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가을에는 결정의 말을 준비해야 한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10. 14. 15:04

3년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2년 10월 12일)

오늘 아침은 어제 못다한 노자 <<도덕경>> 제42장의 이야기를 좀 더 이어간다. 어제는 道生一(도생일) 一生二(일생이) 二生三(이생삼) 三生萬物(삼생만물)", 즉 '도가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는 문장에서 도를 '기(氣)'로 풀었는데, 오늘은 '무(無)'로 읽어본다. 어쨌든 '도'가 '하나(一)'라는 생각은 같다.

노자가 보는 이 세계는 유/무, 음/양, 장/단 등의 대립면들이 반대편으로 향하는 경향을 매개로 서로 꼬여서 존재한다는 거다. 세계가 이렇게 존재한다는 사실 혹은 그 원칙을 나타내는 범주가 바로 '도'라는 거다. 따라서 이 세계의 모든 가치나 사물에는 상대되는 짝이 있지만, 상대되는 이 짝들이 꼬여서 세계가 이루어진다는 원칙, 즉 '도'만큼은 짝을 가질 수 없다(제25장의 "독립불개(獨立不改)"를 소환한다). 그것 만큼은 하나, 즉 일(一)이다. 그런데 그 '일'은 순수한 단일성으로 서의 '일'이 아니라, 두 대립면이 잡종처럼 섞여 있는 일이다. 카오스(chaos), 즉 혼돈이다. 그래 "도생일"을 도가 모자(母子) 관계에서 처럼 일을 발생시킨다는 뜻이 아니라, '도'가 '일'이라는 관념 속에서 산다. "도즉일(道則一, 도가 곧 일이다)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이해해야 제42장을 편하게 읽을 수 있다.

"일생이(一生二)"에서 '일'은 대립되는 두 면이 꼬여 있는 새끼줄 같은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두 가닥으로 꼬여 있는 '일' 안에는 이미 이가 들어 있다. 그런데 대립되는 두 면은 각각 따로 존재하고 따로 살림을 차리고 사는 것이 아니라, 둘 사이의 관계, 즉 '일'로 표현되는 원칙의 지배를 받고 산다. 각각의 둘은 일이라는 원칙 아래에서 의미와 존재성을 부여 받고 산다.

"이생삼(理牲三)"은 대립되는 두 면의 관계를 통해 어떤 것(三)으로 존재한다는 거다. 여기서 "삼"은 음과 양, 두 기운(氣)의 조화를 이뤄 빚어낸 '어떤 것'이 된다. 아니면, '유(有)'와 '무(無)'의 관계를 통해 "삼'을 이룬다는 거다. 제25장의 "有生於無(유생어무)"를 소호나한다. '유는 무에서 생겨난다'는 거다. '장(長)'과 '단(短)'이라는 두(二) 대립면이 만나 길이(三)을 만들어 내고(生), '음(音)'과 '성(聲)'의 두(二) 대립면이 조화를 이뤄 '음성(三)'을 이룬다(生)는 거다.

"삼생만물(三生萬物)"에서 대립면의 조화로 이루어진 "삼(三)"은 또 어떤 특별한 과정을 거쳐서 또 다른 형태의 만물로 변질된다는 것이 아니다. 이런 여러 '삼'들이 합쳐진 것이 바로 "만물(萬物)"이라는 거다. 그래 바로 이어지는 다음 문장이 쉽게 와 닿는다.

萬物負陰而抱陽(만물부음이포양) : 만물은 음을 등에 엎고 양을 가슴에 안고 있다.
沖氣以爲和(충기이위화) : 기를 비움으로 조화를 이룬다.

이게 이 세계의 존재 형식이다. 두 기운이 서로 만나 조화를 이루는 것이 만물이 존재하는 형식이다. 다시 더 보태면, 음과 양이라는 두 대립면이 서로 충돌하여(沖氣) 어떤 균형 상태(和)를 이룬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읽어내야 할 것은 제38장부터 계속되는, 대립되는 두 면을 포함하는 도를 본받아서 하는 최고의 덕성들은 모두 그 반대 면을 버리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 면에 중점을 두라는 거다.

여기까지 이르니 그 다음 문장도 금방 이해가 간다. "人之所惡(인지소악) 唯 孤 寡 不穀(유 고 과 불곡) 而王公以爲稱(이왕공이위칭), 즉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은 고아, 과부, 쭉정이 곡식이지만, 이것은 임금이 스스로를 부르는 이름이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고기한 것은 비천한 것을 뿌리로 하고 있음을 통찰했기 때문이다. 그 다음 문장도 마찬가지이다. "故物或損之而益(고물혹손지이익) 或益之而損(혹익지이손)", 즉 그러므로 사물은 덜면 보태고, 보태면 덜게 된다." 세상사의 모든 일은 반대 면끼리의 묘한 관계로 되어 있기 때문에 무엇을 줄이려고 하지만 오히려 늘어나 버리는 경우가 있고, 반대로 무엇을 늘여 보려고 하지만 오히려 줄어 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 다음 문장, "人之所敎(인지소교) 我亦敎之(아역교지)", 즉 사람들이 가르치는 것을 나도 역시 가르친다'는 말은 상대방의 이론 체계와 다르더라도, 그것을 자신의 가르침 범위 안으로 끌고 들어 와 그것을 가르친다는 말 같다. 이것은 이 세계가 대립면들 사이의 묘한 조화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치를 깨달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열린 태도이다. 항상 자신을 반대편을 향해 열어 놓는 개방성이다.

마지막 문장이 압권이다. "强梁者不得其死(강량자부득기사) 吾將以爲敎父(오장이위교부)". 즉 강한 대들보는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한다. 나도 이것을 내 가르침의 으뜸으로 삼고자 한다." 세계가 두 대립면들 사이의 묘한 꼬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치를 모르고, 스스로 금을 그어 둔 세계 속에 고정된 채, 시멘트처럼 굳었거나 대리석처럼 반들거리며, 한치도 물러서지 않는 사람들, 즉 강량자(强梁者, 강하고 센 사람)은 종종 제 명을 다 살지 못하고 종말이 좋지 않다는 뜻이다.  이런 태도로 통치하는 사람들은 결국 세상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정복당하거나 실권하여 치욕을 당한다는 거다. 그렇게 때문에 이런 이치를 알고 있는 노자는 위에서 말한 내용들을 '가르침의 으뜸'으로 삼아 가르친다는 뜻으로 읽는다.

채움(益)보다 비움(損)이 강한 경쟁력이며, 지속 생존의 바결이다. 그러므로 이런 언설이 가능하다. '강한 자는 오래 살지 못한다." "강하고 센 사람은 제명에 죽자 못한다." 좀 생뚱맞 지만, 장자가 도(道)를 말하면서 했던 말을 소환한다. "殺生者不死(살생자불사), 生生者不生(생생자불생)" 이 말을 해석하면, "삶을 죽이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삶을 살리는 사람은 살지 못한다'는 거다. '도'를 따르는 길은 우선 '오상아(내가 나를 장례 시킨다)'를 하는 일이다. 이는 우리의 작은 삶, 작은 나를 죽이는 것이 진정으로 죽지 않는 길이고, 우리의 작은 삶, 작은 나를 살리는 것이 사실은 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죽기 전에 죽는 사람은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말이나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는 말과 비슷하다. 한 알의 밀알이 썩지 않고 있으면, 그것은 그 한 생명으로 끝나고 말지만, 그것이 썩으면 새로운 생명으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좀 어렵게 말하면, 우리는 자의식으로 가득한 현재의 '나'가 죽어 없어질 때 '우주적 의식'을 지닌 진정한 '나', '우주적 나'가 새로 탄생한다는 '죽음과 부활'의 종교적 진리를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어쨌든, 나는 예전에 제42장을 읽고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요약한 적이 있다. 요약하면,  "道가 하나를 낳고"했을 때, 그 '하나'는 <<주역>>에서 말하는 태극(太極)이고, '둘'은 음(陰)과 양(陽)이고 '셋'은 천(天)·지(地)·인(人)이다. 조화로운 삼(三)이 낳은 만물 속에서, 잃음이 얻음이 되고, 얻음이 잃음이 된다. 그리고 강자는 자신의 명대로 옳게 죽지 못한다. 어쨌든 잘 사든 못 살든, 진정한 성공은 제명대로 사는 거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했다는 다음 말을 생각하며, 오늘도 충만한 하루를 보낼 생각이다. 오늘 일정은 하루 종일 이어진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을 비우면 비로소 세상이 보이고, 비우고 나면 다시 무언가 채워진다.  마음과 물질이 아닌 영혼 깊이 모두를 비워내다 못해 긍휼과 사랑으로 가난하게 되어야 천국을 소유하게 된다. 재물이  부자인 사람은 근심이 한 짐이고,  마음이 부자인 사람은 행복이 한 짐이다. "천국과 지옥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지난 월요일에 가을비가 내리더니, 가을이 깊어진다. 그래 오늘 아침은 최하림 시인의 시를 공유한다. 가을을 알려 주는 현상들은 많다. 아침저녁으로 냉기가 느껴진다든지 바람이 산뜻해진다. 그러나 가을이면 떠나는 이들이 많아진다고 이 시는 말한다. ‘그대’가 한길에 서 있다. 어디론가 ‘빠져나가’기 위한 태도처럼 보인다. 그러한 ‘그대’는 ‘한꺼번에’ 여기저기 있다. 기차역에 서 있고 우체국으로도 간다. 떠나는 일들로 가을은 분주하다. 사실로서는 모두 일상적 행위이겠지만, 가을을 진심 맞이한 ‘나’로서는 모두 떠나는 ‘그대들’로 보인다. 인연을 떠나 보내는 일에는 ‘결정’의 말(편지)이 필요하다. 그 말은 살아온 모두를 함축할 만한 ‘열매’와 닮은 것이어야 하겠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 ‘결정’의 말을 ‘도무지’ 모르겠다는 것이 이 시의 내용이다. 그러나 이 시는 가을에는 결정의 말을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만은 또렷하게 알려 준. 가을이지만, 아직 결정의 말을 마련하지 못한 ‘우리’는 ‘그대’들을 다시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렇지만, 그건 나부터 나를 비우는 일이다.

가을 편지/최하림

그대가 한길에 서 있는 것은 그곳으로 가을이 한꺼번에 떠들썩하게
빠져나가고 있다고 나에게 말해 주고 있는 셈입니다 그대가 역두
(驛頭)에 서 있다든지 빌딩 아래로 간다든지 우체국으로 가는 것도
수사가 다르긴 하되 유사한 뜻이 되겠습니다
날마다 세상에는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나고
바람과 햇빛이 반복해서 지나가고
보이지 않게 시간들이 무량으로 흘러갑니다
그대는 시간 위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대에게 나는 지금 결정의 편지를 써야 합니다
결정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시간 위에 떠 있는 우리는 도무지 시간의 내용을
알 수 없으니 결정의 내용 또한 알 수 없는 일이겠습니다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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