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징징거리는 사람은 정작 타인의 울음은 듣지 못한다.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10월 13일)
늘 징징거리는 사람은 정작 타인의 울음은 듣지 못한다. 자신의 내부가 너무 시끄러우면 타인의 목소리가 묻히기 때문이다. 이때 상대의 말을 듣기 위해 필요한 건 적당한 양의 침묵이다. 대화에서 내가 어떤 말을 했는지는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다. 정말 중요한 건 상대가 나의 어떤 말을 ‘기억’하느냐 이다. 말없이 친구의 말을 그저 듣기만 했을 뿐인데 대화가 끝날 무렵 친구에게 “오늘 조언 고마워. 정말 도움이 됐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저 친구의 눈을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이고, 친구가 울 때 손을 잡은 게 전부였는데도 말이다. 이런 대화에서 침묵은 제3의 청자다.
하지만 자신의 얘기를 하느라 상대의 말을 듣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전환 반응’이라고 부르는데 모든 대화를 ‘나’로 전환시켜 자신의 얘기만 하는 것이다. 가령 “요즘 몸이 좀 안 좋아”라고 말하는 친구에게 “나도 안 좋은데!”라고 말하는 식이다. 끊임없이 상대의 이야기를 자신의 스토리로 바꿔 버리는 이런 식의 대화는 우리를 지치게 한다. 좋은 대화는 “어디가 안 좋아?”라고 물으며 상대의 마음속으로 한걸음 더 들어가는 것이다.
정신과 문턱이 높을 때, 유독 사람들이 점집을 많이 찾던 이유 역시 꼭 그럴 듯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다. 점 쟁이야말로 내 말에 온 신경을 집중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답답한 마음을 털어 놓는 것만으로도 이미 위로를 받는다. 그러니 대화 중 잘못된 정보가 있다고 해도 중간에 끼어들지 말고 끝까지 들어야 한다.
헤밍웨이도 말했다. "말을 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몇 년이면 충분하지만, 침묵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평생이 걸린다. 나이가 들수록 말을 덜해야 한다. 특히 결정 권한이 있는 사람보다 일을 직접 수행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더 들어야 한다. 내게 어떤 선택 권한이 있을 때, 나만 말하고 있지는 않는지 자주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행간을 읽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단어보다 쉼표를 읽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 사람은 말보다 표정을 읽으려는 사람이다. "말하지 못하는 것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사회학자 엄기호의 말이 오늘 눈에 잡힌 문장이다. 엄기호에 의하면, "말하는 것을 듣는 건 수비만 하는 것"이라며 "고통은 침묵으로 표현될 때가 많기 때문에 말하지 못하는 것들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거다. 가장 잘하는 대화는 듣기를 잘하는 사람이라 했다. 게다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듣는 감수성을 키워야 한다.
"말을 많이 하지 않으면 그득해진다. (…) 속이 든든해 지고 싶으면 말을 참아야 한다."(시인 박연준) 사람도 많이 만나지 말아야 한다. 글쓰기도 그렇다. 마음을 든든하게 하는 건 정적 없이 쏟아지는 수다가 아니라, 매우 적은 글자로 완성한 몇 개의 문장이다. 작가처럼, 나도 아늑하고 고요한 일상을 꿈꾼다. 안온(安穩, 조용하고 편안함)한 삶은 충만한 삶에 가깝다. 김소연 시인의 말처럼, "심심함이 윤기 나는 고독이 되어 갈 때 나는 씩씩 해진다." 씩씩하게 살고 싶다. 오늘 공유하는 시의 "멈춰선 돌멩이처럼."
침묵/이학성
그는 천천히 어깻죽지의 날개를 제거했다
그로서 갈망하던 대로 착지를 얻었다
다음으로 그는 팔과 다리를 분질러 부동을 취했다
그러나 그 것만으로는 부족했기에
기어이 눈을 찔러 멀게 하고
입과 코와 귀마저 샐 틈 없이 봉해버리자
비로소 오감에 휘둘리지 않는 의지가 그를 껴안았다
그가 바란 궁극이 그것이었으니
그의 선택이 옳다 그르다 우리가 관여하거나
판별하기는 적절치도 않거나 와
이젠 그가 자유로이 허공을 떠돌던 영혼임을 알지 못한다
단지 그가 오래된 신비로운 언어를
마침내 터득했음을 감지할 따름이어서
제대로 알아들을 이가 고작 몇몇일 까마는
지나가며 바위에 쫑긋 귀를 댔다 가는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길 뿐이다.
이 시를 소개한 김정수 시인의 덧붙임을 읽어야 오늘 공유한 시를 이해한다. "시인은 시 ‘멈춰선 돌멩이’에서 세상 어디로든 멀리 가고 싶었지만 “애타게 기다리는 이” 때문에 돌아와 침묵하며 산다고 했다. 돌멩이가 날아온 곳으로 돌아가려면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야” 한다고 했다. 돌멩이에서 바위로 사물이 바뀌긴 했지만 이 시는 ‘멈춰선 돌멩이’의 후속편 같다. 아니 바위가 되는 과정으로 보면 ‘침묵’하기 전 상황이다. “날개를 제거”하고, “팔과 다리를” 분지르고, 스스로 눈을 멀게 하고, 입·코·귀를 봉하자 비로소 침묵에 든다."
오감은 오욕칠정(五慾七情), 즉 사람의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다섯 가지 욕망과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 일곱 가지 감정을 떠올리게 한다. 궁극은 모든 욕망을 내려놓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경지다. 비록 자유로이 허공을 떠돌 자유를 잃었지만, 마음만은 평안하다. “오래된 신비로운 언어”는 침묵이다. 침묵은 단순히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있는 것이 아니라 말로 죄를 짓지 않는 행위다. 침묵의 언어에 귀 기울여 스스로 마음을 씻을 일이다. 어느 수도원에 이런 말이 적혀 있다고 한다. "당신이 말을 할 때에는 침묵보다 나은 것이어야 하라."
우리는, 정신차리지 않고 방심하면, 자신의 과거에 축적된 세계관이란 렌즈로 주위를 보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대상에 대한 가치를 나름대로 측정한다. 자신의 시선을 객관적이며 온전한가를 스스로에게 묻고 의심하지 않는 한, 우리는 자신의 인식체계의 노예가 되어 대상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한다. 특히 우리는 세상을 쉽게 둘로 나눈다. 왜냐하면, 그런 구분이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은 늘 변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투스가 한 말이 지금도 혜안을 준다. 그가 한 말이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빠질 수 없다. 잘 알려진 라틴어 문장이다. Panta chorei ouden menei. 모든 것은 변하고 그대로만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영어로 말하면 이렇다. Everything changs, and nothing remains still. 만물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한다. 생로병사의 수레바퀴 안에서 있음과 없음을 반복하며 변한다.
서양 철학과 종교는 이상세계와 현실세계를 구분하였다. 그러한 구분은 우리가 사유하는데 편하게 해주었지만, 동시에 우리의 생각을 혼탁하게 만들어왔다. 나는 이 두 세계를 품으려 노력하고 있다. 그래 한문 명(明)자를 가지고 늘 깨어 있으려고 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가 밝을 ‘명(明)'자이다. ‘밝다'의 반대는 ‘어둡다'이다. 명자를 풀이하면, 해(日)와 달(月)이 공존하는 것이다. 해를 해로만 보거나, 달을 달로만 보는 것을 우리는 흔히 '안다'고 하며, 그 때 사용하는 한자어가 '지(知)'이다. 안다고 하는 말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평생을 안다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고 외치다 죽은 이유를 난 알겠다. '명'자는 그런 기준을 세우고, 구획되고 구분된 ‘앎(知, 지)’를 뛰어 넘어, 두 개의 대립면을 하나로 장악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것은 명확하지 않은 경계에 서거나 머무는 일이다. 그건 침묵 속에서 가능하다.
명(明)자에 해당하는 고대 그리스어가 다이몬(daimon)이다. 다이몬은 악마이면서 동시에 천사이다. 다시 말하면, 다이몬은 악마와 천사의 경계 위에서 문맥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다이몬이 품고 있는 의미가 다양하다. '천사, 악마, 천재성, 신 그리고 운명'의 뜻을 담고 있다. 다이몬은 신적인 존재로, 자신을 수련하여 신적인 삶을 살려는 자를 심판하는 전지전능한 존재이다. 단테는 자신의 심연 속에서 깨어난 이것을 ‘스피리토 아모로소( spirito amoroso), 즉 ‘사랑이라는 영혼'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소크라테스와 괴테가 발견했다는 ‘다이몬(daimon, 자신을 자신 답게 만드는 천재성)’이며,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발견하기 전에 들었다는 ‘내면의 소리(inner voice)'이며, 고대 이스라엘 예언자 엘리야가 들었다는 ‘침묵의 소리(sound of silence)이며, 스티브 잡스를 미치게 만들었다는 ‘글자 사이의 공간(space between letter combinations)'이다.
이 다이몬은 수련자가 완벽한 자가 되도록 수련 시키는 '도움이'이다. 다이몬은 인간에게 혹독한 심판을 통해, 인간 각자가 지닌 고유한 개성을 드러내도록 돕는다. 개개인이 지닌 자신만의 고유한 특징이 '천재성'이다. 천재는 자신이 즐거워하고, 몰입할 수 있는 한 가지를 찾은 자이다. 자신만의 구별된 한 가지를 매일 매일 완벽하게 갈고 다는 사람이다. 천재는 남들과 경쟁하지 않고 더 나은 자신을 상상하고 숭고한 자신과 경쟁하는 자이다. 다이몬은 나를 억세게 밀어붙여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길 요구한다. 다이몬은 나의 운명을 재단하여 나만의 개성을 드러내도록 도와주는 사범이다. 침묵 속에서 이 다이몬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인생은 나의 선택을 기다리는 기회로 가득 차 있다. 자신의 개성과 천재성을 훈련시킬 다이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이다. 그건 침묵 속에서 가능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인생이란 자신의 임무인 다이몬, 즉 천재성을 찾는 여정이라 했다. 나는 그 다이몬이 인간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신적인 어떤 특질이라면, 나는 이 단어를 인간을 한껏 고양시키는 인간 심성 깊숙한 곳에 숨어있는 '신성'(神聖)이라고 번역하고 싶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명언 "에토스 안스로포 다이몬"을 다시 번역하자면 "한 사람의 인격은 그 사람이 인생을 통해 수련한 결과로 도달한 신성 혹은 카리스마다"다. 인격이란 인간 각자가 지니고 있는 그 사람만의 신성성을 발현하는 수련이다. 이러한 길에서 우리는 우왕좌왕하고, 좌절한다. 최 교수는 "방황하는 길 위에서 "너는 누구냐?'라는 환청에 시달린다면, 오히려 괴로워"하지 마라고 했다. 오히려 그건 병이 아니라, "신이 되어 가는 고단한 여정에 자기 스스로 내리는 축복의 종소리"라고 했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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