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겸손은 머리의 각도가 아니라, 마음의 각도이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11. 5. 18:26

3498.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11월 4일)

1
오늘 사진의 계수나무 낙엽은 설탕물을 끓인 것처럼 진하고 달콤한 냄새를 풍긴다.. 실제로 바닥에 떨어져 말라가는 갈색 잎 하나를 들어 올려 코끝에 대보면 기분 좋을 만큼 달콤한 향이 난다. 이 냄새의 원인은 계수나무 낙엽이 부서지면서 방출되는 '말톨(maltol)'이라는 분자 때문이라 한다. '말톨'은 설탕을 태워서 캐러멀을 만들 때 방출되는 분자이기도 하니까 '달고나'가 소환된다. 계수나무가 영어권에서는 '캐러멀 트리'로 불린다. 이파리도 동글동글한 하트 모양이다. 지인이 이 계수나무가 많은 곳이 대전 동구에 있는 <상소동산림욕장>이다.


가을에/정한모
                                                       
맑은 햇빛으로 반짝반짝 물들으며
가볍게 가을을 날으고 있는
나뭇잎,
그렇게 주고받는
우리들의 반짝이는 미소로도
이 커다란 세계를
넉넉히 떠받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 주십시오.

흔들리는 종소리의 동그라미 속에서
엄마의 치마 곁에 무릎을 꿇고
모아 쥔 아가의
작은 손아귀 안에
당신을 찾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어제 오늘이
마침낸 전설 속에 묻혀 버리는
해저(海底) 같은 그날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달에는
은도끼로 찍어 낼
계수나무가 박혀 있다는
할머니의 말씀이
영원히 아름다운 진리임을
오늘도 믿으며 살고 싶습니다. 

어렸을 적에
불같이 끓던 병석에서
한없이 밑으로만 떨어져 가던
그토록 아득한 추락과
그 속력으로
몇 번이고 까무러쳤던
그런 공포의 기억이 진리라는
이 무서운 진리로부터

우리들의 소중한 꿈을
꼭 안아 지키게 해 주십시오.

2
"역유태극, 시생양의, 양의생사상,사상생팔괘, 팔괘정길흉 길흉생대업(易有太極, 是生兩儀, 兩儀生四象, 四象生八卦, 八卦定吉凶, 吉凶生大業)" (<게상상전> 제11장) 아침에 만난 문장이다. 해석하면, "역에는 태극이 있으니, 태극이 양의를 낳고, 양의가 사상을 낳는다. 사상이 팔괘를 낳으니, 팔괘가 길흉을 정하며, 길흉이 대업을 낳는다"가 된다.

길흉을 만나야 대업을 이룬다. 주역에서는 인간의 삶을 길(吉), 흉(凶), 회(悔), 린(吝) 네 글자로 평가한다. <계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吉凶者, 言乎其失得也, 悔吝者, 言乎其小疵也(길흉자, 언호기실득야,  회린자, 언호기소자야). 해석하면, '길흉이란 그 실(失)과 득(得)에 대해 말한 것이고, 후회함[悔], 아쉬워함[吝]이란 작은 재앙을 말하는 것이다'가 된다.

길과 흉이란 바라는 것을 얻고 잃은 경우를 말하는 거고, 회와 린은 그것에 작은 하자가 있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 길: 바라는 것을 얻은 경우
▪ 흉: 얻지 못한 경우
▪ 회: 바라는 것을 얻긴 얻었는데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것으로 미련, 아쉬움 회한 등이다.
▪ 린: 바라는 것을  얻긴 했지만 그 주어진 결과가 좀 인색한 경우를 말한다.

<<역경>>은 군자가 인생의 여행길을 답파해 가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그 여행길에서 군자가 맞이한  ‘길(吉)이 141회, 흉(凶)이 57회, 회(悔)가 32회, 린(吝)은 20회’ 등장한다. 길흉만 놓고 보면, 그 비율은 대략 70대 30이다. 어쨌든 세상만사에는 길흉회린이 넘치며 우리 뜻대로 되지를 않는다. 하늘이 보기에도 사람의 인생살이는 결코 평탄하지 않은 것이다. 왜 그럴까? 하늘의 도가 운을 행하여 만물을 낳아 기르며, 하늘은 언제나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목적을 달성한다고 하는데 말이다. 오늘 아침에 만난 문장이 대답이다. 대업을 낳기 위해 길흉이 존재한다는 거다. 여기서 대업이란 만물을 낳아 기르는 것, 천지 창조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하늘이 천지 창조라는 대업을 이루기 위해 길흉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다음 그림이 오늘 만난 문장을 그린 것이다. 우주를 낳은 근원적 '일자(一者,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비롯한 근원을 지칭하는 철학 분야의 용어)'로부터 우주의 삼라만상이 펼쳐져 나간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 "역에는 태극이 있다"에서 "역"은 '세상 만물의 전개 법칙'이고, "태극"은 '커다란 궁극'이라는 뜻이다. "태극"은 우주에 넘쳐흐르는 온갖 삼라만상의 근원이 되는 궁극을 가리킨다. "태극"이 '일자'는 아니다. 역이 일단 작용을 일으키고 나서 태극이 있기 때문이다. 이 '일자'를 동아시아 철학에서는 '하늘'이라 불렀다.
▪  "태극이 양의를 낳는다"에서 "양의(兩儀)"는 음과 양의 대대(待對) 구조를 말한다. '대대'란 서로 의지하는(待), 동시에 서로 대립하는(對) 관계를 뜻하는 말로, 이는 우주의 삼라만상이 이러한 대대의 상호 분리를 통해 생겨나고 존재하게 되는 원리를 뜻한다.
▪ 태극이 음과 양을 낳은 후, 음과 양이 각각 다시 음과 양으로 분화하여 사상을 이루고, 사상이 다시 팔괘를 이룬다, 이후 팔괘를 겹쳐서 64괘에 이르면 천지 창조의 큰 틀이 일단락된다. 세상은 64괘로 표상된다.

그런데 하늘과 태극이 둥근 원 모양임에 비해, 땅 위의 만물인 64괘가 모난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특별한 의미를 띤다. 이에 대해 역경은 다음과 말한다. "方以類聚 物以群分 吉凶生矣(방이류취 물이군분 길흉생의. <계사 상전 제1장>)". 해석하면, '모난 모습에 따라 동류들끼리 모이고, 만물이 구분되니 길흉이 생겨난다'가 된다. 같은 성질을 가진 것들은 같은 종류끼리 모이고, 사람은 같은 무리끼리 모인다'는 거다.

'모난 모습에 따라 동류끼리 모인다(方以類聚, 방이유취)'는 것은 방향성이 같은 동류끼리 모인다는 말이다. 여기서 "방(모 방)"은 모가 나있다는 말로 방향성이 있다는 뜻이다. 이와 비슷한 말이 <문언전>에도 나온다. "같은 소리는 서로 응하고, 같은 기운은 서로를 구하며, 물은 습한 곳으로 흐르고, 불은 건조한 곳으로 나아간다(同聲相應 同氣相求 水流濕 火就燥, 동성상응, 동기상구, 수류습, 화추조)."  천지만물의 속성이 기본적으로 동류끼리 서로 애착하는 성질이 있다는 말이다.

결국 하늘과 태극을 떠나 천지만물이 생기고 나면, 모난 모습에 따라 동류끼리 서로 모이고 무리로 구분되며, 이후 동류끼리 t로 애착하고 미워하는 경향이 생기니 결국 길흉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 그래야만 하는지 의문이 남는다. 왜 완전무결한 하늘이 창조한 이 세상에 길흉 같은 것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다른 각도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넘긴다.

3
겸손은 머리의 각도가 아니라, 마음의 각도이다. 이 마음의 각도는 하늘과 땅, 귀신 그리고 사람들이 돕니다. 어떻게? 그걸 잘 말해주는 것이 <<주역>>의 제15괘인 <지산 겸괘>에 나온다. 이 괘의 <단전>을 공유한다. "彖曰(단왈) 謙亨(겸형)은 天道(천도) 下濟而光明(하제이광명)하고 地道(지도) 卑而上行(비이상행)이라. 天道(천도)는 虧盈而益謙(휴영이익겸)하고 地道(지도)는 變盈而流謙(변영이유겸)하고, 鬼神(귀신)은 害盈而福謙(해영이복겸)하고 人道(인도)는 惡盈而好謙(오영이호겸)하나니, 謙(겸)은 尊而光(존이광)하고 卑而不可踰(비이불가유)니 君子之終也(군자지종야)라" 이다. 번역하면, '단전에 말하였다. 겸이 형통함(謙亨)은 하늘의 도가 아래로 내려서 광명하고, 땅의 도는 낮은 데서 위로 행한다. 하늘의 도는 가득한 것을 이지러지게 하며 겸손한 데에는 더하고, 땅의 도는 가득한 것을 변하게 하며 겸손한 데로 흐르게 하고, 귀신은 가득한 것을 해롭게 하며 겸손함에는 복을 주며, 사람의 도는 가득한 것을 미워하며 겸손한 것을 좋아하니, 겸(謙)은 높고 빛나고 낮아도 가히 넘지 못하니 군자의 마침이다. 마지막 문장이 잘 이해가 안 된다. 그래 이렇게 읽으려 한다. 겸손은 높은 사람이라면 빛나게 하고, 낮은 사람이라면 함부로 무시하지 못하게 하니, 군자를 완성하는 덕목이다.

겸손 하려면, 높은 하늘에서 아래로 내려와 비추어야 하고, 아래에 있는 땅은 위로 행동하여야 한다. 그러면 
▪ 하늘은 가득한 것을 흐트러지게 하여 겸손에 이익을 주며 보태준다(천도휴영익겸, 천도휴영익겸).
▪ 땅은 가득한 것을 변화가 일어나게 해서 겸손한 데로 흐르게 한다(지도변영이유겸, 지도변형유겸)
▪ 사람은 가득한 것을 미워하며 겸손한 것을 좋아하게 한다(인도오영이호겸, 인도오영이호겸).
▪ 귀신도 가득한 것을 해롭게 하며 겸손함에 복을 내려준다(귀신해영이복겸, 귀신해영이복겸).        

4
삶의 불확실성과 두려움 속에서 길을 잃은 인간에게 인문학이 어떻게 나침반이 될 수 있는가?
인문학을 통해 시선을 두어야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분야이다.
▪ 내면의 힘을 어떻게 키우는가? 성찰의 시간을 배운다. 
▪ 타인과의 관계를 어떻게 하는가? 공감과 존중, 이해의 태도를 배운다. 
▪ 사회와 세계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하는가? 비판적 상상력과 사실 인식, 세상을 읽는 힘을 배운다. 
인문학은 고루한 학문이 아니라, ‘삶을 현명하게 살아내는 기술’로 이어져야 한다. 인문학은 답이 아니라 방향이며, 해답이 아니라 태도다. 여기서 인문 운동가의 역할은 인문학을 통한 인문 정신을 회복하고 확장하자고 제안하는 사람이다. 함께 거창한 해답이 아니라, 앞길을 비추는 등불 하나를 찾아 보자고 하는 거다.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자신만의 등불을 찾아가는 여정을 권유한다. 인문학은 먼 학문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5
오늘은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이다. 그리고 오늘의 말씀은 <루카 14,15-24> '혼인 잔치의 비유' 이다. "그때에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던 이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그분께,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였다. 그리고 잔치 시간이 되자 종을 보내어 초대받은 이들에게, ‘이제 준비가 되었으니 오십시오.’ 하고 전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양해를 구하기 시작하였다. 첫째 사람은 ‘내가 밭을 샀는데 나가서 그것을 보아야 하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고 그에게 말하였다. 다른 사람은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 보려고 가는 길이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였다. 또 다른 사람은 ‘나는 방금 장가를 들었소. 그러니 갈 수가 없다오.’ 하였다.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알렸다. 그러자 집주인이 노하여 종에게 일렀다. ‘어서 고을의 한길과 골목으로 나가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 저는 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얼마 뒤에 종이, ‘주인님, 분부하신 대로 하였습니다만 아직도 자리가 남았습니다.’ 하자, 주인이 다시 종에게 일렀다.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아무도 내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잔치>/상지종 신부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였다.”(루카 14,16)

나를 위한 잔치는
이미 지금여기에
더불어 함께하기에
내가 잔치입니다

바라기만 하던 내가
더불어 함께하기에
아낌없이 줍니다

모자란 내가
더불어 함께하기에
차고 넘칩니다

아픈 내가
더불어 함께하기에
말끔히 낫습니다

버려진 내가
더불어 함께하기에
곱게 받아들여집니다

가진 것 없는 내가
더불어 함께하기에
벗들을 가집니다

홀로 아무 것도 아닌 내가
더불어 함께하기에
모든 것이 됩니다

나만 보던 내가
더불어 함께하기에
너를 봅니다

너를 필요로 하던 내가
더불어 함께하기에
나를 찾습니다

나를 위한 잔치는
이미 지금여기에
더불어 함께하기에
내가 잔치입니다


부족하더라도, 우리가 더불어 함께'하면 사는 맛을 즐길 수 있다. '사랑은 식탁을 타고 온다'는 말이 소환된다. 식탁은 배를 채워주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사랑을 나누는 장소이기도 하다. 특히 함께 하는 식사는 그래 중요하다. 

식사법/김경미

콩나물처럼 끝까지 익힌 마음일 것
쌀알 빛 고요 한 톨도 흘리지 말 것
인내 속 아무 설탕의 경지 없어도 묵묵히 다 먹을 것
고통, 식빵처럼 가장자리 떼어버리지 말 것
성실의 딱 한 가지 반찬만일 것

새삼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닌지
제명에나 못 죽는 건 아닌지
두려움과 후회의 돌들이 우두둑 깨물리곤 해도
그깟 것 마저 다 낭비해 버리 고픈 멸치 똥 같은 날들이어도
야채처럼 유순한 눈빛을 보다 많이 섭취할 것
생의 규칙적인 좌절에도 생선처럼 미끈하게 빠져나와
한 벌의 수저처럼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할 것

한 모금 식후 물처럼 또 한 번의 삶을
잘 넘길 것 

 

"밥 먹을 때는 말 하는 게 아니다."  "음식 넘기는 소리도 내지 마라." 어릴 때 받았던 밥상머리 교육이었다. 그때는 열 명이나 되는 식구가 한 방에서 식사하는 데도 수저 딸그락거리는 소리 외에는 조용했다. 선조들은 밥 먹는 걸 그만큼 엄숙하고 진지하게 여겼던 건 같다. 일상을 통해 도를 실천하는 선비 정신의 흔적이었는지도 모른다. 맛있다고 요란하지도 않았고, 맛없다고 투덜대지도 않았다. 그러나 세상은 변했고, 이제는 TV 음식점 소개 프로그램에서 보듯 식도락을 넘어 식탐의 지경으로까지 되었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게걸스레 먹는 모습을 보면 채널을 돌려버린다. 식사법을 보면 삶의 양식을 알 수 있다. 우리 시대의 먹는 모습이 우리가 어떤 시대에 사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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