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10. 10. 17:41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10월 9일)

오늘은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세상에 펴낸 것을 기념하고, 한글의 우수성을 기리기 제정한 국경일로 휴일이다. "나라의 말씀이 중국과 달라서 문자로 서로 맞지 않은 바,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여도 마침내 그 뜻을 다 펼치지 못함이 많음이라. 내 이를 불쌍히 여기어 새로 스물 여덟 자를 만드니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익혀 나날이 사용함에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세종대왕은 누구나 쉽게 배우고, 쓰면서 자신의 생각을 가감 없이 표현할 수 있도록 한글을 만드신 것이다. 그 덕분에 우리는 지금 더 자유롭고 편하게 소통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발음을 표기할 수 있는 문자이고, 소리의 표현은 일본어는 약 300개, 중국어(한자)는 400여개인데 반해 한글은 무려 1만1000개 이상을 낼 수 있다. 한글은 독창성이 있고 기호 배합 등 효율면에서 특히 돋보이는 세계에서 가장 독창적인 문자이다. 세계서 유일하게 문자를 기념하는 나라가 우리이다. 한글이 간결하고 우수하기 때문에 한국인의 문맹률이 세계에서 가장 낮다. 그런데 오늘날 외래어의 범람, 일제 잔재의 일본어 사용, 최근의 압축된 신조어 등으로 우리 말이 갈 길을 잃고 있다. 잘못된 언어를 자제하고, 아름답고 고운 우리 말을 사용함으로써 뜻깊은 날이 되었으면 한다. 훈민정음은 국보 7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지난 9월부터 강의가 폭주하여 시간이 부족하였는데, 모처럼 오늘은 한가하다. 그래 지난 9월 24일에, 젊은 시절의 실패는 자랑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실패들을 통해 '나만의 서사'가 있어야 한다. 즉 스스로 생성한 스토리가 있어야 성숙한 노년 문화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하다가, <<피로사회>>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한병철 교수가 <<서사의 위기>>라는 책 이야기를 하다가, 고미숙의 강의 <나이 듦의 기술>를 멈추었다. 오늘 다시 이어간다.

엘렌 랭어의 책 <<늙는다는 착각>>에는 "시간 거꾸로 돌리기 연구"라는 실험이 등장한다. 이것은 70~80대의 노인들을 20년 전의 시간으로 되돌려 일주일간 독립적으로 생활하도록 한 실험이다. 그 시절의 뉴스와 영화를 보고, 그때의 생활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다. 일주일 만에 놀라운 결과가 도출됐다. 실험 전까지 글자가 보이지 않아 포기했던 독서나 관절이 아파서 하지 않았던 설거지와 청소는 물론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일까지 노인들은 ‘스스로’ 그 모든 일을 해냈다. 청력, 기억력, 악력, 유연성, 자세나 걸음걸이까지 현저히 ‘젊어 진 것'이다. 저자는 “노인들의 발목을 잡는 것은 신체가 아닌 신체적 한계를 믿는 사고 방식"이라고 강조하였다.

우리 사회는 '사회적 시계'를 중시한 탓에 20대에는 취업, 30대에는 결혼, 40대에는 내 집 마련 같은 과업에 집착한다. 하지만 신체 나이에 맞는 올바른 생활방식과 태도가 있다고 믿으면, 60대와 70대에 남는 건 은퇴와 노화 뿐이다. 그러나 노화와 퇴화는 다르다. 기억력 퇴화 역시 그동안 쌓인 데이터가 젊은 시절에 비해 많아서 생긴 정체 현상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건 결국 태도다. 노년의 기억력이 좋아지려면 늘 먹던 것, 가던 곳을 갈 때가 아니라 새로운 음식을 먹고, 가보지 않은 곳을 갈 때다. 구부정해 지려는 마음을 한 번 더 펴는 것 말이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노년 문화이다. 우선 '몸'으로 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몸에 대한 집착은 자본주의의 고도의 전략이다. 이젠 생체 리듬에 맞게 자립을 하고, 가을-폐경기를 맞이해야 한다. 자연에는 가을에서 겨울로 이어지는 '수렴'하는 시간이 있다. 발산하고 수렴하여 식힌 후에 다시 시작하는 게 자연의 이치이다. 그러니 이제 가을을 맞아 열매를 맺어야 하는 시기에 들어섰는데 꽃피는 그 시절의 벚꽃을 흉내 내려고 하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가?  우리가 죽음을 통과하려면 우리가 집착하는 게 없어야 한다. 인간의 운명은 자연에서 절대로 못 벗어난다. 자연의 원리에 따라 폐경은 축복이다. 이제 더 이상 출산의 의무를 지지 않아도 되고 인생의 한 마디가 지나간 거다. 그건 노인이 외모와 성적 욕구로부터 얻은 자유이다.

다시 생체 리듬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니까 수렴 기간 때부터 비우는 연습을 해야 한다. 돈이 없으면 정신적 풍요로움으로 살아가는, 마음으로 비우는 훈련 이것이 공부이고 수련이다. 그래야 우리는 삶을 그 시절에 맞게 살아낸 자가 도달한 겨울, 그리고 생명의 근원, 이것을 터득하는 게 태어난 보람인 거다.

어떤 면에서는 노인이 되면서 병을 앓고 있는 게 좋은 수 있다. 그래야 몸을 조절하고, 쓸데없는 욕심을 부리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늙고 병드는 게 바쁜 일만은 아닌 것이다. 지식과 지혜는  많이 가지는 게 아니다. 그 것들을 갖고 젊은 이들과 소통해야 한다. 가지고만 있어서는 소통하지 못하고, 그것을 가지고 윽박지른다. 절대 자기 의도와 어긋나는 것을 용서하지 못한다. 우리가 아프고 병들며 겪는 고난이 우리들의 탐진치(貪瞋癡, 욕심과 노여움과 어리석음)를 조절해 준다. 그런 차원에서 질병이나 죽음은 선물이다. 왜 우리는 죽음을 무서워 할까? 아마도 삶에 대한 집착 때문일 거다. 자신의 삶이 '탐진치'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에 갖고 있는 걸 못 놓겠다는 것일 테다. 하지만 생체 리듬을 타는 사람에게는 당연히 밟아가는 과정이 된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윤동주(실제 윤동주의 시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음)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 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며 살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었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기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가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 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삶에도 겨울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 과정을 통과해야 다른 형식으로 다른 생명의 리듬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살아가면서 했던 생각, 말과 행동 등 이 정보들은 우주에서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다른 것들과 섞여서 변이도리 뿐이다. 정보 자체는 해체된다. 우리 몸이 해체되니까. 하지만 본질은 이 우주 안에서 계속 운행을 한다. 그게 동양적 사유에서 본 죽음이다. 그래서 동아시아 철학에서는 죽음을 터부시하거나 애통해 하지 않았다. 자연으로 돌아가서 쉬는 시간이라고 여겼다. 그러니 몸에 대한 집착, 몸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하나의 '나이 듦의 기술'이 아닐까?

더 나아가, 이러한 해방 끝에 오는 우정과 철학의 시간을 맞이해야 한다. "노년이 됐다는 것은 젊은 날의 충동과 나를 지배하는 이성적인 질풍노도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라고 2천 년 전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가 말한 바 있다. 그러니 노인이 되면 자유로운 것이다. 그러니 이제부터 삶에 대한 통찰로 들어 갈 수 있는데, 이게 바로 철학 하는 거다. 그런데 철학 공부는 혼자 하면 외롭다. 그래서 우정이 필요한 거다. 노년에 접어들었다는 것은 혈연적 관계망에서 벗어난 거다.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셨고, 자식은 다 커서 자기 길을 가고, 이젠 책임도 벗고 혼자서 온전히 세상과 만날 수 있게 된 거다. 그런 존재들의 결합이 우정이다. 철학을 함께하는 우정을 우리는 '도반(道伴)'이라 부른다. 부부 사이도 이런 관계가 되지 않으면 헤어질 일만 남고, 같이 못 산다. 부부 간에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배움의 관계로 바뀌어야 한다. 친구도 마찬가지이다. 서로 배우는 친구로 바꾸지 않고, 돈 문제가 개입되면 나이 들어서 다 깨진다.

우리에게는 '어른'으로 늙어갈 용기가 필요하다. 우선 죽음을 작별의 시간으로 사는 것도 좋다. 부처가 보여준 것처럼 말이다. 그는 식중독으로 입적을 하면서 이렇게 마지막 유언을 하였다 한다. "용맹 정진하라. 나는 스승이 아니다. 도반이다. 그냥 이 길을 먼저 앞서 갈 뿐이다. 그러니 너희도 용맹 정진하라." 자기를 믿어서 되는 게 아니라는 거다. 이게 바로 지혜이다. 부처도 평생 생로병사에 대한 질문을 멈추지 않았던 노인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마지막 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우리는 왜 이런 경지에 이르지 못할까? 고미숙에 의하면, 질문을 포기하기 때문이라 했다. 그리고 어딘 가에 의존하려고 하고, 내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부탁한다는 거다. 인류의 무화를 보면, 노인들은 아이를 낳고 돌보는 대신 마을의 지도자가 되거나 마을의 문화를 생산하는 존재였다. 그런데 지금의 노인들은 불쌍하고 약한 관리 대상이 되어 있다. 노인의 역할은 지혜의 스승, 멘토가 되는 거다. 그러려면, 인생 전체의 비전이 있어야 한다. 멘토가 자기 계발 비법이나 전수하는 게 아니다.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어야 한다.

이제 노인이 해야 할 일은 직업을 다시 얻어 사회적으로 진출하는 일이 아니고, 혈연과 자족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벗어나 공동체 전체의 비전과 자기 존재의 구원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고미숙이 강의 끝에서 한 말이다. 100% 동의한다. 노년 문화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는 청춘에 대한 허황된 이미지로부터 벗어나, 주로 성적 쾌락으로 구성된 소비 문하와 몸의 '탐진치'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그녀는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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