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사회는 하나의 무대이고 인간은 각자의 삶을 연기하는 배우가 되는 셈이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9. 27. 20:12

3년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2년 9월 27일)

대통령이 미국 순방에서 자신을 수행하던 측근들에게 언급한 "새끼와 쪽"의 대상이 누군인지에 대해 설전이 오가고 있다. 어쩌냐? 이미 내뱉은 발언을 주워담을 수도 없고, 가능하다면 빨리 인정하고 수습하는 게 최선이지 않았을까? 자기가 보지 않은 사실을 상상하는 건 자유이지만, 그 상상을 사실처럼 남 앞에서 떠들면 '뇌피셜'이 된다. '뇌피셜'이란 뇌와 오피셜(official, 공식 의견)의 합성어로 '자기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 사실이나 검증된 것 마냥 말하는 행위'를 뜻하는 신조어이다. 자신의 뇌 세포들만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생각이라는 뜻이다. 이건 정말 위험한 발언이다. 내 아버지가 그러셨다. 실제 보지 않고, 늘 상상으로 건너 집다가 '팔이 부러지셨다'. 이건 편견이고 아집이기도 하다.

그리고 깨끗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빠르게 사과했으면 초기에 불길이 잡혀 오히려 진화에 도움이 됐을 것이다. 지금 세상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사물과 사물조차도 연결되어 있고 연결된 모든 것에는 CCTV가 돌아가고 있는 모습이다. 따라서 우리들의 모든 행동은 사람들을 통해 직접 목격되는 것을 넘어서 사물, 사람, 관계를 통해서 모두 적나라하게 촬영된다. 초연결 시대이다. 누군가는 CCTV를 켜고 24 시간 항상 지켜보고 있는 시대이다.

윤정구 교수의 담벼락에서 알게 되었다. "리더십에서도 진정성(authenticity)이 아닌 연기력(performance)으로 승부할 수 있었던 시대가 있었다. 리더의 연기력은 공연이 이뤄지는 무대 공간과 공연이 준비되는 무대 뒤 공간이 명확하게 구별되던 시대의 전유물이다." 그리고 윤 교수는 사회를 무대에, 개인을 무대위에서 연기하는 배우로 비유했던 사회학자 어빙 고프만(Erving Goffman)의 주장을 소개하였다.

고프만은 <<일상 생활에서의 자아표현>>이라는 책을 통해 인생은 한 편의 연극이라는 통속적인 비유를 사회이론으로 만들어냈다. 즉 사회는 하나의 무대이고 인간은 각자의 삶을 연기하는 배우가 되는 셈이다. 이 건 초연결 사회가 시작되기 이전의 연구이다. 윤 교수의 설명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고프만은 "얼굴(쪽) 작업(face work)이 만들어지는 무대의 다른 공간을 설명한다. 하나는 무대 뒤 사적 분장실 공간이다. 이 공간은 연기를 위해 사용될 얼굴(쪽)을 만들어내기 위해 분장하는 공간이다. 다른 공간은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지는 공식적 무대다. 무대는 만들어진 얼굴(쪽)을 연기로 사고파는 공식적 공간이다."

고프만은 세상을 이런 이원적 연극 무대가 확장되어 돌아가는 것을 설명했다. 그의 '연극이론'에 따르면, "세상(직장, 일터)은 역할 연기를 통해 공개적으로 쪽을 사고 파는 무대 공간이다. 집은 팔 쪽을 준비하기 위해 분장하는 무대 뒤쪽의 사적 공간이다. 직장과 사회에서의 연기를 위해 사람들은 사적 공간인 집에서 나름의 분장을 하고 집을 나선다."(윤정구) 그런데 '쪽팔림'이란 무대에서 연기를 통해 팔아야 할 포장된 '쪽'이 의도한 대로 제대로 팔리지 않고 분장이 해체된 무대 뒤의 사적 '쪽'이 의도적이지 않게 공개되는 것을  뜻한다. 가면이 아닌 사적 '맨 얼굴'이 공개된 것이다. 이런 경우 우리는 '쪽 팔린다' 또 '체면이 깎였다'고 말한다.

고프만의 설명이 초연결 시대에는 안 통한다. 윤 교수의 설명을 공유한다. "초연결 시대의 본질은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이분법이 해체되는 것이다. 초연결 시대는 연기보다는 앞모습과 뒷모습이 같음을 지칭하는 진정성이 시대의 화두이다. 마케팅 광고도 연기에 능한 비싼 연예인을 통한 화려한 포장이 아니라, 진솔한 사용자의 체험을 전달하는 광고가 대세다."

내러티브라는 말이 요즈음의 화두이다. 트랜드를 연구하는 김난도 교수의 한 인터뷰에서 그가 이렇게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내러티브 자본’도 결국 내일을 빙자한 거품을 걷어내고 지금, 이 순간의 진정성에 집중하겠다는 욕구로 읽힌다"고 기자가 물으니,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맞아요. 예전엔 스토리텔링이 마케팅이었지만 이젠 서사의 진정성을 파고들어가죠. 가령 영화 <ET>에 M&M 초콜릿이 나왔다면 이제 소비자는 궁금해해요. 그 회사는 우주개발에 투자했나? CEO가 양성 평등을 말하면 이사회에 여성 임원은 몇 명인가? 상품의 스토리나 CEO의 말보다 그 회사가 가진 제품과 경영의 진정성을 캐내죠. 그 진정성이 내러티브로 확인되면, 소비자는 제품을 사고 주식을 사요. 내러티브는 단순 스토리와는 달라요. 세계관의 문제이고 진정성의 문제죠. 개인도 기업도 결국 자기 정체성의 내러티브가 중요한 자본이 되고 있어요.”

네러티브 자본이 없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절대갑으로만 살아온 이들의 무개념과 서민들보다는 화려한 자리에만 관심을 보이는 권위적 정신 세계의 단면이 만들어내는 것 때문이다. 한 예를 들면, 여왕 조문 행사의 지각을 보면 알 수 있다. 다른 정상들처럼 서민들과 줄 서서 걸어서라도 가는 길은 귀찮아 가지 않고, 리셉션 같은 화려한 자리에만 들리는 모습 등에서 기본 정신 자세를 알 수 있다. 그런 처세로 이룬 성공일 것이다. 그의 부인 김거니도 마찬가지이다. 논문 표절부터 살아온 삶 거의가 "연극성 인격"이라 할 만큼 "진정한 자신"이라고는 없는 여성이다. 그래 그녀는 실제로 흉내만 낸다.

나는 여기서 진정성을 불교에서 말하는 "본래면목(本來面目, 맨 얼굴, 진짜 모습)"으로 "연기력"은 "가면"으로 바꾸어 보았다. 그러면서 다음 질문을 해 보았다. 왜 우리는 가면(페르소나)을 쓰는가? 가면을 쓰지 않았을 때 발생할 수 도 있을 피해를 우리는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당연히 가면을 쓰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 당당한 주인이라 기보다는 외적인 권위나 가치평가를 내면 화한 노예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가면을 라틴어로 ‘페르소나’라고 부르며 인간이란 영어단어 'person'이 이 단어에서 파생했다.

문제는 허영(虛榮)이다. 일반적으로 허영은 자신의 삶을 긍정하지 못할 때 생겨난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긍정하지 못하는 순간, 인간은 외적인 무엇인가를 통해서라도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으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권력과 지위, 돈 그리고 학위 따위에 목을 맨다. 스스로 주인이 되려는 깨달음을 수행하는 사람은 당연히 허영을 버리는 ‘마음 근육 훈련’을 해야 한다. 이러한 수행은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 그러니까 ‘원래 맨얼굴’을 찾아야 한다. 그러니까 페르소나(고대 그리스나 로마 시절 연극배우들이 연기를 할 때 사용하던 가면)를 벗고 맨 얼굴을 직시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가르침으로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 한다. “자신의 마음을 바로 가리키며, 자신의 불성을 보면 부처가 된다”는 말이다. 여기서 ‘자신의 불성(佛性)’이란 어떤 페르소나(가면)도 착용하지 않은 마음이다. 그러니까 위에서 말한 본래면목(맨 얼굴)이란 자신의 불성, 아니 자신의 마음인 것이다. 그리고 좀 더 중요한 것이 위의 가르침에서 직지(直指)나 견(見)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신의 마음이나 자신의 불성을 가리고 있는 두터운 페르소나를 제거하려는 치열한 노력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근기(根氣)라는 말이 있는데, '근본이 되는 힘'이라는 말이다. 이 근기가 두텁지 못한 사람, 중근기 사람들은 심고 가꾸는 일을 열심히 하지 않고, 수확에만 마음이 가 있는 사람이다. 끝내 그런 이들은 결과 따위에는 연연해 하지 않는다고 하며, 도량이 넓은 척할 뿐이다. 우리는 근대 이후 '중근기의 병자'를 대량 생산하는 체제 속에서 살아 왔다. 교육의 확대와 지식산업의 발달, 특히 디지털 정보 기술의 극대화로 하근기에 멈춘 인구가 대폭 줄어든 대신, 중근기 고개를 넘어 상근기로 진급하는 공부는 공식적인 교육과정이나 교육 이념에서 아예 자취를 감춘 형국이다. 이게 문제이다. 그래 나는 인문 운동가로 매일 <인문 일기>써서 가급적 많은 사람들과 공유한다. 중근기 고개를 넘어 상근기로 건너가는 공부를 하자는 거다. 자기 몸과 마음을 닦아 인간 세상을 평안하게 하는 공부, 스스로 부처가 되어 중생을 건지는 공부, 또는 하느님을 공경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공부는 진지하게 하면 할수록 손해 보게 되어 있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공부하며 늘 배워야 한다. 그렇게 자신의 진정성을 되찾아야 한다.

이젠 길은 하나이다. 깨끗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빠르게 사과하는 거다. 왜냐하면, "진정성 있는 리더는 실수하는 상황이 도래하면 먼저 자복하고 사과한다" 윤정구 교수의 주장이다. "진정성 있는 사람을 길을 잃으면 길을 잃기 전의 순수한 의도가 작동되던 초기 상황으로 되돌아가서 거기서 다시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런 초기의 순수한 의도가 없는 사람들은 길을 잃으면 길을 잃는 지점에서 다시 길을 찾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작전을 동원해서 우왕좌왕하다 완전히 길을 잃는다. 공공의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과 명예라는 숨겨진 의도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이다."

'무신불립(無信不立)'이라는 말이 있다. '신뢰가 없으면 아무 것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뜻이다. 신뢰의 원천은 진정성이다. 리더가 진정성을 포기했다면 신뢰 없이 정치하겠다는 뜻이다. 민생을 핑계로 물없이 배를 띄우겠다는 뜻이다.

긴 글을 마친다. 우리는 타인의 삶에 끼어들 권리가 없다. 그러나 정치는 우리의 삶에 대단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관심을 두는 거다. 정치는 우리들에게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정해준다. 신체를 구속할 수도 있으며, 돈도 걷어가며, 군대로 데려가기도 한다. 정치는 우리들의 '정신 세계'도 지배한다. 정치에 아무리 냉소적일지라도 정치는 우리들의 삶으로부터 단 1cm도 떨어지지 않는다. 원하지 않더라도 정치는 우리의 삶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며 지배하기 때문이다. 체 게바라처럼, 죽어야 산다.

나의 삶/체 게바라

내 나이 15살 때
나는
무엇을 위해 죽어야 하는 가를 깊이 고민했다
그리고 그 죽음조차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의 이상을 찾게 된다면,
나는 비로소 기꺼이 목숨을 바칠 것을 결심했다

먼저 나는
가장 품위 있게 죽을 수 있는 방법부터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문득,
잭 런던이 쓴 옛날이야기가 떠올랐다
죽음에 임박한 주인공이
마음속으로
차가운 알래스카의 황야 같은 곳에서
혼자 나무에 기댄 채
외로이 죽어 가기로 결심한다는 이야기였다
그것이 내가 생각한 유일한 죽음의 모습이었다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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