. 세상과 겨루지 않고 살려 한다. <<도덕경>>의 마지막 문장이 "하늘의 도는 모두를 이롭게 하고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 성인은 이를 따라서 모두를 이롭게 하고 누구와 겨루지 않는다(天之道(천지도) 利而不害(이이불해), 聖人之道(성인지도) 爲而不爭(위이부쟁)"이다. 싸우지 마라는 말보다 겨루지 마라는 말이 더 마음에 든다. 겨루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겨루지 않으려면 '소욕지족(少欲知足)' 정신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내가 '아무 것도 아님(nothing-ness)'을 자각하는 거다. 그러니 더 많이 주고, 덜 따지며,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놓을 줄 아는 거다. 욕망을 절제하는 것이 ‘소욕지족’의 정신이고, 이것이 바로 부자로서 살아가는 것이 된다. <<아함경>>에서도 지족(知足, 족함을 아는 것)이 제일 부(富)요, 무병(無病, 건강한 것)이 제일 이(利)요, 선우(善友, 착한 도반)가 제일 친(親)이요, 열반(涅槃, 고요한 명상)이 제일 락(樂)이라고 하였다. 법정 스님도 "소욕지족 소병소뇌(少欲知足, 少病少惱)를 말한 적이 있다. 적은 것으로써 만족할 줄 알며, 적게 앓고 적게 걱정하라'란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작은 것으로 만족하고, 몸에 병이 적고 머리에 생각이 적게 하자는 거다. 크고 많은 것보다는 작고 적은 것 속에, 삶의 향기인 아름다움과 고마움이 스며 있다는 거다.
걱정을 줄여라. 걱정은 욕망을 바탕으로 한다. 이 욕망은 스스로 자족하지 못함에서 생기는 것이다. 번뇌에 물들지 않고 지혜로운 사람은 애써 구하거나 가지려 하지 않는다. 오는 것을 막으려 하지 않고 가는 것을 잡으려 고도 하지 않는다. 인연 따라 그저 마음을 편안히 지니고 살아간다.
내려가는 것이 바로 올라가는 거다. 시간이 지나면 부패하는 음식이 있고, 시간이 지나면 발효되는 음식이 있듯이 시간이 지나면 부패하는 인간이 있고, 시간이 지나면 발효되는 인간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썩지 않고 맛있게 발효되는 인간은 바로 끊임없이 내려가는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나이를 한 살 더 먹을 수록 유연하게 살자는 다짐도 한다 노자 <<도덕경>>에서 알게 된 "수유왈강(守 柔曰强)"을 소환한다. '부드러움(柔)을 지키며 사는 것이 진정한 강함'이라는 거다. 부드러운 물이 강하고, 센 바위를 이기듯이, 부드러운 풀이 강한 바람에 견디듯이, 부드러움은 위대한 강자의 정신이라는 거다. 부드러움은 이 자연 계가 운행하는 모습이다(弱者道之用, 약자도지용), 또 살아 있는 것은 부드럽고, 죽어 있는 것은 뻣뻣하다.
비슷한 말이 제43장에도 나온다. '천하의 가장 부드러운 것이 천하의 가장 단단한 것을 부린다'는 "지유치빙지견(至柔馳騁至堅)이란 말이다. '지극히 부드러운 것이 지극히 견고한 것을 뚫고 들어간다'는 거다. "치빙(馳騁)"은 말을 타고 이리저리 내달리는 것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뚫고 들어간다는 의미로 보기도 하고, 완벽하게 제어한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말을 달리게 하는 것은 말을 제어할 때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 '부린다'고 해석했던 것이다. 지유(至柔)가 지견(至堅)을 제어(制御)한다고 읽을 수 있다. 마치 여자가 남자를 제어하고, 물이 불을 제어하는 것과 같다. '제어'라는 말에 방점을 찍는다. '제어하다'라는 말 중에는 '감정, 충동, 생각 따위를 막거나 누르는' 것으로 쓰인다.
그리고 제36장에는 "유약승강강(柔弱勝剛强, 부드럽고 약한 것이 강하고 견고한 것을 이긴다)"이란 말이 있다. "수유(守柔, 부드러움을 지키기)"는 이유를 말하는 거다. 강한 다이아몬드를 뚫고 지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이아몬드보다 더 단단하고 견고한 물질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정답은 아니다. 그렇게 하면 둘 다 부서지고 만다. 물과 같은 가장 부드러운 물질이라야 다이아몬드를 뚫고 들어갈 수 있다. "'형체가 없는 것은 틈이 없는 곳에도 들어간다. 나는 이것으로 무위의 유익함을 안다(無有入無間)"는 거다. 중국 한나라의 명장 이광이 어느 날 산속을 가다가 호랑이를 발견하고 화살을 쏘아 정통으로 맞혔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바위였다. 그런데 바위라는 것을 알고 다시 쏘니 화살이 계속 튕겨져 나왔다. 마음속에 바위가 없는 상태, 즉 무(無)의 상태에서는 바위를 뚫을 수 있었지만 바위를 채운 상태, 즉 유(有)의 상태에서는 그것을 뚫을 수 없었던 것이다. '유'를 뚫을 수 있는 것은 '무'밖에 없다. 왕필은 "무유입무간(無有入無間, 형체가 없는 것은 틈이 없는 곳에도 들어간다)"에 대해 "기(氣)는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없고, 물은 스치지 못하는 곳이 없다(기무소불입, 수무소불경(氣無所不入, 水無所不經)"고 주를 달았다.
부드러운 사람은, "즐거운 때"를 아끼지 않는다. 남은 삶 동안 기쁜 마음으로 즐겁게 살아갈 생각이다. 인생에서 언제나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상처 받아 가슴 아픈 날도 분명히 있다. 누군가는 기쁨과 슬픔이 씨실과 날실이 되어 인생이라는 천을 직조한다고 표현했다. 중요한 건 기쁨이나 슬픔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일 것이다. 기쁨 속에서도 신중함을, 슬픔 속에서도 희망과 긍정을 가미한다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슬픔만으로 짜인 어둡고 우울한 색감이나 기쁨만으로 짜인 가벼운 색감 대신 깊이가 느껴지는 멋진 색감의 천이 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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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루카 복음> 21,5-11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다, 재난의 시작" 이다. 그때에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
하느님께서 이루실 영원한 끝은/상지종 신부님
“그러한 일들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루카 21,9)
하느님께서
이루실 영원한 끝은
불신 너머 믿음이니
늘 오롯이 믿으렵니다
하느님께서
이루실 영원한 끝은
절망 너머 희망이니
늘 기꺼이 희망하렵니다
하느님께서
이루실 영원한 끝은
미움 너머 사랑이니
늘 뜨겁게 사랑하렵니다
하느님께서
이루실 영원한 끝은
슬픔 너머 기쁨이니
늘 해맑게 기뻐하렵니다
하느님께서
이루실 영원한 끝은
불의 너머 의로움이니
늘 당당히 의로우렵니다
하느님께서
이루실 영원한 끝은
거짓 너머 진실이니
늘 하얗게 진실하렵니다
하느님께서
이루실 영원한 끝은
분열 너머 화해이니
늘 따뜻이 화해하렵니다
하느님께서
이루실 영원한 끝은
억압 너머 자유이니
늘 마음껏 자유로우렵니다
하느님께서
이루실 영원한 끝은
저주 너머 축복이니
늘 빛나게 축복하렵니다
하느님께서
이루실 영원한 끝은
죽임 너머 살림이니
늘 푸르게 살리렵니다
오늘 말씀들은 우리의 인생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우리는 평생 무엇을 쌓아 올리고 있습니까? 우리 각자는 ‘나’라는 신상을 멋지게 만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머리에는 ‘명예’라는 황금을 씌우고, 가슴에는 ‘재물’이라는 은을 채우며, 다리에는 ‘건강’과 ‘권력’이라는 쇠를 두릅니다. 우리는 그것들이 나를 지켜줄 것이라고 믿으며, 그 아름다움에 스스로 감탄합니다. “내 인생 정말 잘 멋져!” 그러나 예수님과 다니엘 예언자는 경고합니다. “모든 것은 진흙 위에 서 있다.”
우리가 세상에서 쌓아 올린 공든 탑은, '질병'이라는 돌, '경제 위기'라는 돌, '이별'이라는 돌 그리고 마침내 '죽음'이라는 돌이 날아와 부딪히는 순간,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져 내릴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절망해야 할까요? 모든 것이 허무하니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할까요? 아니죠. 오늘 말씀의 핵심은 ‘파괴’가 아니라 ‘새로운 건설’에 있습니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참고로 이준 신부님의 강론입니다. "무너지는 것들 사이에서 영원을 붙잡는 지혜를 말씀하신다. 우리는 지금 전례 력의 마지막 주간인 연중 제34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 시기에 세상의 종말과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묵상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이들이 성전의 아름다움을 찬양합니다. “이 성전이 정말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구나!” 그들의 눈에 예루살렘 성전은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웅장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완벽하게 담아낸 그릇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감탄에 찬물을 끼얹는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6).
우리가 절대적이고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이라는 이 예고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줍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오늘 제1독서 다니엘서의 환시와 맞닿아 있습니다. 다니엘 예언자는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의 꿈을 해석합니다. 꿈에 나타난 거대한 신상은 황금 머리, 은 가슴, 청동 배, 쇠 다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겉보기에 화려하고 강력하게 보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다 가진 듯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 신상의 치명적인 약점은 ‘발’에 있었습니다. 발이 쇠와 진흙이 섞여 있어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옵니다.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는데 돌 하나가 떨어져 나와, 쇠와 진흙으로 된 그 상의 발을 쳐서 부수어 버렸습니다"(다니 2,34). 화려했던 금, 은, 청동, 쇠는 타작마당의 겨처럼 되어 바람에 날려가 버리고 흔적도 없게 됩니다.
오늘 말씀들은 우리의 인생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우리는 평생 무엇을 쌓아 올리고 있습니까? 우리 각자는 ‘나’라는 신상을 멋지게 만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머리에는 ‘명예’라는 황금을 씌우고, 가슴에는 ‘재물’이라는 은을 채우며, 다리에는 ‘건강’과 ‘권력’이라는 쇠를 두릅니다. 우리는 그것들이 나를 지켜줄 것이라고 믿으며, 그 아름다움에 스스로 감탄합니다. “내 인생 정말 잘 멋져!” 그러나 예수님과 다니엘 예언자는 경고합니다. “모든 것은 진흙 위에 서 있다.”
우리가 세상에서 쌓아 올린 공든 탑은, '질병'이라는 돌, '경제 위기'라는 돌, '이별'이라는 돌 그리고 마침내 '죽음'이라는 돌이 날아와 부딪히는 순간,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져 내릴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절망해야 할까요? 모든 것이 허무하니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할까요? 아니죠. 오늘 말씀의 핵심은 ‘파괴’가 아니라 ‘새로운 건설’에 있습니다.
다니엘서에서 신상을 부서뜨린 돌,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는데 떨어져 나온 돌”(다니 2,34 참조)은 어떻게 되었나요? "그 상을 친 돌은 거대한 산이 되어 온 세상을 채웠습니다"(다니 2,35). 그리고 다니엘은 그 돌이 바로 “하느님께서 세우실 한 나라”(다니 2,44 참조),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하느님의 왕국을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이 ‘떨어져 나온 돌’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인간의 손으로 만든 성전은 무너졌지만, 하느님께서 직접 보내신 ‘모퉁잇돌’이신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시어 영원한 구원의 산이 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 무서워하지 마라”(루카 21,8-9)하고 당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이 흔들리고, 전쟁과 지진이 일어나고, 내가 믿었던 가치들이 무너져 내릴 때, 그때가 바로 가짜가 사라지고 진짜가 드러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진흙과 섞인 세상의 왕국이 무너질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영원한 왕국이 우리 삶에 우뚝 서게 됩니다.
무너질 것들에 여러분의 희망을 걸지 마세요. 화려한 겉모습, 인간이 만든 제도나 재물은 언젠가 사라집니다. 오직 ‘떨어져 나온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여러분의 인생을 거십시오. 그분 위에 지은 집은 비바람이 몰아쳐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오늘 하루, 내 삶의 발이 진흙으로 되어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시다. 그리고 허물어질 세상의 성전을 꾸미느라 애쓰기보다,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하느님의 나라를 내 마음속에 튼튼히 세우는 지혜로운 신앙인이 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