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생명은 근원적으로 '활동'과 '네트워크를 좋아한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11. 13. 07:33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2024년 11월 13일)
만족(滿足)이라는 한자의 뜻을 살펴보면, 만(滿)은 '가득하다', '차 오르다'라는 뜻이고, 족(足)은 그냥 '발'이라는 뜻인데, 어째서 만족에 굳이 발 족(足)자를 쓰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발목까지 자 올랐을 때 멈추는 것이 바로 완벽한 행복이라는 뜻이 아닐까? 만족(滿足)'이라 는 한자를 보면서 행복은 욕심을 최소화할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고 보니 발목 까지만 따뜻한 물이 자 올라도 온 몸이 나른 해지고, 발만 시원해도 온몸의 땀구멍으로 열기가 빠져나가는 것 같은 경험을 한 일이 떠오른다. 지금껏 종종 목까지 자 오르고 머리끝까지 재워져야 행복할 것이라는 욕심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발목 까지만 자 올라도 웃을 수 있는 지혜로 풍성한 나날을 살아가고 싶다.
말이 나은 김에, 내가 늘 외우는 문장이 있다. 나라는 것이 이루어졌을 때 라야 흡족해 하는 것이 만족이라면 자족은 어떠한 형편이든지 긍정 하는 삶의 태도이다? 그러니까 행복의 비결은 자족(自足)이다. 요즈음 우리 대부분이 스스로 가난하다고 느끼는 것은 끼니를 걱정하는 절대 가난 때문이 아니라, '상대적 빈곤으로 무엇이나 남처럼 가지려 하는 마음 때문에 생겨난다. 흔히 말하듯 '필요'보다 '욕심'에서 생기는 가난이다. 이럴 때 분수를 알고 자족할 줄 알면 빈곤감이 없어지고 자기에게 있는 것만으로도 부자처럼 느끼며 살 수 있다.
다음은 고미숙으로부터 배운 나의 삶의 철학이다. 생명은 근원적으로 '활동'과 '네트워크를 좋아한다. '관계'와 '활동'이 생명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소유와 성공 곧 돈과 물질에 관련된 것만 매달리면 꼭 막히게 되고, 끝에서는 허무할 뿐이다. 오스카 와일드가 했던 다음 말이 즉각 소환되었다. "파렴치(破廉恥)함이란 모든 것의 가격만 알고, 가지는 조금도 모르는 것이다." 살맛이 나려면 어떤 활동을 하고 관계를 맺는 게 중 요하다. 계속 어딘가로 누군가로 이어져야 한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길 위의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데 길 위에서 누군가를 만난다고 할 때 그걸 연결해 주는 건 지성밖에 없다. 사업으로 사람을 만나는 건 교환관계에 들어가는 거다. 그런데 지성을 통해 누군가와 진해지면 그 공간이 바로 우리의 일상으로 들어 온다. 그 일상 속에서 소유보다는 사람 즉 존재로 나가는 게 중요하다. 그러면 서로의 생각이 접속을 한다. 이런 접속을 통해 가지가 생성된다. 무에서 유가 나오는 것이지, 유에서 유가 나오는 것은 유통기한이 아주 짧다. 돈 놓고 돈 먹는 것은 굉장히 유용하고 효율적이지만 그건 순식간에 다 거덜나는 경우가 많다. 보이지 않는 무에서 유가 나와야 가지가 되는 거다. 원래 보이지 않는 지혜에서 물질이 나온다. 예를 들면 디지털 시대에는 보이지 않는 정보가 온갖 더 한다. 이 무형의 자산 없이는 물질만 갖고 돌려 막기를 할 수 없다. 정신적인 자산을 가지고 있을 때는 설령 망해도 그 다음에 이 실패에서 원가 배우고 도약할 수 있는 베이스를 갖게 된다. 그런 사람은 새로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알면서도 우리는 일상에서 활동이 아니라 노동을 하고, 접속을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다. 화폐를 늘려야 하기 때문에 관계가 단절된다는 말이다. 다른 것들과 접속할 시간이 없다. 그러니까 생성이 이루어지지 않고, 감각의 차이만 만들어 낸다. 차이의 생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 삶의 큰 즐거움이고 의미가 된다. 반대로 감각만이 늘어나는 게 중독이다. 이를 피하고, 하루가 재미 있으려면 다음과 같은 생활의 규칙을 만들어 보는 거다. 고미숙의 주장이지만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어제부터 노자가 <<도덕경>>에서 마지막에 한 말 겨루지 않는다는 말을 하려 다가 여기까지 왔다. 다른 사람과 경쟁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연에 순응하면서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고 살아야 한다. 인생무상(人生無常),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이니 모든 것을 비우고 낮추며 섬기면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 우리는 '아무 것도 없음(nothing-ness)'에 태어났고,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도 역시 아무 것도 없다. '도'의 형태 없음 속에 순수한 도 라 할 수 있는 것은 없는 것처럼 우리의 진정한 본질은 형태가 없다. 그러니 노자는 마지막 글에서 더 많이 내주고, 덜 따지며,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놓으라고 했다.
'아무 것도 없음(nothing-ness), 무아(無我),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I'm nothing)'가 그냥 말만으로 마음만 먹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을 3인칭으로 놓고 과거의 '자신'을 비우는 큰 도전 후에 이루어진다는 거다. "나는 모든 것이다(I'm everything)"라거나 "나는 무언 가이다(I'm something)"라고 생각하는 것은 버려야 할 과거의 '자신'이다. 나는 나다. I was everything. I was something. I am nothing, but I am who I am.
"낮 달"처럼 살고 싶다. 그러나 공부하는 마음으로 서정홍 시인의 코치에 따라 다음 3 가지를 원칙으로 삼고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살고 싶다.



낮 달/이규리
무슨 단체 모임같이 수런대는 곳에서
맨 구석 자리에 앉아 보일 듯 말 듯
몇 번 웃고 마는 사람처럼
예식장에서 주례가 벗어놓고 간
흰 면장갑이거나
그 포개진 면에 잠시 머무는
미지근한 체온 같다 할까
또는, 옷장 속
슬쩍 일별만 할 뿐 입지 않는 옷들이나
그 옷 사이 근근이 남아 있는
희미한 나프탈렌 냄새라 할까
어떻든
단체 사진 속 맨 뒷줄에서
얼굴 다 가려진 채
정수리와 어깨로만 파악되는
긴가민가한 이름이어도 좋겠다
있는가 하면 없고, 없는가 하면 있는
오래된 흰죽 같은,
보일 듯 말 듯, 미지근하고, 근근하고, 희미하고, 긴가민가하고, 있는가 하면 없고, 없는가 하면 있는 것들이 세상의 주연인지도 모른다. 언제나 주목을 끌고, 화끈해 보이고, 딱 부러지게 말하던 이들은 대개 스포트라이트가 꺼지면 보이지 않는다. 낮 달 같은 이들은 언제나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어둠이 올 때 비로소 빛을 낸다. 보이지 않는 꿋꿋한 뒷면을 지니고 있다. 이 시를 소개한 반칠환 시인의 덧붙임이다. 몇 일 전에 만난 낮 달이고 다음 사진은 그날 저녁에 만난 그 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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