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이젠 세상과 싸우지 않기로 했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10. 13. 16:49

3년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2년 10월 11일)

어제는 '철저한' 준비없이 기획한 2022 UCLG(세계지방정부연합) 월컴축제에 <유성관광두레>의 이름으로 참석하였는데, 비가 와 행사다운 행사도 못하고 초저녁에 일찍 철수했다. 참석 이유는 '채우려 하면 결국 손해 나고, 비우면 오히려 채워진다'는 노자의 역설 때문이었다. 오늘 읽을 다음 문장을 소환하며 버텼다. "損之而益(손지이익) 或益之而損(익지이손). 속세의 세상 일은 손해를 보면 이익이 되고, 이익이 되는 행동을 하려 하면, 손해보게 된다." 어찌 세상 일이 다 내 마음대로 되겠는가?

이젠 세상과 싸우지 않기로 했다. 노자 철학의 "무위(無爲)"를 알았기 때문이다. "무위"는 함부로 나대지 않음, 머물러 있음, 지나치지 않음이다. 지나치지 않음으로 자기 소모가 많지 않은 거다. 자기 소모가 많지 않음으로 피로가 누적되지 않는다. 세상의 굳셈과 사나움에 굳이 맞서지 않고 조화의 한가운데에 머무른다. 이런 마음으로 오늘 아침은 노자 <<도덕경>> 제42장을 읽을 생각이다. 오늘 그 차례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장이다. 나도 개인적으로 이 장을 좋아한다. 좀 어렵지만, '도(道)'는 천지(天地)를 넘어서는 개념이며, '형(形)'과 '명(名)'으로 구체화 시킬 수 없는 개념이라는 것을 조금씩 알아가다 보니, 이 장의 이해가 좀 잘 된다.

'도'의 출발은 '하나'다. 복잡한 것이 아니라 가장 단순한 것에서 '도'가 시작된다. 그래서 '도'가 '하나'를 낳는다고 했다. '하나'는 '둘'로 분화되는데 여기서의 '둘'은 음과 양, 시간과 공간, 부와 모, 0과 1 등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서로 상반되는 요소가 결합되어 제3의 존재를 탄생시키고, 이로부터 만물이 파생된다는 거다.

문제는 이 "하나(一)"가 상징성이 풍부하여 우리의 일상 언어로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거다. 지난 제39장에서 이 "하나"에 대해 긴 이야기를 했었다. 그 때 우리는 그 "하나(一)"를 '도'라 말할 수 있다고 했다. 만물을 낳고 기르는 그 '하나', 자신의 공을 드러내지 않는 그 '하나', 간섭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지켜봐 주는 그 '하나'를 '도'로 볼 수 있다고 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그 '하나'를 통해 생명력을 얻고 평온을 찾는다. 하늘이 맑은 것도, 땅이 평정한 것도, 신이 신령한 것도, 골짜기가 가득한 것도, 여러 가지 사물이 생성 변화하는 것도, 심지어 지도자가 훌륭하게 되는 것도 위에서 말한 '하나' 덕택이라는 거다. 이 근본적인 바탕인 '하나'에 뿌리박고 있지 않으면 하늘도 그 밝은 빛을 잃고 갈라질 것이고, 땅도 흔들릴 것이고, 그 밖의 모든 것이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말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제39장에서 "득일(得一)", 즉 '하나(一)를 얻는다는 것'은 스스로 존재하는 '도'가 자신을 드러내는 원리, 규칙, 방법으로 보았다. '도'가 현실세계에서 '덕'으로 구현되면, 천하는 맑아지고(淸), 땅은 편안해지고(寧), 신은 영험함을 얻고(靈), 계곡은 빔으로 가득 차고(盈), 만물은 생장하고(生), 통치자는 이로써 세상을 바로 잡는다(貞). 이 말은 땅을 비롯한 모든 것이 '하나'를 바탕으로 한 삶을 살 때 제 구실을 다하듯, 인간, 특히 리더도 '하나'를 근본 원리로 삼고 살아야 가장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거다. '하나'를 근본으로 하는 삶은 무엇인가? '하나'는 모든 것을 꼴 지어 주지만 스스로 어떤 꼴을 취해서 자기를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수적으로도 그것은 모든 숫자의 시작이며 바탕이지만, 동시에 모든 숫자 중 가장 작은 숫자이다. 이런 뜻에서 '하나'는 자기 낮춤의 최고 상징이다.

장자가 말하는 '하나'도 인상적이다. 외편 <지북유>에 나온다. "통천하일기이(通天下一氣耳), 성인고귀일(聖人故貴一)." '천하만물을 통하는 것은 하나의 기이다. 성인은 그러므로 하나를 귀하게 여긴다'는 거다. 만물은 일기(一氣), 즉 하나라는 거다. 이 기(氣)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지생기지취야(人之生氣之取也), 취즉위생(取則爲生), 산즉위사(散則爲死), 약사생위도(若死生爲徒), 오우하환(吾又何患), 고만물일야(故萬物一也)." '사람이 태어남이라고 하는 것은 기가 모이는 것이다. 모이면 생하는 것이고, 흩어지면 죽는 것이다. 생과 사가 한 무리라고 한다면, 내가 걱정할 게 뭐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만물은 하나다'라는 거다. 생명이 시작되는 최초의 계기, 생명의 탄생을 위하여 기가 모여드는 최초의 계기를 "일(一)"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도'는 보편자이므로 개별적 생화(生化)의 계기에 쓰이는 개념으로서는 적합치 않다. 도를 생화(生化)의 본체라고 한다면, '하나(一)'은 생화의 형기(形氣)의 출발이다. 박재희 교수도 "도생일(道生一)"의 '하나'을 "우주 창조의 원리와 만물의 생성 원리"로 읽지 말고, 우리들에게 "어떻게 세상을 대하느냐 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하여 도의 속성을 끌어낸 것"으로 읽으라 했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본다. "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만물 위에 도가 존재한다고 가설을 만든 것"이다. "인간은 그 도의 속성을 따라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우주는 '도'의 작용을 통해 운행되고 있고, 그 운행의 방식은 "부음포양(負陰抱陽)"과 "충기위화(沖氣爲和)"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말이기도 하다. '만물은 음의 기운을 등지고, 양의 기운을 안고 있다." "두 기운이 상호작용하여 평형의 상태를 이룬다."

물론 '도'가 '하나(一)'을 생한다고 하는 것은 단선적 한 방향이 아니다. '일'은 또다시(또는 동시에) 도를 도와 하늘(=양)을 생한다. 이 과정이 바로 "일생이(일생이)"의 과정이다. 다시 이 하늘은 도를 도와 땅(=음)을 생한다. 이 과정이 "이생삼(二生三)"이다. 이것은 <<태일생수>>에서 "천반보태일(天反輔太一), 시이성지(是以成地)", '하늘 또한 자기를 생한 태일(太一)을 오히려 돕는다. 그리하여 땅을 이룬다'는 거다. 생의 과정은 모든 단계에서 동시적으로 상보(相輔) 관계를 이루고 이룬다는 거다. "생(生)"의 과정은 반드시 "복상보(復相輔)"라고 하는 역의 관계를 동시에 수반한다. 이 점을 간과하면 안 된다. 흥미롭다. '"복상보"의 논리'에 따르면 내가 나의 자식을 생한다면, 나의 자식은 동시에 나를 생하여야 한다는 거다. 태일이 물을 생한다면 물은 동시에 태일의 생성을 도와 하늘을 생한다. 하늘은 동시에 태일의 생성을 도와 땅을 생한다.

그리고 삼(삼)은 만물이 생성되는 기본 여건인데, 그것은 결국 천(天)과 지(地)와 충기(沖氣)의 "일(一)"이라는 거다. 하늘과 땅이라고 하는 것은 만물을 생하는 기본 틀이지만, 이 틀은 '일기(一氣)'의 작용, 다시 말해서 하늘과 땅의 기운을 끊임없이 조화시키는 "하나"의 통합작용 없이는 생하고 멸하는 생성과정의 연속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기(氣)는 모인다고 해서 생명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모임을 조화롭게 지속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생(生生)의 과정을 전제로 할 때, "부음포양(負陰抱陽)"과 "충기위화(沖氣爲和)"라는 말이 이해가 된다. 음과 양은 태극기의 문양에서 보듯이 서로를 등에 지는 동시에 서로를 가슴에 안는다. 음과 양의 교차 생성을 말하는 것이다. "충기(沖氣)" "기를 비운다" 또는 "텅 빈 우주에 가득한 기"로 번역되나, 이 기들이 서로를 용납하고 서로를 배제하면서 각각의 정체성을 유지한다. 그 동일성을 유지하는 과정을 "화(和)"라고 하는 것 같다. 이들은 자신에게 속한 에너지를 완전히 비움으로써 조화를 이루고 이를 통해 그들의 자식(제3의 존재)을 낳는다.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워서 생명의 물질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음의 속성과 양의 속성의 적절한 상호 작용, 두 에너지의 조화로운 상태가 바로 도의 상태, '하나'라는 거다.

'자신을 비운다는 것'은 '가장 보 잘 것 없는 존재로 스스로를 낮춘다'는 의미다. 제39장에도 나왔듯이 그래서 왕은 자신을 가장 보 잘 것 없는 존재인 "고(孤)", "과(寡)", "불곡(不穀)"이라 지칭한다. "손지이익(損之而益)", 즉 덜어낸 후 보탠다는 문장은 비운 후 생명을 탄생시키는 도의 원리와 같은 맥락이다. 노자에게 있어서는 존재하는 것은 생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생성하는 것은 빔(虛)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존재하는 것은 비어 있는 것이 된다. 비어 있지 않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 빔이란 모든 가능성의 잠재 태이며, 창조성의 원천이다. 빔이 없으면 창조는 불가능하다. 우주도 비어 있는 것이고 하찮은 미물도 다 비어 있는 것이다. 비어 있어야만 합생(合生)이 가능하고 타자의 포용이 가능하고, 다(多)를 일(一)로 통합하여 포일(包一)시키는 창조적 전진이 가능하다. 노자의 우주에는 진공(Vacuum)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공(空)은 기(氣)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존재의 부정이 아닌 창조의 터전이다. 도올 김용옥의 설명이다. 이 설명을 읽고 나니, 노자가 말하는 '도'의 세계가 조금 이해되기 시작한다.

지나치게 강한 대들보가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중도에 부러지는 것처럼, 강력한 법과 물리적 강제력만으로는 사회 질서를 온전하게 유지할 수 없다. 밀어붙이기 식의 통치는 공동체에 균열을 발생시킨다. 물처럼 유연한 리더십만이 지속가능한 평화를 가능하게 한다. 강하고 센 것은 노자가 싫어한다. 강한 것은 결국 부서지고,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는 거다. 채우려 하면 결국 손해 나고, 비우면 오히려 채워진다는 노자의 역설이 계속된다. 역대 제왕은 자신을 칭할 때 "고(부모를 잃은 고아)", "과(짝을 잃은 홀아비나 과부)", "불곡(못난이)"이라고 자신을 부르는 것도 낮추면 더욱 높아진다는 도의 운동 방식을 따르는 것이다. 채움(益)보다 비움(損)이 강한 경쟁력이며 지속 생존의 비결이다. "교부"는 '으뜸가는 가르침'으로 읽고, "화"는 '허(虛)'와와 '약(弱)'으로 유지되고 생성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본다. 그래 오늘 아침 박영근 시인의 시를 공유한다. 우선 제42장의 원문과 번역을 올린다.

道生一(도생일) 一生二(일생이) 二生三(이생삼) 三生萬物(삼생만물): 도가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萬物負陰而抱陽(만물부음이포양) : 만물은 음을 등에 엎고 양을 가슴에 안고 있다.
沖氣以爲和(충기이위화) : 기를 비움으로 조화를 이룬다.

人之所惡(인지소악) 唯 孤 寡 不穀(유 고 과 불곡) 而王公以爲稱(이왕공이위칭):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은 고아, 과부, 쭉정이 곡식이지만, 이것은 임금이 스스로를 부르는 이름이다

故物或損之而益(고물혹손지이익) 或益之而損(혹익지이손): 그러므로 사물은 덜면 보태고, 보태면 덜게 된다.

人之所敎(인지소교) 我亦敎之(아역교지): 사람들이 가르치는 것을 나도 역시 가르친다.
强梁者不得其死(강량자부득기사) 吾將以爲敎父(오장이위교부): 강한 대들보는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한다. 나도 이것을 내 가르침의 으뜸으로 삼고자 한다.

흰빛/박영근

밤하늘에 막 생겨나기 시작한 별자리를 볼 때가 있다. 그래
고통은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잣소리로 미쳐갈 때에도
밥 한 그릇 앞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
치욕일 때도
그것은 어느새 네 속에 들어와 살면서
말을 건네지 살아야 한다는 말

그러나 집이 어디 있느냐고 성급하게 묻지 마라
길이 제가 가닿을 길을 모르듯이
풀씨들이 제가 날아갈 바람 속을 모르듯이
아무도 그 집 있는 곳을 가르쳐줄 수 없을 테니까
믿어야 할 것은 바람과
우리가 끝까지 지켜보아야 할 침묵
그리고 그 속에서 타오르고 있는 불
이렇게 우리 헤어져서
너도 나도 없이 흩날리는
눈송이들 속에서

그래, 이제 시는 그만두기로 하자
그 숱한 비유들이 그치고
흰빛, 흰빛만 남을 때까지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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