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의미라는 차원은 우리 인간에게만 존재한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10. 12. 10:58

3년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2년 10월 10일)

건강하고, 그 걸 감사할 줄 알면 "전분세락"이다. '전분세락(轉糞世樂)' 이란 '개 똥 밭에 뒹굴어도  저승보다는 이 세상이 더 즐겁다는 뜻'이다. ​살아 있으니 인생(人生)을 논(論) 할 수가 있는 것이고, ​희로애락(喜怒哀樂)도 삶을 이어 갈 수 있을 때, 우리들의 삶은 의미(意味)가 있는 것이다. 이 의미 이야기를 좀 길게 해보겠다.

박문호 박사의 유튜브 강의에서 배운 거다. '재미', '의미' 그리고 '창의'를 한 쌍으로 묶어 '메타사고'를 설명했다. '메타사고'는 '생각을 생각하는 거'다. 여기서 재미와 달리 의미는 자연에는 없다. 의미라는 차원은 우리 인간에게만 존재한다. 박테리아의 단세포와 달리 다 세포인 동물과 인간은 의식을 한다. 동물과 인간이 다른 것은 동물은 주지적 의식을 하지만, 인간은 자기 주지적 의식을 한다는 거다. 그리고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다. 아직도 재미만 추구한다면 아직도 어른이 못된 거다.

여기서 의식의 구성 요소는 지각, 개념 그리고 의미이다. 그리고 의식은 이전의 기억이 있어야 한다. 이전의 기억 상태로 앎이 일어나는데, 그걸 우리는 의식이라 한다. 기억이 없으면 의식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 그 기억을 위해 우리는 공부해야 한다. 그래야 삶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의미를 찾으려면 지각과 개념의 관계를 알아야 한다. 우리의 지각은 실재를 보지 않는다. 물론 실재는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은 실재를 보지 못한다는 말이다. 실제로 다양한 시간과 공간의 조합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세계는 다층적이다. 그래서 우주에 동시는 없다. 순간 하나밖에 없다. 두 개의 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국부적 순서와 지역적 현재 밖에 없다. 그래 우리들에게는 '지금-여기'가 중요한 것이다. 그 순간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세계는 매우 빠르게 변하고 있다. 예를 들어 가상세계의 등장으로 '현재'의 개념이 매우 중요 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새로운 지각의 확장, 더 나아가 또 다른 자아를 만들어야 한다. 특히 배움을 통해 그 세계로 진입해야 한다. 새로운 지각을 열어야 한다.

그 방법은 지금까지 자신이 가졌던 가정(if)를 살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새로운 지각의 가장 큰 걸림돌이 기존의 가정(if)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존의 가정을 깨는 유일한 방법은 질문이다. 왜냐하면 가정한테 꼼짝 못하는 게 지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각을 바꾸려면 가정을 바꾸어야 한다.

가정이 지각을 막는다. 가정이 지각에 박스를 쳐버린다. 무슨 말이냐면, 지각을 꼼짝 못하도록 가두는 우리의 많은 가정들이 지각을 상자 속에 가둔다는 거다. 그래서 새로운 지각을 가지려면 창문을 새롭게 내야 한다. 가정의 감옥에 있는 유일한 창문을 우리는 개념이라 하고, 그 개념으로 우리는 세상을 본다. 그 개념이 우리가 보통 말하는 프레임, 세상을 보는 방식이다.

그래 우리는 '지각은 결코 개념을 넘어설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세상을 보는 것이 지각이다. 우리가 보통 알았다고 할 때 우리는 지각한 거다. 그러나 지각은 구속된 능력이다. 왜냐하면 지각은 개념을 통해서만 바라볼 수 있는 세계일 뿐이다. 개념이 허용한 창문을 통해서만 세계를 본다. 그러니까 개념이 없으면 세계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개념이 없으면 세계가 출현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개념은 가정의 명령 아래 돌아간다는 거다. 그래서 새로운 지각을 갖기 위해서, 아니 새로운 지각을 얻으려면 가정이라는 급소를 찔러야 한다. 그 기술은 질문하는 능력에서 온다. 그리고 그 능력은 배움에서 나온다. 박문호 박사는 이 배움의 기둥을 다음과 같이 4개로 세웠다.
1. 경험
2. 실험
3. 메타사고
4. 대화

개인적인 생각으로 질문을 깨야 할 가정(if)들은 위의 4 가지 기둥에서 나온다고 본다. 그런 배움을 통해 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많은 기억들이 잘 배치되어 있어야 한다. 이 배치가 중요하다. 잘 된 배치를 우리는 그리스어로 '아르스(ars)'라 한다. 우리 말로 하면 문법이다.

공기나 어머니의 사랑과 같이 너무 흔해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지만, 삶의 원칙과 문법이 되는 핵심적인 가치가 있다. 아름다운 시는 단어의 나열이 아니라, 단어의 선택과 배치이다. 단어의 선택에는 그 시인의 혼을 드러내는 개성이 담겨져 있고, 단어의 배치는 우리들의 삶을 지탱하는 삶의 원칙과 문법의 표현이다.

서양 사람들은 고대로부터 흔하지만 중요한 가치을 고취하는 교육과정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라틴어로 ‘트리비움(trivium)이라고 불렀다. ‘트리비움’이란 축자적으로는 세 갈래(tri) 길(vium)이 만나는 ‘공공公共의 장소’ 혹은 ‘광장廣場’을 의미했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는 공공장소인 시장, 즉 ‘아고라’가 있었고, 고대 로마에는 다양한 공공의 의견을 교환하고 대화하는 ‘포럼(forum)'이 있었다. 시민들은 이 광장에 모여,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고, 자신의 정제된 생각을 개진하고, 최선의 생각에 승복하는 문화를 만들었다. 이러한 문화는 기억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하찮은; 사소些少한’이란 의미를 지닌 ‘트리비얼(trivial)'은 라틴어 ‘트리비움(trivium)에서 유래했다. 로마인들은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고 독립적인 인간이 되기 위한 노력을 교육과정으로 만들어, ‘아르테스 리버랄리스(artes liberalis)'라고 불렀다. ‘리버랄리스’는 ‘자유로운’이란 의미다. 자유로운 인간이란, 자신에게 중요한 가치를 선별해 알고, 그 가치를 추하는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에게 자연스럽고 의연한 사람, 즉 ‘자유인自由人’이다. ‘자유’의 소극적인 의미는 탈출이다. 남들이 만들어 놓은 정신적이며 육체적인 굴레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한다. 소극적인 자유는 자유가 지닌 가치를 드러내지 못한다. 자유는 탈출이 아니라 열망이며 추구다. 자유는 자신이 간절하게 원하는 것이 있을 때, 자신의 개성을 최선으로 발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속한 공동체를 다양하고 조화롭게 만들 역동적인 힘이다. ‘아르테스’는 ‘최선; 예술; 기술’을 의미하는 라틴어 ‘아르스’ars의 복수형이다. ‘아르스’는 하찮아 보이지 않는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솜씨가 있게 엮어내는 기술이다. 그 솜씨는 어머니가 담근 김장김치 맛처럼, 오랜 시행착오를 거친 경험이 만들어준 최적화된 간결이다. 예술은 실패라는 경험들이 굴복하지 않는 의지와 결합할 때, 슬그머니 나오는 감동이다.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독립적인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교육이  ‘아르테스 리버랄리스(artes liberalis) 즉, ‘교양 교육’이다. 이 교양교육의 가장 기본이 ‘트리비움’이다.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할 지식이다. 너무 흔해 하찮게 보이지만, 공기처럼, 어머니의 사랑처럼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기 위한 덕목들이다. 트리비움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민교육의 틀이며, 8세기말 프랑크 왕국의 카를대제(샤를마뉴)의 문화장려교육을 통해, 오늘날 서양교육의 기반이 되었다. 나는 독립적인 인간인가? 무엇이 독립적인 인간을 만드는데 일조하고, 결국 독립국가를 만드는가? 트리비움을 구성하는 세 가지는 문법文法, 논리論理, 그리고 설득說得이란 무엇인가?

'트리비움(trivium)은 철학, 아니 인문학을 하는 세 가지 길, 즉 문법학(文法學), 논리학(論理學), 설득(說得)을 위한 수사학(修辭學)을 의미한다.
- 여기서 문법학은 철학서를 읽고 내용을 이해하는 것으로 우리가 말하는 읽기와 문해 력을 키우는 일이다. 문해력은 배치를 파악하는 거다. 지각하는 법을 배우는 거다.
- 논리학은 철학서에서 터득한 철학자의 사고법을 도구 삼아 내 생각을 하는 것, 즉 내 논리를 만드는 것이다. 즉 생각, 아니 사유하는 법을 기르는 일이다.
- 수사학은 내 생각을 글로 쓰고 나누는 것이다. 즉 글쓰기를 빼놓지 않았다. 그리고 글을 쓰되 다른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 것이다. 설득의 기술을 배우는 거다.

다시 오늘의 주제로 되돌아 온다. 개념이 없는 것을 접수하는 행위가 무의미이다. 개념 없는 행위를 우리는 무의미하다고 한다. 그래서 개념, 지각 그리고 의미는 하나이다. 개념, 지각 그리고 의미는 같은 정신 작용으로 그걸 주지적 의식 작용이라 한다. 그 다음 단계로 올라가면,  '자기 주지적 의식'이다. 이게 메타사고이다. 생각의 생각, 사고의 사고이다. 예를 들면 자기 관찰이 일어나는 거다. 이런 자기 관찰로 '알아차림'이 일어난다. 이건 동물이 할 수 없다. 인간 밖에 못한다.

이 알라차림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통찰이다. '탁 하면 아는 거다. 이 알아차림은 가정과 메카사고, 전제와 사유의 합이다. 여기서 전제나 가정은 경험을 비롯한 학습이고 메타사고와 사유는 생각하기이다. 그러니까 알아차림(통찰)은 체험과 개념, 경험과 이론, 기억과 사유가 일치된 앎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알아차림의 양이 늘면, 우리의 새로운 지각의 알아차림은 경험이나 체험에 개념이나 이론이 뒷받침되면 더 잘 작동된다. 지평이 확장된다.

그 다음 알아차림을 넘어, 메타사고, 지각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자유를 획득하는 길이다. 메타사고는 내가 하고 있는 행위를 제3자로 봐주는 자기 관찰이기 때문이다. 이 자신의 행위를 제3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메타사고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맥락을 놓치지 않는다. 우리는 맥락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맥락 없이 이야기 하는 것이 헛소리이다. 우리는 맥락 속에서만 존재한다. 인간은 맥락 안에서 살고, 그 맥락이 곧 관계이다. 맥락들을 벗어나면 의미가 사라지는 게 언어이다. 그때 그 언어는 non sens이다.

문제는 맥락과 관계는 국부적이고 지역적이라는 거다. 그리고 이 국부적 순서와 지역적 현재가 단지 의미를 만든다. 그리고 인과도 만든다. 그 인과도 국부적이고 지역적이다. 그 인과를 우주적으로 확대하면 안 된다. 그러니 "당신의 인과를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지 마라"는 인문정신이 출현한다. "그냥 놔두라" 이게 자유이다.

이런 모든 자유를 위해 우리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건강이다. 그 건강을 위해서는 우선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을 하려다 여기까지 왔다. 어떤 고난(苦難)을 당 하더라도 최악(最惡)이 아님을  감사(感謝)할 줄 알아야 하고 살아 숨쉴 수 있어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걸 감사해야 한다.우리는 잃어 버린 것과 남은 것 중에서 늘 잃어버린 것만 생각하며 아쉬워 하고  안타까워 한다. 이야기 하나를 한다.

​자신의 가난한 처지에 대해 항상 불평을 늘어 놓던 청년에게 어떤 노인이 물었다. "​자네는 이미 대단한 재산(財産)을 가졌으면서 왜 아직도 불평(不平)만 하고 있나?" 그러자 청년은 노인에게 간절(懇切) 하게 물었다. "대단한 재산이라니요? 아니 그 재산이 어디에 있다는 말씀이세요?" "​자네의 대단한 재산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은가? 좋네, ​자네의 양쪽 눈을 나한 테 주면, 자네가  얻고 싶은 것을 주겠네." "아니, 제 눈을 달라니  요.  그건 안 됩니다!" ​"그래? 그럼, 그 두 손을 나한 테 주게. 그럼 내가  황금(黃金)을 주겠네." "안 됩니다. 두 손은  절대 드릴 수 없어요." ​그러자 노인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두 눈이 있어 배울 수 있고, 두 손이 있어  일 할 수 있지 않은가? 이제 자네가 얼마나 훌륭한 재산을 가졌는지 알겠구먼."

건강(健康) 한 몸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축복이다. ​우리가 살아 가는데 재물(財物)이나 명예(名譽)도 중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바로 건강(健康)이다. 돈이 없으면  살아 가는데 불편하지만 살 수는 있다. 물론 살 수 있다고  다 기쁘고 행복한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살아 숨 쉬며 무엇 인가를 할 수 있는 것처럼 기쁘고  행복한 일은 없다. ​누리며 살아 가는 즐거움을 뒷받침 해 주는 것이 바로 건강이다. 그 어떤 것보다도
소중한 건강  잃지 않도록 해야겠다. 만일 다리 하나가 부러 졌다면 두 다리가 모두 부러지지 않은 것을 하늘에 감사하면서, 만일  두 다리가 부러 졌다면 목이 부러지지 않은 것에 감사하면서 말이다.

몇 일전에 이 시를 접하고, 산책 중에 개망초 꽃 사진을 얻었다.

개망초 꽃/안도현

눈치코치 없이 아무 데서나 피는 게 아니라
개망초 꽃은
사람의 눈길이 닿아야 핀다
이곳 저곳 널린 밥풀 같은 꽃이라고 하지만
개망초 꽃을 개망초 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개망초 꽃은 핀다

더러는 바람에 누우리라
햇빛 받아 줄기가 시들기도 하리라
그 모습을 늦여름 한 때
눈물 지으며 바라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이 세상 한쪽이 얼마나 쓸쓸하겠는가
훗날 그 보잘것없이 자잘하고 하얀 것이
어느 들길에 무더기 무더기로 돋아난다 한들
누가 그것을 개망초 꽃이라 부르겠는가…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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