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질서와 혼돈'의 이분법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9. 27. 19:46

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1년 9월 27일)

성산포 바다는 아니지만, 사계 해수욕장의 형제 바위를 실컷 보고 왔다. 오늘로 제주도 사진은 마지막이다. 그리고 이생진 시인의 연작시도 마친다.

어제 <인문 일기> 아담과 하와(이브)가 에덴(혹은 파라다이스)에 처음 놓였을 때 세상에 대한 의식도 없고 자의식도 없었다는 점을 나는 말하였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 인류 최초의 부모는 발가벗고 있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게 어떤 의미인지도 모른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우리들의 원초적인 부모는 뱀의 유혹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는 열매를 먹었고,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다. 그리고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 그 중 첫 번째가 자신들이 발가벗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창세기> 제3장이다. 뱀이 에덴동산에 있던 이유를, 우리가 읽고 있는 조던 B. 피터슨의 <<12가지 인생의 법칙(12 rules for life)>>에 의하면, 인간의 경험을 특징 짓는 '질서와 혼돈'의 이분법을 부분적으로 반영한 것으로 설명했다. 파라다이스가 삶의 질서라면, 뱀은 혼돈의 역할을 맡은 것이다. 모든 것이 차분하게 정돈된 세계에서 우리가 모르는 것, 혁명적인 것이 갑자기 나타날 가능성을 뜻한다는 것이다

사실 혼돈은 항상 내부로 슬금슬금 들어온다.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곳에도 뱀은 숨어 있다. 지금 이 순간도 우리는 안전하지 않다. 적은 항상 우리 주변에 있고, 그 적이 바로 우리 자신일 수도 있다. 배이 우리  모두의 영혼 속에서 똬리를 틀고 있을 수 있다.

아무리 거대한 장벽을 쌓아도 영원히 예측할 수 있고 안전한 현실 세계를 만들지는 못한다. 모든 위험 요소를 꼼꼼하게 제거하더라도 그중 일부는 어는 순간 다시 생겨난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뱀은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아무리 근면하고 성실한 부모라도 자식을 완벽하게 보호할 수 없다. 오히려 부모의 극단적인 과잉보호는 자식의 삶에 더 끔찍한 문젯거리가 된다. 그러니 우리 품 안의 존재는 보호하는 것보다 강하게 키우는 편이 훨씬 낫다.

어쨌든 <창세기> 이야기는 에덴동산에 뱀이 살았고, 뱀은 '영악한 동물'이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첫 번째 질문은 왜 뱀이 아담이 아닌 이브를 속였을까? 지금 내가 읽고 있는 책의 저자 피터슨에 의하면, 뱀이 이브의 어린 자식을 잡아먹으려 했다는 것이다. 그래 여자인 이브가 뱀의 말을 들어야 할 이유라는 것이다. 사실 현대 인간 사회에서도 이브의 딸들, 여성들이 더 방어적이고 자의식이 강하며 조심스럽고 예민하다.

뱀은 이브에게 금지된 열매를 먹으면 영원히 죽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눈도 밝아지고, 하느님처럼 선악을 구별할 수 있게 될 거라고 유혹했다. 이브는 그 열매를 먹자, 순식간에 바뀌었다. 생전 처음으로 자신의 처지를 의식하게 되었다. 어쩌면 남의 눈을 의식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명석한 의식을 갖게 된 여성이 몽매한 남자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브는 곧바로 금지된 열매를 아담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그래서 아담에게도 자의식이 생겼다. 그러니까 태초부터 남성의 자의식은 여성인 만들어 준 것이다. 남성이 맡은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을 때 여성은 남성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남성의 자의식을 깨운다. 출산이라는 원초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 여성이 이런 식으로 남성을 자극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고, 여전히 자연의 강력한 힘이다.

두 번째 질문은 왜 뱀이 이브의 눈을 뜨게 했을까? 인간으로서는 뱀의 표적이 되기 전에 먼저 뱀을 보는 게 중요하다. 왜냐하면 뱀에게 잡아 먹힐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특히 나무 위에서 살던 인간의 먼 조상들처럼 작고 약한 존재라면 더더욱 그렇다. 어쨌든 <창세기>를 읽다 보면, 뱀은 파라다이스라는 에덴동산에서 우리에게 하느님의 모습을 보게 해 준 피조물이면서도 인간의 원초적이고 영원한 적으로 여겨진다.

뱀이 아담과 이브에게 제안한 것은 열매였다. 그 열매를 먹고,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다. 그리고 어떠 깨달음을 얻었다. 첫 번째 자각이 자신들이 발가벗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발가벗었다는 것은 나약하고 상처 입기 쉬운 상태라는 것을 의미한다. 몸의 생김새와 건강 상태를 남들의 시선 속으로 내맡기고 있다는 뜻이다. 지연과 인간의 정글에서 보면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하는 무방비 상태임을 뜻한다.

어쨌든 눈을 뜨자, 그들 자신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 왔다. 결함이 두드러져 보이고, 약점이 눈에 띄었다. 그래 그들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연약한 부분을 가리고 자존심을 지켰다. 그러고는 수치심을 느끼고 어디론 가 달려가 숨었다. 사실 아름다운 것은 추한 것을 부끄럽게 하고, 강한 것은 약한 것을 부끄럽게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름다움과 건강함, 탁월함과 강함 등 이상적인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까? 포기는 좋은 해결책이 아니다. 포기는 수치심을 더 키우고 자괴감까지 안겨 준다. 남의 눈을 의식하기 싫다고 나보다 잘난 사람이 모두 죽기를 바랄 수는 없지 않은가?

아담과 이브의 다음 이야기는 비극적이다. <창세기> 제3장 8절-10절은 이렇다. "그들은 주 하느님께서 저녁 산들바람 속에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다. 사람과 그 아내는 주 하느님 앞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주 하느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셨다. 그가 대답하였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웠습니다."

왜 두려웠을까? 세 번째 질문이다. 연약하고 불안한 존재인 인간은 진실을 말하는 데 두려움을 느낀다. 혼돈과 질서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운명을 받아들이는 데 겁을 먹는다. "그분께서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 더냐?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먹었냐?" 하고 물으시자, 사람이 대답하였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창세기> 제3장 11장-12장) 애처로운 핑계이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최초의 여자 덕분에 최초의 남자는 자의식과 원망의 감정을 배웠다. 그리고 최초의 남자는 최초의 여자에게 책임을 돌렸다.

흥미로운 것은, 더 나아가, 하느님에게도 책임을 물었다. 오늘날 여성에게 퇴짜를 맞은 남성의 기분 변화도 비슷하다. 남자가 여자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하느님을 원망하는 것과 같다. 왜 그런 못된 여성을 만나게 됐느냐고, 자신을 왜 이렇게 쓸모없는 존재로 태어나게 했느냐고 원망한다.

그러나 하와 여자도 책임을 뱀에게 전가했다. 놀랍게도 뱀이 사탄이었다는 게 밝혀진다. 하와는 최악의 악마에게 당한 것이다. 그러나 아담이 남을 탓한 것은 순전히 그의 자유 의지이다. 안타깝게도 최초의 인간에게나 뱀에게나 최악의 상황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먼저 뱀에게 저주를 내렸다. "너는 모든 집짐승과 들짐승 가운데에서 저주를 받아 네가 사는 동안 줄곧 배로 기어 다니며 먼지를 먹으리라." 그리고 분노한 인간의 발에 밟히지 않을까 떨어야 한다. 다음으로 여자에게는 "나는 네가 임신하여 커다란 고통을 겪게 하리라. 너는 괴로움 속에서 자식을 낳으리라. 너는 네 남편을 갈망하고 그는 너의 주인이 되리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여자에게는 아기를 낳을 때 몹시 고생할 것이고, 무능한 데다 때로는 분노하는 남편에게 영원히 지배당할 것이라고 저주했다.

그 저주가 무엇인가? 네 번째 질문이다. 그 답은 내일로 미룬다. 글이 길어지니, 오늘의 시 <그리운 성산포 5> 연작시를 공유한다. 제주도의 바다가 그립다.

그리운 바다 성산포 5

일어설 듯 일어설 듯 쓰러지는 너의 패배
발목이 시긴 하지만 평면을 깨드리지 않는 승리
그래서 내 속은 하늘이 들어 앉아도 차지 않는다
투항하라 그러면 승리하리라
아니면 일제히 패배하라 그러면 잔잔하리라
그 넓은 아우성으로 눈물을 닦는 기쁨
투항하라 그러면 승리하리라

성산포에서는 살림을 바다가 맡아서 한다
교육도, 종교도, 판단도, 이해도
성산포에서는 바다의 행포를 막는 일
그것으로 둑이 닳는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은 절망을 만들고
바다는 절망을 삼킨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이 절망을 노래하고
바다가 그 절망을 듣는다

오늘 아침 하늘은 기지개를 켜고
바다는 거울을 닦는다
오늘 낮 하늘은 늦잠을 자고 바다는 손뼉을 친다
오늘 저녁 하늘은 불을 켜고 바다는 이불을 편다
바다가 산허리에 몸을 부빈다
산이 푸른 치마를 걷어 올리며 발을 뻗는다
육체의 따뜻한 햇살
사람들이 없어서 산은 산끼리 물은 물끼리
욕정에 젖어서 서로 몸을 부빈다
목마를 때 바다는 물이 아니라 칼이다.
목마를 때 바다는 물이 아니라 양이다
그릇밖에서 출렁이는 서글픈 아우성
목마를 때 바다는 물이 아니라 갈증이다

성산포에서는 사람보다 짐승이
짐승보다 산이, 산보다 바다가
더 높은데서 더 깊은데서 더 여유 있게 산다
성산포에서는 교장도 바다를 보고 지서장도 바다를 본다
부엌으로 들어온 바다가 아내랑 나갔는데
냉큼 돌아오지 않는다.
다락문을 열고 먹을 것을 찾다가도
손이 풍덩 바다에 빠진다

평생 보고만 사는 내 주제를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나를 더 많이 본다
하늘이여
바다 앞에서 너를 쳐다보지 않는 것을 용서하라
하늘이여
바다는 살았다고 하고 너는 죽었다고 하는 것을 용서하라
너의 패배한 얼굴을 바다속에서
더 아름답게 건져내는 것을 용서하라
그 오만한 바다가 널 뜯어먹지 않고
그대로 살려준 것을 보면
너도 바다의 승리를 기뻐하리라
하늘이여
내가 너를 바다속에서 보는 것을 용서하라

나는 지난 24일 24일자가 말하는 '득도(득도)의 7 단계'를 공유하였다. 그 7 단계를 순서대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외천하(外天下)에서 시작하고,
(2) 외물(外物)
(3) 외생(外生)을 거쳐,
(4) 조철(朝徹) 단계와
(5) 견독(見獨) 단계에 이르고, 여기서
(6) 무고금(無古今), 무시간의 경지와
(7) 불사불생(不死不生), 곧 사생의 구별이 없어지는 경지를 맛보는 단계이다.

일정한 수련을 통해 일상적 의식에서 비일상적 의식으로 들어가므로, 우선 외부 세계, 물질 세계를 잊어버리고, 결국에는 우리의 삶 자체 '나'라고 하는 것 자체를 잊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단계들은 전체적으로 잊음, 비움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완전히 잊어버리면, 갑자기 새로운 의식이 생겨나 사물을 꿰뚫어 보는 형안(炯眼)이 열려 '밝음'을 체험하게 된다고 한다. 그런 후 마지막으로 '하나'를 보게 된다. 이런 단계를 거쳐 궁극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구별이 없어지는 무시간(atemporal)의 경지, '영원한 현재(eternal now)'에 머물기에 죽음과 삶이 문제되지 않는 절대 자유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롭고 싶으면, 사물의 한 단면만을 보고 거기에 집착하는 옹고집과 다툼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사물을 '하나'로 보는 것, 다시 말하면, 통째로 보는 것이 '하늘의 빛에 비추어 보는 것, 즉 '조지어천(照之於天)'이고, 도의 '지도리'(도추道樞, pivot, still point)에서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실재를 있는 그대로 그렇다 함이다. 장자는 이를 "인시(因是)라 한다. 나는 이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마음을 '명(明')으로 본다. 공자가 <<대학>>에서 말하는 "도재명명(道在明明)"에서 얻은 생각이다. 그리스도교 철학에서는 '반대의 일치', '양극의 조화(coincidentia oppositorum)'라 말한다.

오강남은 이를 '의식(意識)의 심화(深化) 과정'이라 말했다.  그러면서 이는 서양 정신계의 심층을 형성해 왔다고 볼 수 있는 '신비주의(神秘主義)', 신비체험 전통에서도 인간의 영적 성장 과정에 다음과 같은 세 단계가 있음을 이야기 하였다.
(1) 정화(정화, purgation)의 단계
(2) 조명(조명, illumination)의 단계-장가가 말하는 '조철'이 겹쳐진다.
(2) 합일(합일, union)의 단계라 불렀다.

배철현 교수에 의하면, 동방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말하는 수행의 3 단계도 비슷하다.
(1) 더러운 생각, 말 그리고 행동을 정화하는 '카타르시스(catharsis)'를 경험한 뒤,
(2) 명상과 깨달음을 통한 '테오리아(theoria)를 거쳐,
(3) 신과 합일하는 '테오시스(thosis)'로 이어진다.

나는 오늘 아침 이 '테오리아'에 시선을 고정한다. 동방 그리스도교에서 묵상을 그리스어로 '테오리아'라 한다. 그들은 '신과 합일되는 깨달음을 위한 단계'인 테오리아를 그리스도인의 최우선으로 삼았다. 이 테오리아는 정결한 삶, 절제와 경전의 명령 준수 그리고 신과 이웃 사랑 실천을 통해 얻을 수 있다. 참고로 이론이라는 의미의 '씨오리(theory)'는 이 단어에서 나왔다. 이 '씨오리'의 원래 뜻은 '자신의 마음을 깊이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테오리아'는 '자아 발견을 위한 고독'이라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신의 목소리는 천체의 변화에서도 있지만, 부드럽게 들려오는 '섬세한 침묵의 소리'에 숨어있다. 이 영적인 기운, 침묵의 소리가 예수를 데리고 간 사막이다. 이 사막을 그리스어로 '에레모스(eremos)'라 한다. 이 단어의 원래 의미는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버려진, 비어 있는 공간'이다. 그러나 일상과 구별되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예수가 40일을 보낸 것은 과거의 자아가 소멸되는 기간을 의미한다. 경계의 끝까지 간 사람이다. 죽음을 경험하는 신비의 순간까지 간 사람이다. 거기서 신의 '섬세한 침묵의 소리'를 들었다. 그게 내가 말하는 묵상의 시간이다.

중세에 이 '테오리아'를 라틴어로 '콘템플라티오(contemplatio)'로 번역된다. 여기서 영어 '콘템플에이션(contemplation)'으로 차용되어 보통 '묵상'으로 번역된다. 이러한 묵상을 통해 '에고'라는 자아에서 벗어나, '무아'의 상태로 진입하는 수련이 득도의 과정이다. 이 무아의 상태에서는 너와 나의 구분이 없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도 없다. 그래서 세상을 자신의 시간이 아닌 삼라만상, 즉 하늘의 시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한다. 이때 신비가 일어난다. 신비라는 '절대 타자'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게 된다. 이 '도'(道)'를 전수하는 과정은 내일 더 이야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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