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정언약반(正言若反, 제78장): 바른 말은 거꾸로 들리는 법이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10. 10. 17:38

3년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2년 10월 8일)

노자 <<도덕경>>에서 내가 좋아하는 말은 "미명(微明)"이다. '미명'이란 말 그대로 하면 '미묘한 밝음'이지만, '흐릿한 지혜'이다. 지혜는 늘 그런 모양이다. 바른 말은 거꾸로 말하는 것 같다. 이를 "정언약반(正言若反, 제78장)"이라 한다. '바른 말은 거꾸로 들리는 법이다'로 읽을 수도 있다. 노자의 글쓰기 방식이기도 하다.

다음은 최진석 교수의 주장이다. 공자가 대립면들 사이를 특정한 의미나 내용을 중심으로 갈라놓는 것과 달리, 노자는 대립면들 사이의 경계를 흐릿하게 하거나 심지어는 그 흐릿한 경계마저도 없애 버린다. 이것은 본질적 내용으로 직분과 직분 사이 그리고 인간과 동물 사이를 분명히 구분하는 작업을 기초로 하는 유가와 달리, 모든 존재들이나 가치들에 본질이 있음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반대면과의 관계나 반대편을 향한 운동으로 읽어 내는 노자의 세계관이 드러나는 글쓰기이다.

어제 우리가 정밀 독해를 했던 것처럼, 밝은 길이 밝은 길로 있지 못하고, 어둑한 곳으로 의미가 바로 전이된다. 정말 깨끗한 것도 정말 깨끗한 것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바로 더러운 것과의 관계 속에서 해체되어 버린다. 정말 참된 것은 그 순수성을 지키는 것으로 정당화되지 못하고, 변질이라는 전혀 반대의 상황으로 스며들어 버린다. 이런 관점에서 제41장 나머지 부분의 정밀 독해를 한다.

大方無隅(대방무우) : 큰 네모는 모퉁이가 없고
大器晩成(대기만성) : 큰 그릇은 완성이 없고(이루어진 것 같지 않고),
大音希聲(대음희성) : 큰 소리는 소리가 없고
大象無形(대상무형) : 큰 모습은 형체가 없고,

道隱無名(도은무명) : 도는 늘 숨어 있어 이름이 없다. (도는 숨어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다.)
夫唯道(부유도) 善貸且成(선대차성): 오직 도만이 잘 베풀고 잘 이루어 준다. (대저 도만이 자기를 잘 빌려주면서 또한 남을 잘 이루게 해준다.)

도는 이런 역설적인 특성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것이 아니라, 이런 역설적 특성 때문에 위대한 것이다. 아니면 위대하기 때문에 역설적이다. 이런 역설적 특서에 열린 마음으로 귀기울이느냐 아니면 무조건 조소하고 거절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됨됨이가 저울질 되는 셈이다. 하나씩 다시 읽어 본다.

1. 大方無隅(대방무우): 네모난 것이 크면 마치 모서리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방(方)"은 '네모'이고, "우(隅)"는 '구석', '모퉁이', '모서리'를 뜻한다. 네 군데가 각이 진 네모의 넓이가 아주 크면, 마치 네 군데 모서리가 안 보여서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거다. 우리가 보고 아는 것은 어떤 조건 화된 한계에 있다. 무한하게 큰 것은 인간 감각 기능으로 감지되지 않는다. 그래서 무한한 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여긴다.

무한한 것은 경계와 모양이 없기 때문에 '무(無)'라고 하며, 무엇인가가 있는 있는 것 같은데, 알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모든 것을 초월해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거다. 그래 우리 인간은 감각을 초월하는 어떤 것을 숭배하게 되는 데, 그것이 바로 인간이 만든 '신(神)'이 아닐까?

그리고 제28장에서 노자는 "樸散則爲器(박산즉위기) 聖人用之(성인용지) 則爲官長(즉위관장) 故大制不割(고대제불할)"이라 했다. '통나무를 쪼개면 온갖 그릇이 생겨난다. 성인은 통나무의 질박한 가능성을 잘 활용하여 세상의 진정한 리더가 된다. 그러므로 훌륭한 리더의 다스림은 자질구레하게 자르지 않는다'는 거다. 이것은 제도를 말하는 거다. 그래서 "대제불할(大制不割)"이라 한 것 같다. '큰 도일수록 세밀한 것을 논하지 않는다'는 거다. 어느 한 곳에 치우침이 없다는 말이다. 대제를 말하지 구체적이 않다는 거다. 세밀함이 없다는 말이다. 아우트라인(outline)만 있다. 통나무는 다듬으면 그릇이 된다. 그런데 성인은 관장, 즉 관의 장으로 삼아 사용한다. 이 말은 통나무를 다듬는 것은 세밀함이고, 관장을 임명하는 것은 넓은 의미라 그릇은 그릇으로만 사용되고 관장은 아직 관장 아래 많은 이가 있어야 관이 돌아가게 된다. 성인은 관장만 임명하고 나머지는 관장이 알아서 할 일이다. 그래서 큰 제도는 세밀한 부분은 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쉽게 말하면, 통나무를 쪼개어 그릇을 만들 수 있듯이 소박함을 끊어 인재를 만들 수 있지만 성인이 그들을 쓸 때는 고작 한 분야의 우두머리로 쓸 뿐이다. 그러므로 크게 쓸 때에는 인위적으로 손대지 않고 통나무의 소박함을 그대로 두는 것이라는 말이다. "대제불할"은 넓게 다스리는 제도에서는 세세하게 개별화로 나눠서 규제하지 않는다는 말로 이해하면 더 쉽게 와 닿는다. 도올 김용옥은 다르게 풀이한다. '관장'을 성인 본인의 덕성, 위상으로 보았고, "대제불할"을 통나무, 박의 무위정치로 보았다. 그래 그는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성인은 통나무의 질박한 가능성을 잘 활용하여 세상의 진정한 리더가 된다. 그러므로 훌륭한 리더의 다스림은 자질구레하게 자르지 않는다."

2. 大器晩(免)成(대기만(면)성): 큰 그릇은 이루어진 것 같지 않다. 그릇이 거대하면 가득 채워지는 것이 끝나지 않는다.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모양으로 결정되는 완성의 단계가 없다.
왕필본은 "만(晩)"인데, 백서본은 "면(免)"으로 되어 있다. 왕필본의 '늦다'는 뜻의 "만"로 해석하면, 앞 뒤에 있는 다른 문장들과 조화가 맞지 않는다. 나는 '큰 그릇은 늦게 만들어진다'로 알고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큰 그릇은 완성이 없다'로 읽어야 하다는 것을 최근에 알았다. 좀 쉽게 말하면, '무한하게 큰 그릇에는 완전히 속이 채워지지 않는다'로 읽을 수 있다. 한계가 없이 무한하게 전개 되는 도의 수용성을 묘사하는 것 같다.

3. 大音希聲(대음희성): 소리가 너무 크면 들리지 않는다. 음(音)에는 소리(有聲)가 있는데, 정말 큰 음(大音)은 소리가 없다(無聲).
여기서 "희(希)"는 '드물다', '적다,' '바라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제23장은 "희언자연(希言自然)"이라는 말부터 시작한다. 많은 주석가들은 "말을 별로 하지 않는 것이 자연이다" 또는 "말이 없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로 해석을 한다. 그런데 도올 김용옥은 "도가 말이 없는 것은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라 풀이한다. "희"를 '무'로 읽어야 한다.

큰 소리는 귀의 수용 능력을 초과하므로 들리지 않는다는 거다.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소리는 진동수 한계 네에서만 들을 수 있을 뿐, 아주 낮는 초저주파 음과 초고주파 음은 사람의 귀로 들리지 않지만, 그 소리 에너지는 분명히 귀로 들리는 소리보다 더욱 강하다. 이것은 인간의 감각 기능은 일정 조건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

4. 大(天)象無形(대(천)상무형): 큰 모습은 형체가 없다. 상(象)에는 형체가 있는데(有形), 정말 큰 상은 형체가 없다(無形).
곽점본과 백서본은 "대상" 대신 "천상"으로 되어 있다 한다. 그렇다면, '하늘의 생김새는 모양이 없다'로 읽어야 한다.  하늘은 모양이 없고, 그 크기도 알 수 없는 무한이라는 거다.

그리고 이어지는 "道隱(褒)無名(도은(포)무명)"은 '도는 감추어져서 이름이 없다'는 거다. 도는 이 세계가 반대편을 향해 움직이거나 반대편을 향해 열려 있는 개방적 경향을 매개로 꼬여 있는 사실 혹은 그 원칙을 나타내는 범부이다. 즉 이 도는 세계가 관계와 변화 속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명(명)은 정지시키고 구별하며 특정한 의미로 규정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계가 변화와 관계 속에서 있음을 나타내는 도는, 다시 말해 관계와 변화 속에 있는 이 세계는 정지시키고 구별하며 특정한 의미로 테두리를 긋는 개념화 작업에 포섭될 수 없다. 따라서 "도은무명"이다. 왕필본과 달리, 백서본에는 "도은" 대신 "도포(道褒)"로 되어 있다 한다. 여기 "포"는 '크다', '넓다'란 뜻이다. 그럼 '무한하게 펼쳐지는 도에는 붙일 이름 조차 없다'로 읽어야 한다.

마지막 문장, "夫唯道(부유도) 善貸(始)且(善)成(선대(시)차(선)성)"은 두 가지 버전이 있다. 왕필본은 '도만이 만물에 시혜를 베풀고 잘 완성해 준다'로 읽어야 한다. 즉 만물을 잘 보존해 준다는 뜻이다. 그러나 백서본은 왕필의 "대(貸)" 대신 "시(始)" 자를 쓰고 있다. '오직 도만이 장 시작하고 잘 끝낼 수 있다'로 앍어야 한다. 많은 이들은 백서본을 택한다. '그러므로 오직 도는 내면 의식과 하나 됨으로 바르게(선) 시작하는 것이며, 또한 내면과의 하나 됨을 바르게 이루는 것이다'로 본다. 도올 김용옥은 마지막의 "부유도(夫唯道) 선대차성(善貸且成)"을 "만물의 끊임 없는 생화(生化) 과정과 도의 생생무이(生生無已)의 생명력을 시적으로 표현한 명언"이라 했다.

어제부터 다시 서울 강의를 갔다. 12번을 올라가야 한다. 오늘 아침 사진은 어제 서울에서 찍은 것이다. 역시 사람이 많다. 오늘 아침은 짧은 시 하나를 공유한다. 제목이 <쓰레기>이다. 시인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 존재다. 김선태 시인은 쓰레기들의 외침을 듣는다. “버린 놈들”, 즉 인간이 쓰레기라는 것이다. 문제는, 쓰레기가 버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쓰레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 몸속으로 돌아온다. 지금 우리가 겪는 기후위기 원인은 그동안 배출된 온실가스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버리는 쓰레기로 인한 피해 또한 미래세대가 감수해야 할 것이다.

쓰레기/김선태

쓰레기를 주우러 갔는데
쓰레기들이 모여 외쳤다.

버린 놈들이 쓰레기라고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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