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침착은 가을을 맞이하는 마음을 준비하면 된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10. 14. 17:54

3461.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9월 28일)

1
한강 작가는 20대에 일기장을 바꿀 때마다 맨 앞페이지에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고 적었다고 한다. 그러나 <<소년이 온다>>를 준비하던 중 1980년 5월 마지막까지 전남도청에 남아 있었던 야학 교사 박용준의 일기를 보고 질문을 뒤집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었다는 거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그러면서 “이후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실제로 과거가 현재를 돕고 있다고, 죽은 자들이 산 자를 구하고 있다고 느낀 순간들이 있었다”고 전했다. “이따금 그 묘지에 다시 찾아갔는데, 이상하게도 갈 때마다 날이 맑았다. 눈을 감으면 태양의 주황빛이 눈꺼풀 안쪽에 가득 찼다. 그것이 생명의 빛이라고 나는 느꼈다. 말할 수 없이 따스한 빛과 공기가 내 몸을 에워싸고 있다고.”

어제 초가을의 맑은 날씨였지만, 아직 까지 떠나지 못한 여름 더위가 남아있는 어제 '벌초'를 하고 왔다. 형님과 동생은 올해가 마지막이라 했다. 할아버지 산소 옆까지 카페가 밀고 들어왔다.

벌초(伐草)는 한식(寒食)이나 추석 성묘 이전에 조상의 묘에 자란 풀이나 나무를 베어 깨끗이 하는 일로 대개 백중(百中) 이후부터 추석 전에 벌초를 마친다. 처서(處暑)가 지나면 풀들이 대부분 성장을 멈추고 더 자라지 않기 때문에 이 무렵에 벌초를 해야 비교적 오랫동안 깨끗하게 묘를 보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추석까지 벌초를 하지 않는 산소를 보면 동네 어르신들이 후손들에게 욕을 하게 된다. 처서(處暑)가 되면 모기 입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들판의 벌레들도 임무 교대를 한다. 매미 소리가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며 대신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벌초'는 무덤의 풀을 깎아 깨끗이 한다는 뜻으로, 정벌(征伐)에 나선 병사가 창을 든 사람 모습이다. '벌(伐)'자는 전쟁에서 적군을 베듯 과감하게 풀을 벤다는 뜻이라 했다. 그리고 '금초(禁草)'라는 말도 하는데, '금화벌초(禁火伐草)'의 준말로서, '무덤에 불이 붙지 않게 가연성 풀을 제거하고, 때 맞추어 풀을 베어 잔디를 잘 가꾼다'는 뜻을 나타내는 말이라 했다. 그리고 그 때 사용하는 기계를 예초기라 하는데, '예초(刈草)'는 무덤 뿐만 아니라 정원이나 논밭 등에 자라나 있는 잡초를 벤다는 뜻이라 했다. 요즘은 낫으로 풀을 베지 않고 기계로 하는데 풀을 베는 기계를 '예초기(刈草機)'라고 한다. 그리고 '사초(莎草)'라는 말도 하는데, 그것은 '오래되거나 허물어진 무덤을 보수하고 떼를 입혀 다듬는 일을 이르는 말'이라 했다.

또한 '성묘(省墓)'는 뜻이 조금 다르다는 거다.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에 고향에 가서 부모님을 뵙는 것을 귀성(歸省)이라 하는데 이는 '귀향성묘(歸鄕省墓)'를 줄인 말이라 했다. 그러니까 '성묘'는 명절이나 한식(寒食) 같은 절기에 조상의 묘를 찾아가 손질하고 살피는 일이다. 따라서 추석에는 아침에 집에서 차례를 지내고 조상묘를 찾아 성묘를 한다. 성묘와 벌초의 차이는 설과 한식에는 성묘는 하지만, 벌초는 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설은 겨울이라 벌초할 필요가 없고 한식도 풀이 자라나지 않아 벨 풀이 없다. 다만 한식에는 봉분이 무너진 곳을 수리하거나 말라버린 떼를 다시 입혀주는 사초(莎草)를 하기도 한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전통을 없애려 한다는 거다. 우리 사회가 여러 부분에서 비틀거린다.

젓갈/이대흠

어머니가 주신 반찬에는 어머니의
몸 아닌 것이 없다

입맛 없을 때 먹으라고 주신 젓갈
매운 고추 송송 썰어 먹으려다 보니
이런,

어머니의 속을 절인 것 아닌가


젓갈은 어패류의 몸을 소금에 오래 삭힌 것. 이 시의 젓갈은 멸치젓이거나 갈치속젓일 것이다. 남도의 바닷가에서 나는 전어속젓일 수도 있겠다. 원래 물고기의 형체는 거의 사라지고 비릿한 냄새와 짠맛만 남은, 거무튀튀하고 질척하고 때로는 달달한 젓갈 말이다. 젓갈에서 어머니의 몸을 발견하는 순간, 이런, 시는 순식간에 짠 해지는 어떤 공간 속으로 독자를 데려간다. 오랜 시간 간장이 짓물러지도록 살아온 어머니와 그 어머니의 속을 태우며 살아온 화자의 모습이 이 짧은 시 속에 다 들어 있다. 우리는 시가 반성의 양식이라는 걸 여기서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그래서 젓갈 때문에 잠시 숙연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속을 절여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건네줘 보았나. 이 시를 소개한 안도현 시인의 덧붙임이다. 다음 시가 소환 된다.


스며드는 것/안도현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 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서해안에 꽃게가 풍년이라고 한다. 꽃게는 쪄 먹어도 좋고, 탕을 끓여도 좋다. 바닷가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라면을 끓일 때 넣으면 맛이 그만이라고 한다. 또 간장게장이나 양념게장의 미혹에 빠져보지 않은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간장게장은 오래 보관하기 위해 지독하게 짜게 담그던 것인데 요즘 사람들의 입맛에 맞춰 심심하면서 달달해졌다. 전북 부안의 시장통에는 살아 있는 꽃게를 즉석에서 양념에 버무려 내놓는 집도 있다. 가을은 금어기 동안 살이 통통하게 오른 수 꽃게가 인기다. 봄에는 알이 가득 찬 암 꽃게를 제일로 친다.

꿈틀거리는 꽃게를 게장으로 담글 때, 옆에서 지켜 보기만 해도 나는 침이 넘어간다. 그때 죽음을 목전에 둔 꽃게는 무슨 생각을 할까? 알을 품은 꽃게의 입장이라면? 그런 궁리를 하면서 시 한 편을 썼다. ‘스며드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 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이 시를 읽고 나서부터 그렇게 좋아하던 간장게장을 먹을 수 없었다는 독자들을 가끔 만난다. 미안하지만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내 시에 걸려든 것! 나는 여전히 잘 먹는다. 안도현 시인·우석대 교수

2
지명훈 기자의 책방 <<오래된 질문>>에 다녀왔다. 임형남 노은주 건축사 부부가 리모델링했다 한다. 그 부부의 책이 <나무처럼 자라는 집>>이라 한다.  공간은 오가는 사람들의 새로운 시선과 관심으로 나무처럼 자라나고 새롭게 태어난 거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유도 이것을 담는 공간처럼 언어에 의해 새롭게 형성되고 재탄생한다. 비트겐슈타인 한 말, '언어는 존재의 집"이 소환된다. 그리고 그는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라고 말했던 처럼,  첫 북 토크의 <<납작한 말들>>이 우리의 다양한 사유의 가능성을 무너뜨린다. "그래서 어쩌라구"라는 말은 모든 사유와 논의의 공간을 납작하게 찌그러트린다.

납작한 말들을 몰아내면 우리의 사유공간이 풍성해질까? 주인장 페북에 올라온 글이다. "우린 얼굴에 주름을 없애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면서, 마음 속의 주름을 펴는 데에는 무관심" 하다. 얼굴의 주름이 노화의 결과라면, 마음의 주름은 납작한 말들, 납작한 사고의 결과'가 아닐까 하고 질문한다.

그 책방은 주로 철학 책들이었다. 그런데 한 구석에 안도현 시인의 엮은 <이 시를 그때 읽었더라면-가만히 외우고 싶고 베끼고 싶은 65편의 시>>가 놓여 있었다. 난 개업 선물로 그 책을 구입했다. 언젠가 읽었던 <안도현의 발견>이라는 칼럼을 다시 찾아 읽었다.

오늘은 안도현 시인의 기도를 공유한다. "납작한 말들"을 하지 않으려는 기도로 읽는다.

긴 것은 기고 아닌 것은 아니다 말하게 하소서. 
눈치 보느라 눈이 한쪽으로 몰려 붙은 도다리로 살아온 시간을 뉘우치게 하소서.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말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말을 다시는 입 밖에 꺼내지 않게 하소서. 
절실하게 사랑해야 할 것들과 죽도록 미워해야 할 것들을 구별할 수 있게 하소서. 
길이 없다고 두리번거리지 말고 길이 되어 걸어가게 하시고, 내가 내 운명의 주인임을 아프게 새기며 살아가게 하소서.

바람 부는 날은 바람이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게 내버려두시고, 어두워지면 우주의 어둠이 몸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끼게 하소서. 
평수 넓은 아파트에 산다고 해서, 배기량 많은 승용차를 탄다고 해서 적게 먹고 적게 싸는 칠점무당벌레의 삶보다 우월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소서. 
나의 밥그릇이 소중한 만큼 남의 밥그릇도 소중하다는 것을 깨우치게 하소서.

우리가 부르는 노래는 울음이 되게 하소서. 
우리의 울음소리로 우리가 다시 태어나게 하소서. 
남의 노래는 안 듣고 제가 부를 노래의 목록이나 뒤적거리는 노래방에서는 노래하지 않게 하소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시간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게 하시고, 나뭇잎이 튕겨 올리는 햇빛 한 오라기도 감격하는 눈으로 바라보게 하소서. 
당신으로 하여 내 마음속 물관부에 늘 사시사철 서늘한 물이 흐르게 하소서. 
당신과 나 사이의 아득하고 아득한 거리를 자로 재지 않게 하시고, 당신을 그리워하는 미음을 저울로 달지 않게 하소서.

3
오늘도 소설을 읽는 시간을 가졌다. 어휘와 표현을 회복하는 시간이다. "사람들은 네시[네스호의 괴물] 따윈 아무래도 좋다는 식으로 그를 잊었고 그러다 가도 어느새 널어둔 빨래를 깜빡했다는 듯 다시 떠올렸다. 우리는 오래전 사라진 말(언)들을 많이 알고 있다. 그것들을 찾아내야 한다. 왜냐하면 내 고향은 세종시라는 이름이 사라졌다. 그런데 내가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니 공주 골목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그 옛 모습에 예술의 옷을 입었다. 어젠 그런 곳에서 <<납작한 말들>>이라는 책에 대해, 그 집의 좁은 마당[주인은 이곳을 '아고라'라 불렀다.]에서 저자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공산당 말은 믿을 수 없다." 이런 게 납작한 말이다. 사진이 물 그림자[물에 비쳐 나타난 물체의 그림자]가 포착된 것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물 그림자를 본 적이 있는가? 나는 물 그림자를 좋아한다. 

"천지 모습은 탈영병을 숨겨준 어머니처럼 침착하고 고요했다." 멋진 그림이 그려진다. 침착과 고요. 나는 이 두 단어를 좋아한다. 

침착은 가을을 맞이하는 마음을 준비하면 된다.
수렴의 시간을 준비하는 거다.
나를 충동질했던 것으로부터 침착해지고, 그로부터 오는 쓸쓸함, 적막함도 소중히 여긴다.
그걸 절대 두려워하지 않는다.
인간이 쓸쓸함을 느낀다는 게 고귀한 감정일 수도 있다. 이걸 병이라고 생각하면 우울증이 된다.
위도일손(爲道日損, 도라 함은 날마다 던다는 것이다)'이란 말이 있다.
성장은 하나 씩 더하는 일이고, 성숙은 하나 씩 버리는 일이다.
변화하는 것은 성숙하는 것이며, 성숙하는 것은 자신을 끊임없이 창조하는 것이다.

知止而後有定(지지이후유정)
定而後能靜(전이후능정)
靜而後能安(정이후능안)
安而後能慮(안이후능려)
慮而後能得(려이후능득)
<<대학>>
 
머무름(멈춤)을 안 뒤 에야 자리를 잡는다.
자리 잡은 뒤 에야 능히 고요할 수 있으며,
고요한 뒤 에야 능히 안정이 되며,
안정된 뒤 에야 능히 생각할 수 있고,
깊이 사색 한 뒤 에야 능히 얻을 수 있다.
 
정좌관심(靜坐觀心) 조용히 앉아 마음을 들여 다 본다.
마음을 안정한 후에 생각을 가다듬는다. (<대학>)
마치 호수 위에 떠 있는 별과 달은 그 물이 잔잔해야 제대로 비쳐진다.
하루의 절반은 독서를 하고, 나머지 절반은 정좌를 한다. 
매일 시간을 가리지 말고 한 시간 정도 정좌하라.
자신의 혼란스러운 생각을 통제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는 관찰할 수 있다. 그러면 가난 속에서도 마음은 가을 물처럼 맑고, 고요해진 마음은 봄바람처럼 부드럽다.

우리가 비우고 내려놓을 것은 다음 4 가지가 가능하다. (1) 완벽을 내려놓으면 여유가 생긴다. (기대를 내려놓으면 고마움이 생긴다. (3) 질투를 내려놓으면 나 다움이 생긴다. (4) 집착을 내려놓으면 초연함이 생긴다.'

"세상엔 이유를 알고 나면 너무 시시 해져버려 오히려 영원히 알지 않는 편이 나은 경우도 있는 듯 했다."

4
세상에는 괜찮은 말들도 있다. 그런 말들을 만나면 때론 변화, 때론 위로, 때론 지혜, 때론 통찰을 얻는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이다.
▪ 많이 무서울 때는 그게 뭔 지 꼭 확인해 봐야 한다.
▪ 삶의 고통을 무기력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비로소 어른이 된다.
▪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으면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마라.
▪ 이런 말들을 들으면 우리는 단단해 진다.

5
오늘의 말씀을 대면한다. <루카 복음 16,19-31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 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부자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 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하고 대답하자, 부자가 다시 ‘안 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에게 아브라함이 이렇게 일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사람/상지종 신부님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 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루카 16,19-20)

보지 않는
사람 곁에는
보이지 않는
사람뿐이지요

보이지 않는
사람은
있어도 없는
사람일지니

보지 않는
사람은
있는 사람을 없애는
사람이요

있는 사람을
없앰으로써
사람을 있게 하신
하느님마저 잊은
사람이겠지요

지금 여기에서
보지 않는
사람은
언젠가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될 테 지요

지금 여기에서
보이지 않음으로써
있음에도 없는
사람에게는 물론
지금 여기에
계심에도 잊힌
하느님 께마저도

지금은 아니어도
언젠가는 말이지요

허나
보지 않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사람이기에

있어도 없어야 할
사람일지 언정
몸소 내시고
늘 보고 계시는
하느님께는

하느님을 닮아
애써 보는
사람에게는
보이는
사람은

지금 여기에서
뿐만 아니라
영원히 있는
사람일 테고요

그리고
그 곁에는
보이지 않는
사람을
보는
사람이

지금 여기에서 처럼
영원히 함께 있을 테지요

약하고 힘든 자를 보아야 한다. 그도 우리의 이웃이다. 측은해 하여야 한다. 그리고 보살피고 나누어야 한다. 한국 사회는 '가진 자'가 되기 위한 책은 수없이 쏟아지고 있는데, 그만큼 약자를 배려하고 많은 사람이 사람 답게 사는 사회를 위한 이론적 토대를 주는 교양 서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평등한 세상에 대한 담론이 별로 없다. 우리는 사회 속에 산다. 사회적 동물이다. 그래 무리를 지어 살며 서로 도움을 주고 받을 수밖에 없다. 이를 인정하며 주위의 도움으로 더 많은 기회가 열리고 나의 도움으로 주위 사람들이 함께 성장하는 선순환이 일어난다. 남에게 주저하지 말고 도와 달라고 청하고 주위의 어려운 사람은 주저 말고 도와주면 삶이 충만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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