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동은 나무들처럼 사람도 겨울나기 준비를 해야 하는 때이다.

3503.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11월 9일)
1
지난 11월 7일이 입동이었다. 한자로 '설 립(立)'과 '겨울 동(冬)"을 써서 '겨울이 들어 선다'는 뜻이다. 절기상으로는 이날부터 겨울이 시작된다고 여겨지지만 실제 날씨는 가을에 가까운 경우가 많다. 실제로 지금이 단풍 시절이다. 거리가 온통 울긋불긋하다. 아름답다. 입동은 예로부터 겨울을 맞이할 준비의 시작으로 여겨졌다. 엣 시골에서는 햇곡식으로 시루떡을 쪄 고사를 지내고 농사철에 고생한 소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는 풍습이 있었다. 곡식을 저장하고 김치를 담그는 시기로도 알려져 '입동이 지나면 김장 준비를 한다'는 속담이 전해지고 있다. 입동 무렵에는 실제로 추위가 시작되기보다 겨울로 접어드는 변곡점이 된다. 입동이 지나면 북서풍이 강화되고 기온이 점차 떨어지면서 본격적인 초겨울 날씨가 시작된다. 입동 체철 음식으로는 굴, 과메기, 꼬막, 한라봉, 시래기 된장국, 추어탕, 유자차 등이 꼽힌다.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음식과 면역력을 높이는 제철 해산물을 즐기며 겨울을 준비하는 시기로 삼는 것이 좋다.
<<제철 행복>>의 김신지 작가는 겨울을 "눈을 덮고 잠드는 계절"이라고 표현한다. 그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절기가 입동이다. 이 절기의 "제절 숙제"로 다음 세 가지를 제안한다.
▪ 다가올 연말 모임을 위한 선물 틈틈이 사두기
▪ 올해 남은 두 달 동안 하고 싶은 일, 만나고 싶은 사람 적어보기
▪ 감나무 가지 끝에 달린 다정한 마음, 까치 밥 찾아 보기
입동은 나무들처럼 사람도 겨울나기 준비를 해야 하는 때이다. 옛사람들에게 농사를 짓지 못하는 겨울은 식량이 부족해질 수밖에 없는 계절이었기에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겨우내 먹을 식량을 저장했다. 내 어린 시절만 해도 그랬다. 가장 큰 겨울나기 행사는 김장이었다. 입동이 지나면 싱싱한 재료가 없어지고 추워서 일하기가 어려워지므로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김장을 했다. 그 외에도 무청은 말려서 시래기를 만들고, 감을 깎아 처마 아래 주렁주렁 곶감을 매달고, 생선을 바람에 말리거나 소금에 재워 상하지 않게 보관하기도 했다. 그리고 긴 겨울 동안 쓸 땔감을 마루 아래 차곡차곡 쌓아두고, 겨울 바람을 버텨 주길 바라며 창호지를 덧발랐다. 이 모든 준비는 추위가 이미 닥쳐온 후에 하면 늦는 것들이다. 그렇게 입동에는 부지런히 움직여 미리 겨울을 준비하던 마음이 서려 있다. 지금 이상 기후로 일기가 달라지고, 생활 패턴이 달라져서 옛 풍습으로 기록될 뿐이다.
분주한 틈에도 조상들은 눈보라가 몰아치면 먹을 것을 구하기 힘들어질 새들을 잊지 않았다. 감을 수확하며 일부러 새들이 먹을 것을 몇 개쯤 남겨두는 마음, 산천이 꽁꽁 얼어붙었을 때 가지 끝에 남은 열매가 요긴하게 쓰이길 바란 마음이다. 그런 마음이 있어 '까치밥'이라는 이름이 붙고, 지금까지 그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요즈음에는 많이 잊힌 풍속이지만, '치계미(雉鷄米)'라는 경로잔치를 열기도 했다. 추위에 약한 어르신들이 건강하게 겨울을 나길 기원하며 마을 사람들이 십시일반 내놓은 재료로 음식을 만들고 작은 선물을 대접했다. '치계미'는 꿩과 닭과 쌀을 뜻한다. 원래 사또의 밥상에 올릴 반찬 값 명목의 뇌물을 뜻하여 오늘날의 떡값 의미와 같았다. 그러니 마을 노인들을 사또처럼 대접하라는 뜻을 담은 셈이다. 여기서는 경로잔치를 위한 추렴의 의미이다. 추렴은 저마다 형편껏 하는 데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살림이 어려운 이들은 도랑에 숨은 살진 미꾸라지라도 잡아 추어탕을 대접했는데 이를 '도랑탕 잔치'라 불렀다 한다.
입동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건 아무래도 혼자가 아니라, '함께' 겨울을 건널 준비를 하라는 말 같다. 그래서 김신지 작가는 입동 이후로는 자신이 만들어낼 수 있는 온기를 생각하여 틈틈이 연말 연시 선물을 사 모은다 했다. 나도 따라할 생각이다. 이 무렵의 거리는 그 자체로 커다란 크리스마스 선물 상가 같다. 가게마다 선물하기 좋은 상품들을 내놓고 포장도 특별하게 해주니 괜히 마음이 부푸는 계절이다. 이제 곧 바쁘게 사느라 연락이 뜸했던 지인들과 해가 가기 전에 모이자는 이야기를 나눈다. 겨울은 지난 계절 동안 흩어져 살던 우리를 한자리에 모이게 한다. 옷깃을 여민 채로 걸음을 서둘러 어딘 가에 도착하고, 문을 열자마자 두리번거리다가 손을 들어 반가움을 표시하고, 찬바람 묻은 외투를 벗으며 마침내 마주 앉아 웃기까지, 다행히도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 약속 시간 전에 급하게 뭐 라도 가져갈 것을 찾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겨울나기 채비 만큼이나 선물 준비도 미리미리 해둔다는 거다.
예로부터 우리는 '하선동력(夏扇冬曆)'이라 해서, '여름 부채, 겨울 달력', 즉 철에 맞는 선물을 했다. 그리고 귀엽고 포근한 양말도 주고 받기 부담이 없다. 아니면 장갑이나 목도리도 겨울내내 따뜻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사둔다. 또한 예쁜 달력을 새해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모아 둔다. 별 것 아닌 마음은 전해지는 순간 별것이 된다. 마른 감나무 가지 끝에 매달린 까치밥은 멀리서 보면 꼭 오렌지색 전구를 켜둔 것 같다. 한겨울에도 꺼지지 않는 전구 하나 켜둔 마음으로 한참 이른 연말 선물을 준비한다.
2
세계 질서를 고민해 본다. "자본이 투자를 놓고 흥정할 때 우리 삶을 협상할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화두이다. '더 싼 노동력 찾아 기업이 해외로 가는 게 우리 경쟁력이다.' '외국 기업 들어오게 노동자 권리 단속하는 게 우리 좋은 일이다." 이게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망쳐온 방식이다. 그리고 통제되지 않는 금융화는 위기를 더욱 키웠다. 투자를 구걸하지 않고 협박으로 뜯어내는 것은 미국에만 가능한 일이다. 자유무역 등 기존 규칙을 무너뜨리지만 새로운 규칙을 제시하지 못하는 미국의 모습은 패권의 증거이자 패권이 무너진 증거다. 관세협상 이후 대미 투자 수익성을 극대화하고, 한국을 더욱 ‘기업 하기 좋은 나라'로 만들자는 주문들이 이어진다. 신자유주의는 자신의 폐허 속에 좀비들을 남겨놓았다.
한국에서 신자유주의가 가속화되면서 펼쳐진 현실은 줄곧 다음과 같은 사회 문제로 등장했다.
▪ 불안정 노동,
▪ 실질소득 감소,
▪ 가계부채 증가,
▪ 주거 불안,
▪ 돌봄 위기,
▪ 생태 파괴, 농업 붕괴 등
불평등이 심화하며 사회가 파괴된 자리를 떠받치는 일은 이주 노동자에게 돌아갔다. 트럼프가 강력한 반이민 정책을 펼치자 일부 산업이 아예 불능 상태에 빠졌던 상황은 한국이라고 다르지 않다. 그러나 위기의 구조적 해법을 찾는 일은 늘 뒷전으로 밀렸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이전부터 쌓여온 반세계화 여론은 대안 세계화의 정치로 조직되지 못하고 극우의 확산으로 이어졌다. ‘미국 우선’을 말하며 민중의 분노를 흡수하는 트럼프는 위대한 왕이 아니라 왕관을 좋아하는 극우 정치인일 뿐이다. 그는 대안 없음의 가장 강력한 증거이지만 그래서 가장 강력한 대안이 되고 있다.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목소리가 지워진 탓이다.
그럼에 불구하고, 지금이야 말로 다른 세계를 말해야 할 때다. 마침 조란 맘다니의 뉴욕시장 당선 소식도 전해진다. 세계는 신자유주의 이후 자본주의가 가능한지 질문하는 중이다. 우리도 질문해야 한다.
▪ 공장을 닫는다고 노동자의 삶까지 닫아버리게 둘 것인가,
▪ GPU를 얻었다고 신나 하며 지구를 태울 것인가,
▪ 잠수함이 무기라는 사실을 잊고 주식 호재라 반길 것인가.
사회의 목적은 자본주의 재생산이 아니며, 경제의 목적은 사회의 재생산이어야 한다는 지극한 상식부터 확인하자. 자본이 투자를 놓고 흥정할 때 우리 삶을 협상할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의 글에서 얻은 생각이다.
3
조동화 시인의 <나 하나 꽃 피어>라는 시에서, “나 하나 꽃 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느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 피고 나도 꽃 피면 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나 하나 물들어 산이 달라지겠냐고도 말하지 말아라 /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 결국 온 산이 활활 타오르는 것 아니겠느냐”고 했다. 정말 그렇다.
이런 식으로 <인문 일지>를 쓰기 시작한 9년 전에는 <사진 하나, 문장 하나>로 시작했었다. 예컨대,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어둠을 탓하는 시간에 촛불을 들어 밝히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나이든 자의 지혜는 제 것만 옳다고 하는 아집(고집)과 무지(무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에서 얻는다." "십 년 가는 권세 없고, 열흘 붉은 꽃이 없다." 당시 박근혜 정부의 말 년이었다.
그 후 1년이 지나면서 문장이 좀 길어졌다. 레드 카펫이 한 말이다. "내 영혼에 흠이 간다 해도 네 발이 즐거우면 된 거잖아요. 발에는 영혼이 있으니까요." 영어에서 발바닥(sole)과 영혼(soul)은 발음이 같다. 발바닥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가장 고생하고 힘든 사람을 위로하는 것일 수 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있는 곳에 따라서 주인이 되라. 그러면 서 있는 곳 모두가 참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현재 지금 여기에서 주인의식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라는 말이다. 나는 이 말을 아주 좋아한다. 어느 공간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고 그 공간을 자신에게 어울리는 공간으로 만드는 능력을 보여주라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런 시를 공유한 적도 있다.
강이 휘돌아가는 이유/우대식
강이 휘돌아가는 이유는
뒷모습을 오래도록 보여주기 위해서 이다
직선의 거리를 넘어
흔드는 손을 눈에 담고 결별의 힘으로
휘돌아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짧은 탄성과 함께 느릿느릿 걸어왔거늘
노을 앞에서는 한없이 빛나다가 잦아드는
강물의 울음소리를 들어보았는가
강이 굽이굽이 휘돌아가는 이유는
굽은 곳에 생명이 깃들기 때문이다
굽이져 잠시 쉬는 곳에서
살아가는 것들이 악수를 나눈다
물에 젖은 생명들은 푸르다
푸른 피를 만들고 푸른 포도주를 만든다
강이 에둘러 굽이굽이 휘돌아가는 것은
강마을에 사는 모든 것들에 대한 깊은 감사 때문이다
몇 년 전 잘못된 지도자로 인해 실용의 이름으로 한국의 4대강이 참혹하게 능욕당했다. 그 오랜 세월을 자유롭게 흘러온 강들이 무도한 폭력에 의해 무섭게 파이고 비틀리고 토막 나고, 가차 없이 시멘트로 파묻히었다. 강들은 흐름의 자유를 잃고, 휘돌아가야 할 이유를 잃었다. 이젠 "앞 강물, 뒷강물"하고 노래했던 소월의 음률도,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라는 비유도 더 이상 소용 없게 될 판이다. 뿐만 아니라, 강물 속과 강변의 생태계도 무너졌다. 낙동강 오리들은 알 낳을 장소를 잃었다. 이젠 '낙동강 오리 알 신세'라는 말도 소용없게 되었다. 강이 가르치는 그 정교함과 아름다움, 시인의 눈에 비친 자연스러운 흐름을 빨리 회복하여야 한다.
4
사무량심(四無量心)이란 단어를 아침에 만났다. 삶이 힘들 때 우리를 붙잡아 주는 네 개의 등불 이는 단순한 착한 마음이 아니라,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네 개의 문이다. 세상에 대한 마음이면서, 동시에 나 자신을 살리는 마음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위한 자비가 세상으로 흘러 나가는 순간, 나 또한 그 따뜻함 안에 서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이 막막할 때, 복잡한 인간관계가 지칠 때, 이 네 가지 마음을 가장 먼저 떠올려 본다. "어둠은 어디에나 있지만, 마음이 꺼지지 않으면 나는 길을 잃지 않는다. 특히 집착하지 마라. 세상만사에 집착하지 않으면 문제될 것이 없다.
▪ 자-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 세상을 향한 사랑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을 해치지 않는 법을 배우는 마음이다.
▪ 비-남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마음. 남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아니라, 모든 고통이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아는 지혜이다.
▪ 희-남의 행복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마음, 타인의 행복을 빌며, 내 안의 시샘과 비교를 녹이는 수행이다.
▪ 사-모든 감정과 집착을 내려놓는 마음. 집착을 버려 텅 비는 게 아니라, 모든 걸 품을 만큼 마음이 넓어지는 상태이다.
5
오늘은 라테라노(이탈리아 로마 시내 성당 중 가장 오래된 대성당이자 전세계 가톨릭 교회에서 가장 격이 높은 대성전이다. 천주교 로마교구 주교좌성당이며, 이는 즉 로마교구장인 교황 성좌가 위치한 성당) 대성전 봉헌 축일이다. 오늘의 말씀은 <요한 복음> 2,13-22 "성전을 정화하시다" 이다.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성전입니다/상지종 신부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요한 2,20)
하느님을 계시게 하고
벗들을 있게 하니
우리는 비로소
있게 하시는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성전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벗들을 믿으니
우리는 비로소
믿으시는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성전입니다
하느님을 희망하고
벗들을 희망하니
우리는 비로소
희망하시는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성전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벗들을 사랑하니
우리는 비로소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성전입니다
하느님을 살리고
벗들을 살리니
우리는 비로소
살리시는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성전입니다
성전 이야기는 다음 <인문 일지>에서 할 생각이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