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자신의 정신적 양식은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10. 10. 17:50

3459.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9월 26일)

1
오늘 사진은, 어떤 모임에 갔다 오다가, 동네 수목원의 소나무를 찍은 거다. 살다 보면 독야청청, 변치 않고 자신의 모습을 굳게 지켜 나가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고독’과 ‘고립’을 분별해야 하듯 ‘고독’과 ‘공존’은 조화로울 때 라야 가치를 발한다. 모두가 자신만의 이익을 위하여 달려갈 때는 독야청청할 수 있어야 하고, 다소 자신의 이익에 반하더라도 공동체에 도움이 될 때는 함께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소나무를 보니 정호승 시인의 시가 소환되었다.


어느 소나무의 말씀/정호승

밥그릇을 먹지 말고 밥을 먹거라
돈은 평생 낙엽처럼 보거라
늘 들고 다니는
결코 내려놓지 않는
잣대는 내려놓고
가슴속에 한 가지 그리움을 품어라
마음 한번 잘 먹으면 북두칠성도 굽어보신다
봄이 오면 눈 녹은 물에 눈을 씻고
쑥과 쑥부쟁이라도 구분하고
가끔 친구들과 막걸리나 마시고
소나무 아래 잠들어라

2
필립 길버트 해머튼(김육 편역)의 <<지적 생활의 즐거움>>에서, "지적 생활"은 내 안의 음성을 기다리는 행위이다. 지적 생활은 나의 요구를 나 자신에게 통보하는 수단이 아니다. 지적 생활은 삶의 은혜와 사랑을 나 자신에게 베풀어주는 도구이다. 지적 생활은 나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지적 생활은 한 가지 분야에 만족하지 못한다. 지식은 한 가지 모습이 아니다. 아주 다양한 얼굴을 보유하고 있다. 자기도 모르게 그 모습을 찾아가는 여행이 지적인 삶인 것이다.

자신의 정신적 양식은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지식은 음식과 같아서 먹고 싶은 것, 궁금한 것, 내 입에 맞는 것을 탐하는 건 잘못이 아니다. 오히려 타인으로부터 억지로 머리에 주입된 지식이 우리 삶에서 탈을 일으킨다.  지적인 광명은 햇볕과 같아서 실은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고 있다.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부자가 있는가 하면, 한 권의 책을 어렵사리 구해 읽고는 죽을 때까지 그 감동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빈자도 있다.

예술도 지적인 삶을 하는 거다. 예술은 다른 어떤 활동보다 위대한 것은 인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는 국민을 억압했고, 경제는 빈곤을 낳았고, 종교는 헛된 망상을 심었고, 법은 죄인을 만들었고, 철학은 진리에 더욱 목마르게 했다. 하지만 예술은 그 어떤 암흑의 시대에도 인간의 영혼을 위로한다.

지적 생활을 하면, 일상에 다음과 같은 지혜를 준다. 
▪ 아름다운 노년은 결국 아름다운 청춘을 살았다는 증거이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주어진 인생에 최선을 다했다는 뜻이다. 인간이 아름답게 늙지 못하는 것, 아니 늙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지나간 시간에 최선을 다하지 못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 경멸하고 싶은 사람을 적으로 만들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못한다. 내 마음에 안 들면 쏘아 붙이고 안 만난다. 내 철학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만나기도 바쁘다는 거다. 그런데 이 책은 "당신이 적에게 긍지를 가져야 된다"고 말한다. 흥미롭다. 싸우지 말고 혼자 긍지를 갖는 거다. "당신이 그들의 적이라는 사실에 긍지를 가져라"고 말한다.
▪ 지성의 명령은 확실히 무거운 사명이다. 사람들은 물질이 문명으로 대접받는 시대에 지성의 명령을 따르는 것은 어리석음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지성의 명령을 따르지 않게 되면 결국 본능의 노예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지성에 속한 자는 본능의 명령으로부터 자유롭다.

2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 명이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그는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자유를 원하는 자만이 인간이라 했다. 
지혜로운 사람은 당황하지 않고,
어진 사람은 근심하지 않으며,
자유와 용기가 있는 사람은 두려워 하지 않는다.

알면, 당황하지 않고,
욕심이 없으면 근심이 없고,
알고 욕심 내지 않는다면 두려울 것도 없다.
자유와 용기는 이 두 가지에서 생기는 것이다.

지성용 신부님의 <페이스북>의 담벼락에 나오는 다음의 패러디도 좋다.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야 나는 자유롭게 될 것이다.

두려움을 마주해야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 몸과 마음과 정신은 연결되어 있다. 어느 하나라도 지치면 다른 것도 영향을 받는다. 예컨대 우울 감은 마음의 감기라 할 수 있다. 혹여 몸과 마음에 우울한 한기가 들지는 않는지 두루 살펴야 한다. 그래야 삶의 의문점에 대해 질문 하고 답도 찾는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거다. 그리고 그때 두려움과 직면할 수 있게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유독 자신의 감정에만 냉정한 판사가 된다. 분노하면 ‘성격 더러운 놈’, 슬퍼하면 ‘약한 놈’, 두려워하면 ‘비겁한 놈’이라고 판결한다. 감정을 느끼는 것과 실제 행동하는 게 전혀 다른 일인데 말이다. 중요한 건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감정은 내면의 날씨와 비슷하다. 비가 온다고 해서 나쁜 날씨라고 하지 않듯, 분노나 두려움을 나쁘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비가 씨앗을 키우듯, 분노는 부당함을 바꾸는 힘이 되고, 두려움은 조심성을 길러준다.

3
나의 <인문 일지>는 악한 영과 싸우는 ‘워룸(war room)’이다. 나의 대적은 상황이나 사람이 아니라 내 안의 원망과 불평, 그리고 이것을 조종하는 악한 영이다. 그때부터 나의 골방은 어둠의 영들과 싸우는 '워룸'이 된다. 얼마 전 사람에게 실망하는 일이 있었다. 겉으로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속에서는 원망과 미움이 올라왔다. 나는 '워룸'에 들어가 그것을 십자가 앞에 꺼내 놓았다. 십자가에서 모든 괴로움과 억울함을 참으신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의 용서 앞에서도 여전히 자아를 붙잡던 나를 깨닫게 됐다. 그렇게 주님은 멀어진 텐션을 다시 조여 주셨다. 나를 힘들게 한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려는 악한 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결단한다. “매일 주님의 말씀으로 전신갑주를 입겠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그래 매일 하느님의 말씀 복음을 대면하고 먹고 실행한다.

4
어제 못다한 <<작은 일기>>(황정은)에서 밑줄 친 부분을 더 공유한다. "어리석음이 종종 늙음의 얼굴로 온다는 것은 기필코 늙는 존재인 내게도 섬뜩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다 가도. 그 어리석음이 마침내 늙음에서 개화 했겠 나, 인생 곳곳에 만발했을 것이다. 남의 인생을 이렇게 함부로 생각하며 앉아 있다. 헛소리하는 이들을 향한 원망과 분노가 있다." 실제 나도 그런 경우가 많다.

2025년 4월 4일 금요일 오전 11시 22분 헌재 파면 선고. "불신과 환멸과 걱정과 불안으로 말라 죽을 것 같던 마음이 단숨에 차 올랐다. 세상을 향한 감(感)이 그렇게 또 뒤집혀서, 나는 정말 얄팍하구나, 생각했다. 헌재 앞에 모인 사람들의 함성을 뉴스로 들었다." 나도 그때의 흥분을 잊을 수 없다. 나는 차 안에서 딸과 뉴스로 들었다. 그 날 저녁 기쁨 코드가 맞는 몇몇이 와인을 실컷 마셨다. 그런데 그 중의 한 명이 음주 사고를 쳐 더 그날을 잊을 수 없다. '당신들하고 동시대를 산 덕분에 이걸 보았어. 영광입니다.' 그 말을 내 집 거실에서 광장의 함성에 보탰다."

"지난 겨울과 봄은 나름으로 삶을 가꾸며 살아도 권한을 가진 몇 사람이 작정한다면 도리 없이 휩쓸리고 뒤흔들 수밖에 없는 작은 존재. 내가 그것이라는 걸 실감한 국면이자 계절이었습니다. 또한 나는 작아서 자주 무력했지만 다른 작음들 곁에서 작음의 위대함을 넘치게 경험한 날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국면을 함께 지나온 사람들. 여러분과 동시대를 살아 다행이었고, 영광이었습니다."

상처를 '언어'로 표현하고, '사랑'으로 말하면 치유된다. "이야기된 불행은 불행이 아니다. 그러므로 행복이 설 자리가 생긴다"고 이성복 시인은 말한다. 우리는 '사랑'으로 이야기를 함으로써 어떤 식으로 든지 상실의 상처에 의미를 부여한다. 상처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으면, 상처를 견딜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치유 받지 못한 상처는 '의미'를 부여 받지 못한 고통이다. 상실이 무서운 것은 그것이 '트라우마'로 남을 때이다. 트라우마로부터 빠져나오는 길은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의 대면을 통해 상처를 어루만져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5
오늘의 말씀은 <루카 복음> 9,18-22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다" 이다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그분께서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아무에게 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벗이 벗에게/상지종 신부님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루카 9,20)

벗이
벗에게
묻습니다
애틋한 마음으로
그대
홀로라도
벗이 되어줄래요

벗이
벗에게
답합니다
오롯한 마음으로

홀로라도
벗이 되어드릴게요


우리는 좀처럼, 자신이 경험한 인간을 신뢰하지 못하고, 남들이 제기한 소문을 진리라고 착각한다. 우리 대부분은, 자신의 판단보다는, 대중이 떠드는 그것이 정의라고 믿는다. 우리는  좀처럼, 어떤 사안에 대해 숙고하지도 않고, 숙고를 통해 자신만의 의견을 도출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예수가 제자들의 정신적인 수준을 알아보기 위해 던진 질문은 이것이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 하느냐?" 다른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예수에 관한 소문을 말하지만, 베드로는 자신만의 확신을 말한다. 베드로만 예수라는 육체에 숨겨져 있는 신성을 발견했다.

베드로가 자신의 눈앞에 있는 그 존재가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이며, 육신을 지닌 존재가 신이라고 고백했다. 이 고백은 베드로가 자신의 스승을 신적인 존재로 여기고, 자신도 예수처럼 신적인 삶을 살겠다는 다짐을 한 것이다. 베르로도 사랑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전파하다 십자가 처형을 당하였다. 베드로처럼, 인간은 고통을 통해 다시 태어난다. 외부에서 오는 고통보다도 자신이 택한 고통에 나는 주목한다. 인간은 다시 태어나기 전, 이기심과 본능의 노예가 되어 그럭저럭 연명한다. 이 속에서 인내와 절제를 발휘하는 것 자체가 고통을 선택한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주인 같지만, 사실은 쾌락과 편함이 주인이 되어 나를 마음대로 움직인다. 그러나 인간의 심연 속에는 신적인 불꽃이 숨어 있다. 그 불꽃에 불을 지펴, 빛으로 살지 못할 때, 그는 죄인이 된다. 죄인이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무식이고, 알더라도 최선을 경주하지 않는 게으름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SNS 공화국이다. 인터넷 공간에서 제기되는 선정적인 의혹만이 사실이다. 그 의혹이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외로움을 달래 주고 부러움을 경감해주면 굳건하게 진리가 된다. 이게 IT 공화국의 역설이다. 그 사실의 진위와는 상관 없이, 대중이 그렇게 생각하면, 그것은 정의이고 진실이다. 그런 일에 휘말린 당사자는 자신이 그런 의혹에 비춰진 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번거롭게' 증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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