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길이 아니라, 의미 있는 길을 선택하라.
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1년 10월 17일)
오늘 아침도 지난 금요일에 이어, 조던 B. 피터슨의 <<12가지 인생의 법칙(12 rules for life)>> 중 일곱 번째 rule(규칙)인 "쉬운 길이 아니라, 의미 있는 길을 선택하라"는 이야기를 이어간다.
인간은 자의식을 가진 유일한 존재이다. 자의식 덕분에 인간은 스스로 나약하고 무능력한 존재라는 것 그리고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비극적 존재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런 자의식이 필연적 고통을 야기한다. 그 고통으로 인해, 우리는 이기적이고 즉각적인 만족을 중요시하는 생각, 즉 편의주의에 빠져든다. 생각 없이 살다 보면, 이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그러면서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사회와 자연의 무자비한 횡포가 삶을 고통스러운 비극으로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회와 자연은 사실 고통의 유일한 원인이 아니다. 심지어 주된 원인도 아니다.
불확실함이 가득한 세상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들의 비인간적인 행위가 훨씬 더 심각한 문제이다. 단지 가난과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동하고 희생하여 현재의 만족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악을 극복해야 하는 과제와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하지만, 아담과 하와가 눈을 뜬 대가로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후 그들의 후손, 즉 우리의 삶이 더 가혹해 졌다. 괴테는 이 가혹한 우리들의 운명을 '인간의 창의력 그리고 끝나지 않는 노역'이라고 표현했다. 인간은 자신이 죽음과 질병을 피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기를 지키기 위해 일을 한다.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알고 있다면 그것에 대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미래를 애써 부정하며 두려움에 빠져 살아야 한다. 따라서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오늘의 쾌락을 우리는 희생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담과 하와가 눈을 떴을 때 깨달은 것은 죽음과 노동의 필연성만이 아니었다. 축복이었는지, 저주였는지 모르지만, 선과 악을 구분하게 되었다. 나도 이걸 이제야 이해하기 시작했다.
선과 악을 구분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절차로 이루어진다.
(1) 우리 자신이 죽어야 하고, 나약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모든 인간이 죽고 나약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2) 두려움과 분노, 원망과 원한이 무엇인지 알고, 고통의 의미를 이해한다. 그런 감정이 내 안에서 어떻게 생기는지를 깨우치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감정을 느끼도록 할 수 있다. 즉 자의식이 있어서 다른 사람을 의도적으로 교묘하게 괴롭힐 수 있게 된 것이다.
악은 자의식과 함께 세상에 들어온다. 하느님이 아담에게 내린 노력이라는 저주는 그것 만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처벌이었다. 하와에게 내린 분만의 고통과 남편에게 의존하는 삶이라는 저주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누구도 질병과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은 온갖 비극을 참고 견딜 만큼 충분히 강하다. 인간은 지진과 홍수, 가난과 암 등 어떤 시련도 감당할 만큼 충분히 강하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시련과는 다른 고통이 있다. 바로 인간의 악함이 만들어 내는 고통이다. 인간이 의도적으로 악한 짓을 하면, 어떤 역경에도 흔들리지 않던 정신을 무너뜨릴 수 있다. 이 악함을 프랑스어로는 '라 메쎵스떼(la méchanceté, 악의성)'라 한다. 실제로 나는 그런 사람을 만난 적 있다. 사악한 행위는 강인한 사람에게도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길 수 있다.
왜 그럴까? 피터슨은 단지 삶이 힘들고 가혹해서 사악함이 드러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는 희생과 노력이 계속 거부당하면 뒤틀리고 일그러져 진짜 괴물처럼 변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그러면 의도적으로 사악한 짓을 저지르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고통과 아픔을 주기 위해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무엇을 어떻게 희생 하느냐 고민하는 이유는 삶의 고통 뿐만 아니라 사악 함까지 줄이기 위해서이다. 그것을 잘 보여준 인물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기 전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나가 "마귀에게 시험을 받았다."(마태복음 제4장 1잘) 그리스도가 사막에 머문 시기는 영혼이 어두운 밤처럼 삭막한 때였다. 인간이면 누구나 그런 시기를 지날 때가 있다. 모든 것이 허물어지고 주위에 아무도 남지 않았을 때, 절망과 체념에 사로잡혀 허무주의 늪에 빠졌을 때, 우리는 인생의 어두운 밤을 맞이한다. 광야에서 40일 밤낮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홀로 지낸다면 제정신을 유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 되면, 객관적인 세계와 주관적인 세계가 한꺼번에 무너져 내린다.
예수가 광야에서 보낸 40일은 상징적인 기간이다. 40일 혹은 40년은 <<성서>>에서 중요한 변화나 정화, 회개와 관련된 사건이 벌어지는 기간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파라오의 폭정을 피해 이집트를 탈출한 뒤 40년간 사막을 떠돌았다. 그 기간에 모세는 십계명을 받기 위해 40일 동안 시나이산에서 보냈다. 그리고 그 40일 동안 백성들은 하느님을 배신하고 황금 송아지를 숭배하며 어리석은 짓을 일삼았다. 모세가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한 기간도 40일이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물바다로 만든 대홍수가 지속된 기간도 40일이었다. 40일은 인간이나 세상이 그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바뀔 수 있는 기간이다.
코로나-19 세상은 사회적(나는 물리적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거리두기, 즉 격리를 요구하고 있다. '격리' 또는 '검역(檢疫)'이라는 뜻의 영어가 'quarantine(쿼런틴)'이다. 이는 40일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흑사병 당시 40일간의 격리를 뜻하는 이탈리아 베니스(베네또 주)의 방언 'quarantena'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참고로 음악에서 사중주를 'quartet(쿼텟, 프랑스어 카르르떼)'라고 부르는 것처럼, 숫자 4와 관련이 있다. 프랑스어로 4를 'quatre(끼트르)'라 한다. 그리고 40일을 '까렁뜨(quarante)'라 한다.
흑사병이 창궐하던 14세기 유럽의 항구에서는 모든 선박과 선원이 지정된 섬에서 40일간을 격리한 후에 입항을 허용했다. 당시에도 거리두기는 전염병 대응의 기본이었다. 이 같은 조치에도 유럽은 당시 인구의 30%를 잃었다. 700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 방역의 1차 원칙은 격리와 거리두기다. 이 길이 검역의 길이다. 아직 전적으로 강제격리에 의존하고 있는 것은 유감이다.
프랑스어로 quarantaine(까랑뗀느)는 일상 속에서는 '40대'라는 말이지만, '검역', 즉 전염병이 돌고 있는 지역으로부터 오는 사람, 선박, 화물 따위를 검역당국이 일정 기간 격리시키는 것을 말한다. 지금 우리가 하는 '2주 격리 기간'에 해당된다. 즉 14일인데, 옛날에는 40일 동안 격리시켰다. 왜 40일이었을까?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 40일은 예수가 자신의 삶을 탈주(脫走)시킨, 또는 이주(移住) 시킨 40일의 사막에서의 금식 기간이다. 예수는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후 40일 동안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에 시달려야 했다. 기독교에서 이 유혹을 물리치는 것을 기리는 시기가 '사순절(四旬節, Passion)'이다. 각 달을 우리는 초순, 중순, 하순으로 나누는데, 여기서 말하는 '순'이 '열흘'이다.
탈주와 이주는 한글로만 보면, 비슷한 의미로 보이지만. 탈주는 삶이라는 여정, 특히 익숙함과 결별하여 자신을 불편하고 취약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이주는 말 그대로 다른 지역에서 살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탈주이든, 이주이든, 반드시 필요한 것이 회개(悔改)이후에 벌어진다는 점이다. "회개는 자신의 잘못을 사제에게 말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삶에 대한 시선을 바꾸는 행위이다. 회개는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단호한 결심이자 고백이며, 그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는 수련이자 용기이다." 나는 배철현 교수가 내린 화개에 대한 정의를 좋아한다. 회개를 사전은 간단하게 '잘못을 뉘우치고 고침'이라 했다. 그러나 나는 이제까지 나의 잘못을 뉘치기는 했으나, 고치는 일에는 소홀했다.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는 수련도 없었고, 그럴 용기도 부족했다. 그런데 아침 마다 <인문 일기> 쓰면서 부터 달라졌다. 결심을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이유를 찾은 것이다.
또 글이 길어진다. 오늘의 시를 한 편 읽고, 이야기를 계속 이어간다. 오늘 아침 사진처럼, 하늘이 높아진 이 "가을에" "우리들의 소중한 꿈을/꼭 안아 지키게 해 주십시오"라는 마음으로 아침 산책 길에 기도를 한다.
가을에/정한모
맑은 햇빛으로 반짝반짝 물들으며
가볍게 가을을 날으고 있는
나뭇잎,
그렇게 주고받는
우리들의 반짝이는 미소로도
이 커다란 세계를
넉넉히 떠받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 주십시오.
흔들리는 종소리의 동그라미 속에서
엄마의 치마 곁에 무릎을 꿇고
모아 쥔 아가의
작은 손아귀 안에
당신을 찾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어제 오늘이
마침낸 전설 속에 묻혀 버리는
해저(海底) 같은 그날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달에는
은도끼로 찍어 낼
계수나무가 박혀 있다는
할머니의 말씀이
영원히 아름다운 진리임을
오늘도 믿으며 살고 싶습니다.
어렸을 적에
불같이 끓던 병석에서
한없이 밑으로만 떨어져 가던
그토록 아득한 추락과
그 속력으로
몇 번이고 까무러쳤던
그런 공포의 기억이 진리라는
이 무서운 진리로부터
우리들의 소중한 꿈을
꼭 안아 지키게 해 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가 40일동안 보낸 사막에서, 그는 사탄을 만난다. 여기서 사탄은 희생의 거부를 상징한다. 교만, 기만, 의식적인 악의의 화신이자, 인간과 하느님, 삶에 대한 증오로 가득한 존재이다. 사탄은 악이 무엇인지 잘 안다. 악한 것을 알면서 더 악하게 행동한다. 파괴적 욕망에 사로잡혀 의도적이고 계획적으로 사악한 행위를 저지른다. 악의 원형 사탄은 선의 원형 그리스도를 유혹하고 파괴하려 한다. 그러나 <마태복음> 제4장 1-14절과 <누가복음> 제4장 1-13절에서 그리스도는 인간 본성의 약점을 파고드는 유혹에 기꺼이 맞서는 존재이며, 자신의 내면과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두려움 없이 맞서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
사탄의 첫 번째 유혹은 40일 동안 굶주린 그리스도에게 돌을 빵으로 바꿔 허기를 달래라는 것이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 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성서에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니까 극도로 굶주린 상황에서도 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뜻이다. 정신이 황폐한데 배를 채우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는 안타깝고 비참한 배부름이다. 그리스도는 오히려 굶주림을 영원히 해결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하느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마음을 다해 일하고 희생하고 공유할 것을 요구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르면 이 땅에서 궁핍을 몰아내는 게 가능해진다. 이것이야말로 굶주림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식이라는 거다. 그러나 우리가 편의주의를 버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으라는 말이다.
복음서에는 빵과 삶에 대한 여러 사건이 나온다. 어떤 사건에서나 그리스도는 생명을 지켜 주는 음식을 끝없이 제공해 주는 존재로 묘사된다. 물이 포도주가 되고, 수많은 사람이 적은 양의 빵과 물고기로 배불리 먹는 기적을 일으킨다. 이 기적은 고결한 의미를 추구하는 삶이 가장 실리적인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를 말로만 믿는 게 아니라, 그리스처럼 살면 나와 주변 사람들이 굶주리지 않을 것이라는 교훈을 보여주는 거다. 올바른 사람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세계가 찾아온다. 따라서 올바른 삶이 빵이나 돈보다 낫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첫 번째 유혹을 이겼다. 하지만 아직 두 종류의 유혹이 남아 있다. 이 두 유혹 이야기는 내일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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