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우리가 자연에서 가장 신경 쓰지 않는 부분이 하늘이다.

3497.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11월 3일)
1
어제는 오랜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동네 탄동천을 오래 산책했다. 딸도 동반했었다. '구름 수집가'로 활동하는 남자가 건물 옥상에서 여자에게 구름을 설명한다. “서쪽에 있는 건 탑상운, 남쪽에 있는 건 권적운”이라고 말하면서 남자는 “권적운은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구름”이라고 설명한다. 여자는 매일 보는 구름에 이렇게 많은 이름이 있는 줄 몰랐다고 말하다가 “아름다운 걸 볼 줄 아는 사람이었네요”라며 감탄한다. 남자의 대답은 “그러니까 당신의 아름다움도 알아본 거죠”라는 고백이었다. 드라마 <겨우 서른>에서 이 장면을 보던 날, 개빈 프레터피니의 책 <<날마다 구름 한 점>>이 떠올랐다. 전 세계 구름 추적자들이 수집한 365장의 구름 사진으로 이루어진 책이었다. 이 책을 읽은 후 나는 매일 구름 사진을 찍었고, 에드워드 호퍼가 자주 그렸던 구름이 ‘상층운’이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존 러스킨(John Ruskin)은 <<근대 화가론>>에서 일반인들이 하늘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는 걸 안타까워하며 “하늘이야말로 자연이 인간을 기쁘게 하고, 인간과 대화하기 위한 자명한 목적으로 신이 가장 신경 써서 창조한 부분”이라고 말하였다 한다. 소설가 백영옥의 글에서 읽은 것이다.
사실 우리가 자연에서 가장 신경 쓰지 않는 부분이 하늘이다. 돼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볼 수 없는 동물이다. 평생 눈앞의 먹이를 위해 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은 땅이라는 ‘일상’에서 벗어나 하늘이라는 ‘이상’을 마주하는 시간은 필요하다.
우리는 천명(天命)을 받고 태어난다. 쉽게 말하면, 하늘이 나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한다. 하늘은 언제나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자신의 목적을 이룬다. 하늘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만큼의 운을 부여했다. 그러므로 사람인 우리에게 부여된 운은 이미 충분히 강하다. 이미 충분하다.
<<중용>>의 머릿장에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요,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요,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니라”고 되어 있는데, '하늘이 우리에게 명해준 것이 우리들의 성품'이므로 곧 "천명지위성"이고, '하늘에서 명을 받아 타고난 성품'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길(道)'이므로 곧 "솔성지위도"이고, '그 성품을 따르는 도를 잘 닦아 나가 마름질하는 것이 공부'이므로 곧 "수도지위교"이다. 다시 말하면, 도를 잘 닦아 나가는 것, 즉 마름질하는 것이 하나의 교육적인 가르침(敎)이 되는 것이다. 성(性), 도(道), 교(敎)로 시작하는 <<중용>>의 첫 문장을 외우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가을이 깊어지고 낙엽이 뒹굴기 시작한다. "가을 편지"를 쓰고 싶다.
가을편지/이성선
잎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원고지처럼 하늘이
한 칸씩 비워가고 있습니다.
그 빈 곳에 맑은 영혼의 잉크 물로
편지를 써서 당신에게 보냅니다.
사랑함으로 오히려
아무런 말 못하고 돌려보낸 어제
다시 이르려 해도
그르칠까 차마 또 말 못한 오늘
가슴에 고인 말을
이 깊은 시간
한 칸씩 비어가는 하늘 백지에 적어
당신에게 전해 달라
나무에게 줍니다.
2
<<주역>> 에서 하늘의 도를 이렇게 말한다. "천도운행 생육만물(天道運行, 生育萬物)". 이 말은 '하늘의 도가 운을 행하여 만물을 낳아 기른다'는 것이다.
'운(運)'의 어원은 '군대가 가는 것'이다. 군대가 군사 작전에 따라 이동할 때는 약속된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 도달하는 것이 절대적인 사명이다. 운은 이처럼 예정된 시간에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의미를 글자에 담고 있다. '운(運)'이 들어간 단어들을 보면, 해운업, 운수업, 운행 등이 있다. 예정된 시간에 목적지에 도달하도록 움직이는 것이다.
운이 좋은 경우는 목적을 예정대로 달성한 경우이다. 그러니까 '운'을 정의하면, 목적을 예정대로 달성하는 힘을 말한다. 그래 '운이 좋다, 나쁘다'보다는 '운이 강하다, 약하다'라는 표현이 보다 부합하다.
이 세상의 만물은 '기립지물(氣立之物)'과 '신기지물(神機之物)' 둘로 나뉜다. '기립지물'은 바위나 나무처럼 '기운에 의해 그저 서 있는 존재'를 말하고, '신기지물'은 곰과 사람처럼 '정신이 기틀(몸) 속에 들어선 존재'를 말한다.
'운이 강하다'는 것은 외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예정된 목적을 그대로 수행할 수 있다는 거다. 자신에 예정된 목적을 계속 수행할 수 있다. 운이라는 이루고자 하는 일을 예정대로 달성해 내는 힘이다. 그러니 운이 강하다는 것은 그럼 힘이 세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좋기만 한 것은 없다. 좋은 것에는 대가가 따르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신기지물'인 사람은 기껏 100년을 사는데, 기립지물인 나무는 1000년을 산다. 그 이유는 나무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곰과 사람은 굴러오는 바윗돌을 피할 수 있지만, 대신 언제나 긴장하고 있다. 바윗돌처럼 사방에서 자신을 위협할지 모르는 존재를 경계하느라 스트레스를 받는다. 하지만 나무는 이런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이루고자 하는 일을 예정대로 달성해 내는 강한 운을 부여 받은 사람은 그만큼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한다. 운이 강할수록 일찍 죽는 이유가 아닐까?
지금보다도 운이 좋아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그 대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운이 지금보다 더 강해지고자 하면, 더 큰 스트레스를 받아야 한다. 운의 비용이고 대가이다. 그래 잘 살려면 '나무처럼' 좀 단순하게 살아야 한다. "안분지족'하는 거다. 이 말은 '편안한 마음으로 제 분수(分數)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앎'이란 뜻이다. 자기 분수에 맞게 무리하지 않고 만족하면서 편안히 지낸다는 거다.
나의 만트라로 늘 외우는 문장은 '자신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만족을 알자' 이다. 도덕적 윤리적으로 인격이 높은 덕망 있는 사람은 스스로의 잣대로 오만(傲慢)에 빠지거나 자만(自慢)하지 않고, 크고 작은 일을 나 보다는 남을 먼저 배려하는 삶의 아름다운 향기가 풍긴다. 이렇듯 편안한 마음으로 자기 분수를 지키며 욕심을 버리고 만족할 줄 아는 삶이야 말로 '멋진' 삶이 아닐까?
‘안분지족’은 노자 <<도덕경>> 제44장의 다음 문장을 소환한다. "知足不辱(지족불욕) 知止不殆(지지불태) 可以長久(가이장구)" 이 말은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치욕을 당하지 않고, 적당할 때 그칠 줄 아는 사람은 위태로움을 당하지 않으니 오래오래 삶을 누리게 된다'이다. 사람들이 많이 좋아하는 구절이다.
만족(足)을 알고 그치는(知) 것이 내 몸을 살리고, 내 정신을 행복하게 하는 최고의 해답이다. 이 구절을 가지고 노자의 철학이 소극적이고 허무적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 문장의 주체는 성공한 귀족이거나 권력자이다. 이미 성공이라는 문턱에 다다른 사람에게 하는 경고이다. 자신의 성공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가지려 하고, 더 큰 탐욕을 보일 때 벌어지는 참사에 대한 경고이다.
이 세상에 좋기만 한 것은 없고, 좋은 것에는 대가가 따른다. 그러니까 1000년을 넘게 사는 나무 같은 '기립지물'은 천년의 삶이지만 무정한 삶이다. '신기지물'인 사람은 스트레스에 시달리지만 대신 유정한 삶을 산다. 기껏 100년을 살지만 대신 진하게 사는 것이다. 하루를 살아도 사람으로 사는 것은 커다란 축복일 수도 있다. 뭐가 옳은지는 모르겠다.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면, 유정한 사람, 섬세한 사람일수록 더욱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대신 더욱 진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그건 선택의 문제이다.
이런 강한 사람의 운보다 더 강한 운을 지닌 것이 사람을 낳은 대우주, 곧 하늘의 운이다. 하늘은 운을 행해서 만물을 낳아 기르고 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면 한 치의 어긋남도 없다. 운이란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예정대로 달성하는 힘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하늘은 '만물을 낳아 기른다'는 목적을 언제나 예정대로 달성하고 있는 것이다.
3
<<논어>> <양화편> 제19장을 소환한다.
子曰: “予欲無言.”
子貢曰: “子如不言, 則小子何述焉?”
子曰: “天何言哉? 四時行焉, 百物生焉, 天何言哉?”
(자왈: “여욕무언.”
자공왈: “자여불언, 칙소자하술언?”
자왈: “천하언재? 사시행언, 백물생언, 천하언재?”)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자공이 말하였다. "선생께서 말씀하지 않으시면 저희들은 어떻게 도를 전하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하늘이 무슨 말을 하시는가? 그런데도 사계절을 운행하고 만물을 낳건만,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
하늘은 언제나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때를 맞추어 사계절을 운행하고 만물을 낳고 있다. 만물을 낳아 기르려는 목적을 언제나 예정대로 달성하고 있다.
이어지는 글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4
그래 나는 내 호를 "배천(配天)"으로 으로 하고 싶다. 나는 하늘과 짝을 이루고 싶기 때문이다. 노자 <<도덕경>>에서 얻은 거다.
"훌륭한 무사는 힘을 드러내지 않고, 잘 싸우는 사람은 성난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며, 잘 이기는 사람은 함부로 다투지 않고, 남을 잘 부리는 사람은 늘 남에게 겸손하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善爲士者不武(선위사자불무) 善戰者不怒(선전자불노) 善勝敵者不與(선승적자불여): 군대 통솔을 잘 하는 자는 무력을 쓰지 않는다. 싸움을 잘하는 자는 노여움을 드러내지 않는다. 적을 잘 이기는 자는 대적하여 맞붙지 않는다.
善用人者爲之下(선용인자위지하) 是謂不爭之德(시위부쟁지덕) 是謂用人之力(시위용인지력) 是謂配天古之極(시위배천고지극): 사람을 잘 쓰는 사람은 스스로를 낮춘다. 이를 일러 다투지 않는 부쟁의 미덕이라 하고, 용인의 힘이라 하고, 하늘에 짝한다 한다. 이것은 모두 예로부터 내려오는 무위의 준칙(지극한 경지)이다.
나는 이것을 노자의 '고수 이론'이라고 부른다. 노자가 말하는 "고수 이론'에 따르면, 백 번 싸워서 백 번 이긴다 한들, 내 병사가 많이 죽고, 상대방의 감점에 상처를 내고 이겼다면 그 승리는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이다. 노자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고도의 전략을 나열하여 부쟁(不爭)의 탁월함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노자는 이런 싸우지 않고 이기는 위대한 능력을 "부쟁지덕(不爭之德)"이라고 정의하였다. 이것이 하늘의 도와 가장 부합(配天)하는 방법이며, 옛날 태평 시대에 사용했던 정치 방법(極)이었다는 거다.
▪ 불무(不武): 최고의 전사는 무용(武勇)을 과시하지 않는다. 겉으로 보기에는 허술하고 나약해 보이기도 하다. 그러나 전투가 벌어지면 단칼에 상대방을 제압한다. 겉으로 강하다고 으스대는 사람 치고 잘 싸우는 고수는 없다. 장자의 "목계(木鷄)"가 생각난다.
▪ 불노(不怒): 잘 싸우는 군대는 분노(忿怒)하지 않는다. 분노는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함부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서 무모한 공격을 하거나, 상대방의 전략에 말려들면 결국 패배의 결과밖에 없다.
▪ 불여(不與) 또는 부쟁(不爭): 싸움을 잘 이기는 사람은 직접적인 싸움을 하지 않는다. 전략을 잘 세워 쉽게 승리를 얻어낸다. 직접적인 충돌은 결국 후유증이 남는다.
▪ 위하(爲下): 사람을 잘 부리는 사람은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높인다. 상대방을 존중하여 나를 위해 전력을 다하게 한다. 진정 용인(用人)의 고수이다.
위의 네 가지는 우리들의 일상에 적용 가능한 삶의 지혜이기도 하다. 예컨대, 사람을 쓸 때도 자기 낮춤을 실현해야 한다. 직장에서 동료나 부하 직원에게 자기의 능력이나 재능을 과시하고 그들을 압도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특히 직장의 상사는 오로지 부하를 지휘 감독하기 위함이라 기보다는 그들이 일을 더 잘 하도록 밑에서 떠 바치고 뒤에서 밀어 주기 위한 사람, 그들을 섬기기 위한 사람이라는 마음가짐으로 밑에 있는 사람을 대해야 한다는 거다. 이렇게 자기를 낮추면 저절로 사람이 그에게 모이고 자신은 자연이 그들의 으뜸이 된다는 거다. 그리고 위 네 가지는 '겨루지 않음의 덕(겸양지덕)', '사람 씀의 힘(용인지력), '하늘과 짝함(배천)'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 "배천"은 앞에서 살펴 본 원리들은 하늘의 법칙과 짝을 이루는 것으로서 옛날 태평 시대에 사용했던 정치 방법(極)이었다는 거다.
5
오늘이 말씀은 <루카 14,12-14>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여라' 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초대한 바리사이들의 한 지도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참된 만남>/상지종 신부님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루카 14,13)
당신의 것을
내려놓고
몸과 마음
가벼이
당신만
오세요
나를
만나러
당신을
만나러
나만
갈게요
몸과 마음
가벼이
나의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은 왜 착한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는지 명료하게 설명하였다. 우리가 생각하는 종교의 교리 이야기는 없다. 평상시 종교 시설에 꼬박꼬박 다녔다든가, 헌금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특정 종교를 믿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없다. 그들이 구원 받은 유일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내가 배고팠을 때, 너는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내가 목 말랐을 때, 너는 나에게 마실 물을 주었다. 내가 낯선 자였을 때, 나를 집으로 초대하였다. 내가 입을 옷이 필요할 때, 내가 입을 옷을 주었다. 내가 병들었을 때, 나를 돌봐 주었다. 내가 교도소에 있을 때, 나를 면회 와 주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묻는다. “우리가 언제 굶주린 당신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 마른 당신에게 마실 것을 주었습니까? 우리가 언제 낯선 자 된 당신을 보고 집으로 초대하였고, 헐벗은 당신에게 옷을 입혀주었습니까? 우리가 언제 당신이 병들거나 감옥에 감금되어 있을 것을 보고, 당신을 방문했습니까?” 그들은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도 자신들이 왜 구원을 받았는지 알지 못한다. 구원은 은총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종교, 그 종교를 설명하려는 교리, 그리고 교리를 정기적으로 가르치기 위한 공간, 그 공간에서 배운 예수님의 모습만이 예수님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허상인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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