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세월은 해(歲:해세)와 달(月:달월)을 의미한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11. 10. 22:09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11월 10일)

"세(歲)" 세월이란 무엇인가? 이렇게 정의한다.
▪ 흘러가는 시간. 즉, 해와 달이 뜨고 지면서, 해가 가고 달이 바뀌며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다.
▪ 지내는 형편이나 사정. 또는 그런 재미.
▪ 살아가는 세상.

세월은 해(歲:해세)와 달(月:달월)을 의미한다. 그 뜻을 사전에 찾아보면 ‘해와 달을 단위로 하여 한없이 흘러가는 시간’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렇고 보면 인생도 곧 세월과 같은 의미가 아닌가 싶다. 사람이 세월이란 배를 타고 함께 동행하기 때문이다. 즉 세월과 시간과 인생은 일맥상통하는 하나의 의미라 할 수 있다.

세월은 잠시도 머무르지 않으며, 어디론가 일정한 속도와 방향으로 계속 흐른다. 세월은 형체가 없으며 색깔도 향기도 없다. 그러하다 보니 눈에 보이지도 않으며 만질 수도 없다. 각자가 오로지 마음으로 느낄 뿐이다. 젊은 시절에는 그 느낌마저도 감지되지 않는다. 인생의 정점을 넘어서고 나서야 차츰 느끼기 시작한다. 그 정점에 다다르기 전에는 오히려 세월이 좀 더 빨리 흐르기를 갈망하기도 한다. 빨리 성장하고 성취하여 자기의 절정기에 도달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내 인생은 오늘도 세월의 돛단배를 타고 정처 없이 흐른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종착점이 어디인지는 나도 모른다. 함께하는 동반자들이 있으니 더불어 노를 저을 따름이다. 흐르는 세월을 야속하다 탓할 필요 없으며, 남은 세월이 짧을지 모른다고 불안해서도 안 된다. 그 누구도 세월을 이기는 자는 없다. 오늘에 최선을 다할 따름이다.

세월을 이야기하다 보니, "태일생수(太一生水)"라는 말이 소환된다. 이 말은 1993년에 초묘(楚墓)에서 발견된 죽간(竹簡)에 나오는 <<태일생수>>에서 나온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태일(太一)은 물을 생한다. 생(生)하여진 물은 생하는 태일(太一)을 오히려 돕는다. 그리하여 하늘을 이룬다. 하늘 또한 자기를 생한 태일(太一)을 오히려 돕는다. 그리하여 땅을 이룬다. 이 하늘과 땅이 다시 서로 도와서 신명(神明)을 이룬다. 신(神)과 명(明)이 다시 서로 도와서 음양을 이룬다. 음과 양이 다시 서로 도와서 네 계절을 이룬다. 이 네 계절(춘하추동, 春夏秋冬)이 다시 서로 도와서 차가움과 뜨거움(창열, 凔熱)을 이룬다. 차가움과 뜨거움이 다시 서로 도와서 습함과 건조함(습조, 溼燥)을 이룬다. 습함과 건조함이 다시 서로 도와서 한 해(세, 歲)를 이루고 이로써 우주의 발생이 종료된다." 여기서 "세", 세월이라는 말이 나온다.

복잡한 것 같지만, 논리 정연하다. 그 진행 순서는 다음과 같다: 태일(太一) → 수(水) → 천(天) → 지(地) → 신명(神明) → 음양(陰陽) → 사시(四時) → 창열(凔熱) → 습조(溼燥) → 세(歲)

그렇지만 생의 과정은 모든 단계에서 동시적으로 상보(相輔) 관계를 이루고 이룬다. "생(生)"의 과정은 반드시 "복상보(復相輔)"라고 하는 역의 관계를 동시에 수반한다. 이 점을 간과하면 안 된다. 흥미롭다. '"복상보"의 논리'에 따르면 내가 나의 자식을 생한다면, 나의 자식은 동시에 나를 생하여야 한다는 거다. 태일이 물을 생한다면 물은 동시에 태일의 생성을 도와 하늘을 생한다. 하늘은 동시에 태일의 생성을 도와 땅을 생한다. 하늘과 땅은 서로가 서로의 생성을 도와 가믈한 신(神)을 생하고 밝은 명을 생한다. 이렇게 전개되어 나가는 전 과정의 특징은 아무런 항목도 실체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올 김용옥 교수의 유튜브 강의에서 한 말이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본다. "태일이라는 실체가 물이라는 실체를 탄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태일과 물은 상호 교섭하는 관계일 뿐이며, 그 관계는 끊임없이 서로를 포섭하고 서로가 대자(對者)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항목, 즉 천과 지를 생성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천과 지도 실체가 아닌 교섭의 과정적 사건일 뿐이며 그것은 신명을 생성시키고, 신명은 다시 음양을 생성시키고, 음양은 다시 춘하추동을 생성시키고, 춘하추동은 다시 창열(차가움과 뜨거움)을 생성시키고, 창열은 다시 습조(습합과 건조함)를 생성시킨다. 이 모든 존재(Being)의 과정이 아닌 생성(Becoming)의 과정은 결국 무엇으로 귀결되는가? 그 귀결처를 <<태일생수>>의 저자는 '세(歲)'라고 보았다." 그러니 가는 세월을 걱정할 필요 없다. 이루어질 일은 다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의 시간은 물의 시간이다. 우리는 물과 더불어 살고 물과 더불어 투쟁한다. 물이 없어도 죽지만, 물이 너무 많아도 죽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히 해야 할 것은, <<태일생수>>의 저자가 이 세계의 가장 보편적인 현상의 기조를 "물(수)"이라고 보았지만, 그 물은 태일(태일, 도의 다른 이름)과의 관계에서 천지만물의 모든 현상을 생성시키는 비실체적 사건일 뿐, 그 나름대로 원질을 형성하는 존재의 대상이 아니라고 보았다는 점이다. 그런 데 그 물의 궁극적 귀결처가 '세(歲)'이다. 여기서 '세'라는 것은 일 년이지만, 농경사회에 있어서 일 년은 곧 영구한 시간을 의미한다. 계절로 이루어지는 세의 반복이 곧 시간이 것이다.

고로 물은 곧 시간의 창조주인 것이다. 물은 태일을 상보(相輔=反輔, 반보)하여 천지를 생성시키고, 천지는 물에 힘입어 결국 차가움과 따뜻함, 습함과 건조함의 변화를 일으키고 그 변화가 인간에게 시간으로 인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은 물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물의 한열조습이 우주와 인체와 사회의 리듬을 형성하는 것이다. 놀랍다. 그러니까 물은 모든 존재에 스며 있으며 그것은 생명의 원천이며 시간의 본 모습이다.

그 속에는 순환과 리듬이 있다. 모든 것은 자연의 지배를 받는다. 자연은 부자연스러운 인위의 행동을 그 자체의 조화의 법칙에 의하여 차단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초조해 하지 말고, 일상에서 조급증을 덜어내며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우고, 자중하며 일상을 행복하게 향유하는 거다. 하루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해 나가는 것이다.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 행복의 기준은 저마다 다르지만 모두 행복한 삶을 꿈꾼다. 그러나 학교에 입학한 순간부터 시작된 경쟁과 적자생존의 논리는 사회생활에서도 이어졌고 지금껏 우리들의 하루하루를 만들어 가고 있다. 물론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치열하게 사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경쟁을 통해 내 안에 잠자고 있던 가능성이 십분 발현되기도 하고 발전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경쟁을 통한 성취를 최우선시하는 사회에서는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누릴 여유가 허락되지 않는다.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의 국민의식을 조사한 자료를 살펴보면 행복하기 위해 거창한 무언 가가 필요한 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며 '남 보란 듯이' 살지도 않는다.  

비우고 덜어내 텅 빈 고요함에 이르면, 늘 물 흐르듯 일상이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뿐 포장하지 않으며, 순리에 따를 뿐 자기 주관이나 욕심을 고집하지 않을 것이다. 그 결과 그의 모든 행위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항상 자유롭고 여유로울 것이다. 샘이 자꾸 비워야 맑고 깨끗한 물이 샘 솟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만약 비우지 않고, 가득 채우고 있으면 그 샘은 썩어간다. 물질보다는 마음의 여유를, 전체보다는 개인의 가치를 존중한다. 남보다 빨리 갈 필요도 없다. 조금 느릴지라도 꿈을 향해 살아갈 수 있는 삶, 경쟁에 밀릴까 조급해 하지 않아도 되고 꿈을 이루기 위해 남을 밟지 않아도 되는 삶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 아닐까?

나는 순환에 주목한다. 노자의  철학이 강조하는 무위(無爲)와 허(虛)를 강조하는 핵심적 이유는 '허'가 있어야만 순환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순환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창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몸도 피의 순환에 의하여 몸이 유지되는 생명의 체계이다. 냉장고의 속도 순환의 체계이다.  사실 냉장고는 비어 있을 때만이 냉장고이다. 냉장고는 비어 있을수록 좋다.

요즈음 나의 사유를 지배하는 말이 '순환(循環)'이다. 이 순환이 이루어지지 않아 세상이 병들었다. 수렴과 발산의 순환, 욕망의 재배치 등이 답이 아닐까? 왜냐하면 존재는 소유하는 것으로 정체성이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방출하는 것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욕망을 가지고 욕망으로 무언가를 창조하면서 살아가는 게 우리의 삶인데, 우리는 욕망을 어떤 특수한 영역에 몰아넣고, 욕망을 우리 삶과 분리시킨다. 우리는 욕망과 삶의 이분법에 사로잡혀 있다. 장자는 자유를 위해 이분법을 초월하라고 한다. 그걸 알면서도, 일상에서는 그 이분법이 크게 작동한다. 고미숙은 말한다. 이 이분법을 타파해야, 우리가 욕망과 함께 욕망을 데리고 살면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을 열 수 있다고. 그러면서 고미숙은 욕망을 에로스로 표현하며, 욕망의 현장이 곧 생명과 삶의 현장, 일상의 토대라는 관점으로 문제를 풀어간다. 인간은 에로스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니까 존재 자체가 다 에로스의 총화이다. 그 에로스는 우리가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힘이다.

좀 어렵지만 '비우자'는 말이다. 아무 것도 갖지 말고, 아무 것도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에로스의 힘으로 욕망의 재배치를 하자는 거다. 수렴과 발산의 순환을 만들어 내자는 거다. 노자의 말 중에 "반자, 도지동(反者, 道之動)"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되돌아 가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라는 말이다. 반대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 그것이 도의 움직임, 즉 순환이다.

이런 순환을 생각하며 강처럼 흘러가는 게 세월이 아닐까? 조용한 주일 아침에 했던 사유들이다. 어제 미사에서 신부님이 하신 말씀이다. 축구를 잘 한다는 것은 상대 골문으로 한 방에 차 넣는 것이 아니라, 옆 선수와 패스로 주고 받거나, 또 백 패스를 하며 상대의 골문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라 했다. 산다는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 그러니 강도 "휘돌아가는 이유"라고 시인은 말한다.

강이 휘돌아가는 이유/우대식

강이 휘돌아가는 이유는
뒷모습을 오래도록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직선의 거리를 넘어
흔드는 손을 눈에 담고 결별의 힘으로
휘돌아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짧은 탄성과 함께 느릿느릿 걸어 왔거늘
노을 앞에서는 한없이 빛나다가 잦아드는
강물의 울음소리를 들어보았는가
강이 굽이굽이 휘돌아가는 이유는
굽은 곳에 생명이 깃들기 때문이다
굽이져 잠시 쉬는 곳에서
살아가는 것들이 악수를 나눈다
물에 젖은 생명들은 푸르다
푸른 피를 만들고 푸른 포도주를 만든다
강이 에둘러 굽이굽이 휘돌아가는 것은
강마을에 사는 모든 것들에 대한 깊은 감사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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