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은/그래도 산다는 것이다.
3년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2년 10월 4일)
어제 우리는 노자 <<도덕경>> 제 25장에 나오는, "字之曰道, 强爲之名曰大. 大曰逝, 逝曰遠, 遠曰反(자지왈도, 강위지명왈대. 대왈서, 서왈원, 원왈반)" 이야기를 하다가 멈추었다, 이 말의 뜻은 '임시로 이름 지어 도라 하고, 억지로 이름 붙여 크다 하자. 이 큰 것은 크기 때문에 흘러 움직이고 흘러 움직이면 끝이 안 보이는 넓이를 갖게 되고 멀고 먼 넓이를 가지면 또 본래의 근원으로 되돌아간다'는 거다. 예컨대, '어머니'라는 것은 상징이지, 그 무엇의 이름 자체는 아니다. <<도덕경>> 제1장에서 말한 것처럼, 이것은 '이름 붙일 수 없는 무엇(無名)'이다. 절대적인 것은 어떤 이름이나 범주로 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름이 아니라 뭔가 그냥 덧붙여 보는 문자(字)로 말하면 '도(道, Dao)'라 할 수 있다는 거다. 우리 말로 어차피 움직이니까 '길'이라는 거다. 그러니까 이제 제1장의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가 새롭게 이해된다. 이 이름 없는 카오스의 도를 도라고 부른다는 것, 즉 언어의 못을 입힌다는 것이 허용될 수 없다는 거다. 그러나 하는 수 없이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 부를 이름이 필요하니 그것을 억지로 글자의 옷을 입힌 방편에 불과하다는 거다. 왕필의 주를 공유한다. "도라고 언어화한 것은 만물이 그 어느 것도 이 길을 통하지 아니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이 도라는 이름은 혼성한 가운데서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 중에서 최대의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强爲之名曰大(강위지명왈대)"라 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고 구태여 뭔가로 표현한다면 '크다'고 말해 보자는 거다. 여기서 '크다'는 어떤 물체의 크기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최대치를 일컫는 것이며 최대라는 것은 혜시의 말대로 "지대무외(至大無外)"이므로 '밖'이 없는 전체일 수 밖에 없다. 이 카오스의 도는 전체이기 때문에, 혼성된 것이며 잡다한 것이기 때문에, 획일적인 일자가 아니기 때문에 매우 역동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움직일 수밖에 없다. 갈 수밖에 없다(大曰逝). 간다는 것은 나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逝曰遠). 멀어진다는 것은 나로부터 반대의 성격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빛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면 어둠의 성격을 지니게 되고, 선(善)으로부터 멀어 지게 되면 불선(不善)의 성격을 지니게 되고, 아름다움으로 부터 멀어지게 되면 추함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 제2장에서 노자는 말하였다. 아름다움은 그 것이 곧 추함이요, 선함은 그것이 곧 불선이다. 즉 반대되는 사태는 또 다시 반대되는 사태로 복귀하게 된다. 빛이 전적으로 부정되는 어둠은 없고, 어둠이 전적으로 부정되는 빛이 없다. 빛 속에는 어둠이 내재하게 마련이고, 어둠 속에도 빛이 있게 마련이다. 흰색 속에도 까망이 있고, 까망 속에도 흰색이 있다.
그리고 먼 곳까지 끝 없이 뻗어 간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자기에게 되돌아옴을 뜻한다(遠曰反). 여기서 '반(反)'은 '반대'의 뜻을 갖는 동시에, '돌아옴'을 의미하는 '반(返)'이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그러니까 반(反)은 반(返)이다. 반대 되는 부사적 상태는 서로가 서로에게 돌아간다. 노자가 말하는 우주는 유기체적 우주이기 때문에 주기성과 리듬성을 갖는다. 그래야만 조화로운 전체가 유지된다. 절대적이고, 전일적이고, 무소 부재하므로 아무리 뻗어 나가도 결국 그 자체 안에서 움직인다. 우주의 확대와 축소의 순한 과정을 이야기 하고 있는 거다. 아무튼 여기서 강조하려는 것은 도의 정적 존재성 측면보다 역동적 생성의 면임은 분명하다. 이런 순환을 "大曰逝, 逝曰遠, 遠曰反(대왈서, 서왈원, 원왈반)"라 표현했다. 그러니 사는 일에 너무 힘들어 할 필요 없다. 다 순환한다.
이 말을 줄여 "대서원반(大逝遠反)"이라고 한다. '사물은 커지고, 확대되고, 결국 다시 돌아온다'는 거다. 여기서 헤겔의 정반합(正反合)의 논리가 겹쳐진다. 세상은 상식(正)과 상식을 부정하는 반대(反)의 원리와 갈등을 통해 새로운 상식(合)으로 전환한다는 헤겔 철학 말이다. 상식과 상식을 깨는 반대의 논리, 그것을 통해 새로운 상식을 만들어 내는 과정, 노자 역시 당시 상식을 깨고 새로운 세상을 세우고자 했다.
이런 생각으로 제40장을 다시 읽어 본다.
反者 道之動(반자도지동) : 되돌아감이 도의 움직임이다
弱者 道之用(약자도지용) : 약함이 도의 쓰임이다
天下萬物生於有(천하만물생어유) : 천하 만물은 유에서 생겨나고
有生於無(유생어무) : 유는 무에서 생겨난다.
'도'는 어디로 되돌아가는가? '도'는 모든 것이 되돌아가는 움직임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스스로 모든 것을 찾아가기도 한다. 모든 것을 찾아 감으로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고, 나아가 그 존재들로 하여금 각자의 특성을 가진 개체로 존재하게 해준다. '도'가 이렇게 만물에 찾아가 만물 속에서 작용할 때, 그리고 다시 만물과 더불어 그 원초의 자리로 돌아갈 때 그것은 부드럽고 은근한 모습으로 움직인다. 벼 이삭이 자라는 것을 보면, 싹이 나고 잎이 나고 이삭이 패고 열매가 영글어가고 다시 누렇게 시드는 식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청천벽력처럼 갑작스럽고 요란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쉼없이 이루어진다. 이처럼 '도'의 작용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정도로 보이지 않고 뒤에서 은은하게 일하는 '약함'을 그 특성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 약한 듯한 움직임의 작용에서 벗어날 있는 것은 세상에 없다. 어느 누구도 벼 이삭을 빨리 자라게 할 수 없다. 결국 우리가 할 일은 이와 같이 약한 듯 은근하게 돌아가는 '도'의 리듬에 맞추어 함께 돌며 의연하고 늠름하게 살아 가는 거다.
이와 다르게 읽는 사람도 있다. 어떤 상황이 극에 이르면 반전(反轉)하여 거꾸로 전개 된다는 이런 우주의 존재 방식이 노자가 말하는 "반(反)"이라는 거다. 달이 가득 차면 어느 순간 '거꾸로' 기울어지고, 작아진 달은 다시 '거꾸로' 차오른다. 나를 낮추면 '거꾸로' 올라가고, 뒤로 물러서면 '거꾸로' 앞에 서게 된다. '거꾸로(反)'가 도의 운동 방식이라는 거다. 우주의 운행 원리는 '거꾸로'라는 거다. 인간도 이런 반전 원리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거다. 같은 이야기지만, 약간의 뉘앙스가 있다. 그리고 여기서 "약(弱)한 것이 '도'의 운영 방식(用)"이라고 노자가 말하는 것은 강하고 센 것보다는 약한 것이 반전을 격발 시킨다는 것으로 본다. 강한 것은 결국 부러지고 고꾸라지니, 약하고 부드러운 것이 오랫동안 살아남는다. "약"은 부드러움(柔), 비움(虛), 낮춤(下)을 총칭하는 말이라는 거다.
"방하착(放下着)"이라는 불교 용어를 소환한다. 이 말은 '내려놓아라, 내버려라'라는 말로 마음 속의 집착을 내려놓으라는 명령어이다. 마음속에 한 생각도 지니지 말고 텅 빈 허공처럼 유지하라는 뜻이다. "착(着)"은 동사 뒤에 붙어서 명령이나 부탁을 강조하는 어조사이기 때문이다. 나는 방하착, 다시 내려놓고, 내버리리라.나의 집착을. 오늘도 오차 없이 내 일상을 지배하고, 지금-여기서 나의 행복을 찾아야 한다.
태풍이 지나가면 '거꾸로' 바다는 평온해지고, 바람이 심하게 불면 '거꾸로' 공가 맑아진다. 살면서, 나 자신이 어느 정점에 이르렀을 때 '거꾸로' 우리는 더 낮추고 겸손해야 한다. 그게 어제와 오늘 살펴 본 '도'이 운용 방식에 가까운 삶의 방식이다. 어떤 것이든 '거꾸로' 되돌리는 속성이 있음을 아는 것이 자유롭고 지혜로운 사람이다.
고미숙에 의하면, 말장난 같지만, '산다'는 것은 '선다'는 것이라 했다. (산다=선다) 우리는 두 발로 서는 데서부터 삶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의학에서 직립에 필요한 척추를 '럼버커브'라 한다. 이건 태아가 선천적으로 가지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터득하는 능력이라 한다. 서는 직립과 함께 사람은 손이 해방된다. 그러니까 선다는 것은 발은 땅을 디디고 눈은 하늘을 응시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발에서 벗어난 두 손이 하는 일은 무궁무진해 진다. 여기서부터 사람이 짐승과 달라지는 출발점이다.
노자 <<도덕경>>을 읽으며, 오늘 아침 시를 다시 읽었다. "산다는 것은/그래도 산다는 것이다." 우주 속에는 "반(反)"이 있으니까. '거꾸로'가 작동하니까.
산다는 것은/오세영
산다는 것은
눈동자에 영롱한 진주 한 알을
키우는 일이다.
땀과 눈물로 일군 하늘 밭에서
별 하나를 따는 일이다.
산다는 것은
가슴에 새 한 마리를 안아
기르는 일이다.
어느 가장 어두운 날 새벽
미명(未明)의 하늘을 열고 그 새
멀리 보내는 일이다.
산다는 것은
손 안에 꽃 한 송이를 남몰래
가꾸는 일이다.
그 꽃 시나브로 진 뒤 빈주먹으로
향기만을 가만히 쥐어 보는 일이다.
산다는 것은
그래도 산다는 것이다.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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