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사물의 한 단면만을 보고 거기에 집착하는 옹고집과 다툼을 버려야 한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10. 9. 21:16

3년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2년 10월 7일)

10월 5일에 이어 노자 <<도덕경>> 제41장 읽기를 이어간다. 이 장에서 주목할 것은 도는 너무나 크고 모양이 없기 때문에 분별 적인 앎으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것이므로 의식 내면과 하나가 되는 것으로 도에 이룰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거다. 본문을 읽어가며 정밀 독해를 한다.

故建言有之(고건언유지) : 그러니 예부터 전해 오는 말에 다음과 같은 말들이 있다.
1. 明道若昧(명도약매) : 밝은 도는 어두운 것 같고
2. 進道若退(진도약퇴) :  도를 향해 나아가는 길은 물러나는 것 같고 (또는 앞선 도는 뒤처진 것 같고)
3. 夷道若纇(이도약뢰) : 평탄한 길은 울퉁불퉁한 것 같고
4. 上德若谷(상덕약곡) : 높은 덕은 텅 빈 골짜기처럼 보이고
5. 大白若辱(대백약욕) : 큰 결백은 욕된 것 같고 (아주 깨끗한 것은 더러운 것처럼 보이고)
6. 廣德若不足(광덕약부족) : 넓은 덕은 부족한 것 같고
7. 建德若偸(건덕약투) : 굳건한 덕은 엷은 것 같고(홀로 서 있는 강건한 덕은 유약하여 기대 있는 것 같고)
8. 質眞若渝(질진약투) : 질박한 진리는 변덕스러워 보인다.

8개의 4자 성어가 흥미롭다. 한 편의 시와 같다. 이건 노자 자신이 발명한 것이 아니라, 그 시대에 내려오던 말, "건언(建言)"으로서 전하는 것이다. "건언"이란 속담 같은 것으로 뿌리뽑을 수 없는 가치가 있는 시대의 금언이라는 뜻이다. 역설(逆說, Paradox)이다. 의미가 모순되고 이치에 맞지 않는 표현을 말한다.  문학에서는 모순을 이용해 어떤 중요한 사실이나 진리를 담는 표현 방법을 말하기도 한다.

이는 사물의 한 단면만을 보고 거기에 집착하는 옹고집과 다툼을 버려야 한다는 거다. 사물을 통째로 보는 것이 '하늘의 빛에 비추어 보는 것, 즉 조지어천(照之於天)이고, 도의 지도리(도추道樞, pivot, still point)에서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실재를 있는 그대로 그렇다 함(인시,因是)이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마음(명,明)이다. 중세의 한철학자가 말한 바에 따르면, 반대의 일치, 양극의 조화(coincidentia oppositorun)이다. 실재를 있는 그대로 그렇다 함이란 실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다. 정말 그런 것, 실재 그대로 그렇다 함이란 영어로 reality, 산스크리트어의 taahta(정말 그러함, 진여), 영어의 let it be 같은 단어를 연상한다. 모두 실재를 있는 그대로 보았기에 그것을 인위적으로 좌지우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무위자연(無爲自然)"과 통하는 마음의 태도이다. 계절의 순환과 풀의 자라남에는 사람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냥 두어도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이와 같은 '무위', '아무 것도 하지 않음', 무심함으로 이 세계이 변화에 대처함이 노자가 말하는 '무위'라 본다.

1. 明道若昧(명도약매): 밝은 도는 어두워 보이는 것 같다.
<<도덕경>> 제28장이 소환된다. 이장은 "복귀어영아(復歸於嬰兒)" → "복귀어무극(復歸於無極)" → 복귀어박(復歸於樸)으로 3 단락이었다. 여기서 영어는 어린아이, 무극은 극이 없는 질박함, 박은 통나무이다. 그리고 웅(雄, 수컷)과 자(雌, 암컷), 백(白)과 흑(黑), 영(榮)과 욕(辱)의 양면에서 화려한 전자의 덕성을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후자의 초라하고 어둡고 억울한 자세를 지킬 줄 아는 역량을 가진 사람이 도를 아는 사람이라는 거다. 그리고 빛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빛을 발하지 않는 '광이불요(光而不燿, 제58장)'의 고차원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빛나도 눈부시지는 말라"는 거다.

2. 進道若退(진도약퇴) : 도를 향해서 나아가는 것은 마치 물러나는 것 같다.
도, 즉 근원을 향해서 깊이 들어가는 것은 마치 점점 도로부터 멀어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는 거다. 그러나 왕필은 <<도덕경>> 제7장의 다음 내용을 주로 달았다. "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시이성인후기신이신선) 外其身而身存(외기신이신존) 非以其無私邪(비이기무사야) 故能成其私(고능성기사)." 이 말은 '그러므로 성인은 몸을 뒤에 두기에 앞설 수 있고, 몸을 밖에 둠으로써 몸을 보존한다. 사사로운 마음을 앞세우지 않기에, 능히 자신을 이룰 수 있다'는 거다. 다르게 해석해 본다. '성인은 그 자연의 이치를 본받아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러나 오히려 앞서게 된다. 그 자신을 도외시 하지만 오히려 자신이 보존된다. 그것은 자신의 사적인 기준이나 의욕을 버린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능히 그 자신을 완성할 수 있다.'는 거다. 노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바로 후기신(後基身)이나 외기신(外基身) 혹은 무사(無私)가 아니라, 바로 신선(身先)이나 신존(身存) 그리고 성기사(成基私)이다. '후기신'이나' 외기신' 혹은 '무사'는 '신선'이나 '신존' 그리고 '성기사'를 차지하기 위한 조건으로 기능할 뿐이다. 노자적 삶은 소극적이고 모든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는 태도가 아니라, 자신의 몸을 앞서게 하기 위하여 그 몸을 뒤로 하는 적극적인 삶의 자세이다.

3. 夷道若纇(이도약뢰) : 평탄한 길은 울퉁불퉁한 것 같다.
여기서 "이(夷)"는 '평평하다', '오랑캐'란 뜻이고, "뢰(纇)"는 '엉크러지다', 치우치다', '흠집나다', '실마디(실이 매듭되어진 모양)'란 뜻으로 '불규칙하다, 울퉁불퉁하다'로 읽을 수 있다. '도는 원래 전체가 평평하게 같은 하나이지만, 보통 사람의 눈에는 온각 경계가 있는 거처럼, 모든 개성 있는 개체가 별도로 각기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거처럼 보이는 것 같다'는 거다. 도를 깨친 사람은 자기 의도 없이 '있는 그대로'로 자연에 맡기는 무위적인 언행을 한다. 그러므로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경계를 그대로 따라다니며 보통 속세 사람의 언행과 다름 없이 보인다는 말이다.

4. 上德若谷(상덕약곡) : 높은 덕은 텅 빈 골짜기처럼 낮아 보이는 것 같다.
여기서 "곡(谷)"은 '텅 빈 것'이라기 보다는 '가장 낮아서 모든 것을 수용한다'는 의미로 읽고 싶다. 제38장의 다음 문장이 생각난다. "上德不德(상덕부덕) 是以有德(시이유덕)". '높은 덕은 베푼 덕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덕이 있다'는 거다. "상덕(上德)"은 자기가 하는 훌륭한 일이 덕인줄도 모르고, 덕이 쌓이는지 없어지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자연스럽게 구김없이 행동하는 사람이다. 그래 정말로 덕이 있는 사람이다.

5. 大白若辱(대백약욕) : 지극히 순수한 마음은 마치 오염되어 불순해 보이는 듯하다.
여기서 "백(白)"은 '순수하다'는 거고, "욕(辱)"은 '불순하다', '치욕', 수치'라는 말이다. 성인은 그 마음과 행동이 경계가 없이 자유롭기 때문에, 조건 화된 속세인이 볼 때에는 그 넓고 순수한 마음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 잣대로 불순하게 보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제28장의 "知其白(지기백) 守其黑(수기흑) 爲天下式(위천하식)"이 생각난다. 이 말은 '흰 것을 알면서 검은 것을 유지하면 천하의 본보기가 된다'는 거다. 백을 알고 흑을 지킨다. 백과 흑은 인간사의 시비와 만물의 변하는 이치를 말하는데, 이것을 천하의 기본으로 삼고 따른다는 거다. 알고 지키는 것은 중요하다. 바로 수행을 말한다. 알고만 있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 이치를 알고 따르는 것(지키는 것)은 수행을 함을 말한다. 수행은 삶을 말한다. 다음과 같이 읽을 수도 있다. 밝고 명확함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고, 어둡고 아득함을 지켜 나가면 온 천하가 본받는 사표가 된다는 말이다.

6. 廣德若不足(광덕약부족) : 광대하게 넓은 덕은 마치 모자란 듯이 보이는 것 같다.
넓은 덕, 아니 자연은 개인적인 관점에서 보면 마치 무언가 모자란 바보 같거나 감정이 결여된 비인간적으로 여겨지는 것과 같다. 그러나 성인은 남 탓하지 않는다. 내 뜻대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아도, 세상 탓하지 않는다. 다 "도(道)"의 움직임으로 받아들인다.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 하지 않았는가? "천지불인"은 천지의 운행이나 활동, 그 모든 것이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감이나 바램과 무관하게 그 나름대로의 생성법칙과 조화에 따라 이행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좀 야속하고 때로는 무자비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과 땅 그리고 성인들로 대표되는 도(道)를 인간적 감정에 좌우되어 누구에게는 햇빛을 더 주고, 누구에게는 덜 주는 따위의 일을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마치 자연의 작용은 때에 따라 특정 지역에 홍수나 지진 등 자연재해를 주는 것 같이 여겨지지만, 결국은 인간 삶의 전체적인 환경을 더욱 생기있게 변회시켜주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7. 建德若偸(건덕약투) : 굳건한 덕은 엷은 것 같다. 홀로 서 있는 강건한 덕은 유약하여 기대 있는 것 같다. 당당하게 내세우는 덕은 마치 교활한 것 같다. 건실한 덕은 게으른 듯하다.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 여기서 "건(建)"은 '세우다', '일으키다', '당당하다'는 뜻이, "투(偸)"는 '탐내다', '교활하다', '훔치다', '몰래 숨기다'는 뜻이다. 건실한 덕을 보이는 사람은 덕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마치 제 잘난 척하고 교활해 보일 수 있다는 거다.

8. 質眞若渝(질진약투) : 질박한 진리는 변덕스러워 보인다. 정말 참된 것은 변질된 듯하다. 바탕이 참되면 마치 움직이는 듯이 보이는 것 같다.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  여기서 "질(質)"은 '바탕', '본질'이란 뜻이고, "투(渝)"는 '변하다', '달라지다'란 뜻이다.  절대 바탕은 움직임이 전혀 없는 것이고,깨닫지 못한 속세인에게는 그 실체가 보이지 않고 알 수 없는 것이므로, 마치 그것이 변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거다.

여기서 멈추고, 나머지 사자성어는 내일 아침으로 넘긴다. 왜냐하면 오늘부터 서울로 12주 동안 강의를 가야 하기 때문이다. 서울 목동에 있는 <양천구 평생학습관>의 "양천 인문학 아카데미"에서 <아는 만큼 즐거운 와인의 세계>를 강의한다. 무궁화호를 타고 가는 기차여행을 동시에 즐긴다. 오늘아침 시는 슬픈 이야기를 역설적으로 잘 풀고 있어, 좀 길지만 공유한다. 아침 사진은 대전 시립 미술관에서 찍은 거다.

참 빨랐지 그 양반/이정록

신랑이라고 거드는 게 아녀
그 양반 빠른 거야 근동 사람들이 다 알았지
면내에서 오토바이도 그중 먼저 샀고
달리기를 잘해서 군수한테 송아지도 탔으니까
죽는 거까지 남보다 앞선 게 섭섭하지만
어쩔 거여
박복한 팔자 탓이지

읍내 양지다방에서 맞선 보던 날
나는 사카린도 안 넣었는데
그 뜨건 커피를 단숨에 털어 넣더라니까
그러더니 오토바이에 시동부터 걸더라고
번갯불에 도롱이 말릴 양반이었지
겨우 이름 석자 물어 본 게 단데 말이여
그래서 저 남자가 날 퇴짜 놓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어서 타라는 거여
망설이고 있으니까
번쩍 안아서 태우더라고
뱃살이며 가슴이 출렁출렁하데
처녀적에도 내가 좀 푸짐했거든
월산 뒷덜미로 몰고 가더니
밀밭에다 오토바이를 팽개치더라고
자갈길에 젖가슴이 치근대니까
피가 쏠렸던가 봐
치마가 훌러덩 뒤집혀
얼굴을 덮더라고
그 순간 이게 이녁의 운명이구나 싶었지
부끄러워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정말 빠르더라고
외마디 비명 한번에 끝장이 났다니까
꽃무늬 치마를 입은 게 다행이었지
풀물 핏물 찍어내며 훌쩍거리고 있으니까
먼 산에다 대고 그러는 거여
시집가려고 나온 거 아녔냐고
눈물 닦고 훔쳐보니까 불한당 같은 불곰 한 마리가 밀 이삭만 씹고 있더라니까
내 인생을 통째로 넘어뜨린
그 어마어마한 역사가 한순간에 끝장나다니
하늘이 밀밭처럼 노랗더라니까
내 매무새가 꼭 누룩에 빠진 흰 쌀밥 같았지

얼마나 빨랐던지 그때까지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더라니까
죽을 때까지 그 버릇 못 고치고 갔어
덕분에 그 양반 바람 한번 안 피웠어
가정용도 안되는 걸
어디 가서 상업적으로 써먹겠어
정말 날랜 양반이었지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인문운동가_박한표 #우리마을대학 #유성관광두레 #사진하나_시하나 #이정록 #도덕경_41장 #도의_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